해병대 헌병대 - 구문굉

by 운영자 posted May 2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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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간35기 구문굉님

 

 

과거 해군 서울지구 헌병대는 서울에 사는 왼 만한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상업은행 본점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고 옆으로는 남산 2호 터널이 뚫려 있어 그렇지, 옛날에는 남산 2호 터널도 생기지 않았고 바로 그 자리에 벨기인들이 지은 붉은 2층 벽돌집이 위엄 있게 버티고 있는데다 또 그 건물에 들어가는 중앙에 큰 고복이 한 그루 있어 매우 이색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설치고 있는 우리 해병대 헌병들의 복장과 백차는 실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 요귀로도 충분할 수 있었고 더구나 위치가 바로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의 뒤편에다 또 남대문 시장을 가고 오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켰기 때문에 더욱 알려져 있었다.

 

 

또 역사적으로는 왜정 때 그 건물이 바로 일본 헌병들이 썼던 건물이라 3.1 독립 운동 때는 유관순 누나가 바로 그 곳에서 고초를 당했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잇었다. 물론 지금은 그 유물을 잘 보존하느라 다른 곳으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바로 그 장소를 가 볼 기회는 없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은 그 건물은 헌병감실이 단독으로 썼을 뿐이었고 또 헌병감실이 대방동으로 떠난 후로도 서울지구 헌병대는 공실로 비워둔 그 건물을 매일 바라보고만 살았다.

서울지구 헌병대는 불쌍하게도 끝내 그 내부 담벼락 옆에 세운 반원형의 큰 콘세트 안에서만 업무를 했고 또 건물 뒤쪽의 부속 건물은 헌병대장실과 우리 헌병들의 내무실, 식당 그리고 당시 전국을 휩쓸었던 해병대 야구단의 숙소로만 정해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헌병 대장은 중령이 하게 되어있었으나 해간 18기의 진 소령께서 보직을 맡아 하셨고 보좌관으로는 바로 해사 14기의 윤춘웅(미국서 작고) 대위셨고 나도 대위로써 보안 과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우리 서울지구 헌병대의 바운다리는 서울지역과 경기도 그리고 충북이었다.

충북의 어느 시골에서 문제가 생겨도 현장을 가기가 너무 멀고 귀찮고 연천이나 동두천쯤에서 사고가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얼른 들어 놀라운 것은 고참 상사만 자그마치 7명이 있었다.

 

 

당시 직책으로만 보면:

 

박순재상사: 보안계장. 해병 헌병의 최고참으로 월남서도 함께 근무.(작고)

이종진상사: 해군 조사계장.

장만성상사: 보안 및 행사 담당.

고상사 : 보안 맟 행사담당.

홍문표상사: 영등포 파견 대장 및 해군 교도소장.(작고)

김상사 : 해병 교도소장.

하상사 : 수송반장.

 

 

근무 대상 중요 지역을 보면:

 

1.후암동 해병대사령부.

2.후암동 해병교도소.

3.대방동 해군본부.

4.대방동 해군교도소.

5.한남동 4개공관(국방부 장관. 육참총장. 해군 참모 총장. 해병대 사령관).

6.중지도 합동검문소.

7.용산역.

8.합동순찰대(육해공군.경찰).

 

 

이 모든 곳을 40명 정도의 인원으로 배치를 하고 근무를 통제해야 하는가 하면 항상 청와대. 국방부. 사령부. 해군 본부. 합참. 육본. 미 8군과 관련해 에스코트는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라 실로 중책이 아닐 수 없었고 국군의 날 행사에는 내가 2년간을 연속 육해공군 헌병 중대장으로 여의도에 나가 맨 앞 백차 네 대와 후미의 백차 네 대가 앞으로 움직일 때 한 치의 오차가 없도록 오와 열을 맞추게 하는 훈련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김포 여단으로 넘어 오다 우리 해병대에 잡힌 간첩은 인민군 현역 중위였다.

결국 사형을 시키는 날은 닥아 오고 나는 침울 했다. 헌병 대장이 나를 집행관을 시키면 영락없이 해야 하는 입장이고 또 확인관을 시키면 집행 후 마지막으로 내 손으로 권총을 뽑아 관자노리에다 총을 쏘아 끝을 맺어야 하는 입장이라 고민을 많이 했다.

나름대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의 경험도 있는데 그까짓 거 하라면 못하랴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사실은 내 집 사람이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여서 너무 망서림이 컸었다.

 

 

당시 헌병 대장 진 소령은 해병대에서도 독특한 분이셨다. 6.25때 사병으로 그리고 하사관으로 그리고 또 해간으로 임관을 하신데다 위관 때는 그 유명하셨던 남상휘 (작고)장군의 부관을 하셨고 또 붓글씨가 명필인데다 영어를 하도 잘해 사실은 6.25가 원수지 엄청 크게 될 수도 있었던 분이셨다.

 

미리 내 심경을 읽었는지 집행 이틀 전 헌병 대장실로부터 “구 대위는 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는 윤춘웅 선배께서 내게 다가와 “구 대위는 헌병대나 잘 지켜”하는 말을 해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우리가 쓰던 회현동의 자리에 파견대만 두고 해군 본부 안으로 모두 이사를 했다.

그 동안 헌병 대장 진 소령께서는 월남으로 가셨고 해사 14기 윤춘웅 선배는 광주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교육을 가셨다.

그리고 공석인 헌병 대장은 포항 상륙 사단에 계시던 해간 8기 기갑장교 이병준 중령께서 오셨다. 또 고맙게도 해간 36기인 이상우 대위가 순찰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아 왔다.

 

 

어느 이른 여름날, 정오가 마악 지난 시간에 엠블란스의 사이렌 소리가 해군본부 연병장 쪽에서 났다. 그리고는 왼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스러워 바깥으로 나가보니 무슨 변고가 나도 크게 난 것 같았다. 전령이 뛰어와 감실에서 온 전화를 빨리 받아 보라는 전갈이었다.

나는 대충의 내용을 감실 수사과로부터 듣고는 화를 버럭 냈다.

 

“야이 X헐 개 새끼들, 나가자빠져 있네. 그렇게 큰일을 이제 헬리콥터가 와서야 우리한테 알려주냐?”

*************************

 

 

남이 나를 그렇게 보지는 않지만 사실 나는 나름대로 좀 건방진 데가 있어 그런지 해병대나 해군의 고참 수사관들을 크게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부터 조서를 보면 군형법이나 형법의 구성 요건을 잘 모르고 조서를 쓰는 수가 있는가 하면 꼭 왜정 시대처럼 쓰지도 않는 말들을 자주 썼기 때문이었다.

 

“연(然)이나.. 우(右) 수권(手拳)으로 상대의 좌측(左側) 안면(顔面)을 2회 강타(强打)후 전도(顚到)케 하였으며....”

 

내가 결재를 할 때는 “이거 고치지요. 오늘 쪽 주먹으로 상대의 왼편 얼굴을 두 차례 때려 넘어지게 하였으며,,, 라고하면 안 돼요? 또 연(然)이나 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는데 빼는데 낫겠어요”  

결재를 받으러 온 나보다 나이 많은 수사관이나 조사관들은 마치 그런 문구를 써야 의당 조서가 되는 것처럼 잘못 배웠기 때문에 언제나 서먹하게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들은 얘기가 있어 “견타식(犬打式) 구타(救打)가 뭔지 알아요? 그게 바로 개패듯이 팼다는 말이라는데...”

 

 

내가 제대를 하는 날. 해군과 해병대의 헌병 그리고 보안대 요원들까지 모두 합쳐 16명이 모 정보기관에 경쟁시험을 치러 갔다. 제한은 계급이 중사부터 소령까지였고 육해공군 경찰의 현역이나 예비역들이 거의 200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연(然)이나 ㅋ... 시험은 거의 하루 종일이 걸리다시피 했는데 제일 큰 고비는 사건을 하나 주고 네 시간 이내 모든 조서 작성을 하라는 것이었다.

즉 정보 또는 인지 보고서부터 시작해 마지막 의견서까지 써야 했고 특히 증거물들은 요령에 의해 표시를 해야 하는 경우였다. 그야말로 실무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꼭 같은 시험을 쳤던 것이다.

연(然)이나 ㅋㅋ... 그 결과는 창피스럽게도 나와 헌병감실에서 맨 날 찬밥 신세였던 해군 중사 한 사람 밖에는 합격하는 사람이 없었다.

****************

 

 

 

결국 연병장에 헌병들을 빨리 배치하고 내가 앰블런스를 뒤따라 바로 해군본부와 붙어있다 시피한 해군 병원으로 달려갔다. 총에 맞아 죽은 시신들은 그렇다 치고 총을 쏜 피의자가 자살을 하려다 미수에 그쳤기 때문에 바로 그 피의자를 감시하는 것이 우리 헌병들의 임무였다.

 

인천에서 조금 떨어진 무인도에서 해군과 해병대 1개 분대가 TV 찬넬을 문제로 삼아 매일 시비를 하다가 분개한 해병대 하사관 한명이 해군들이 있는 벙커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고 M-16으로 난사를 해 버렸던 것이다. 월남전에서 돌아 온 그 하사관은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날 다시 병원에 들린 나는 피의자가 침대에 누워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좀은 당황스러웠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청룡부대 헌병대에 계실 때 보았다고 해 너무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그런대로 사소한 일은 자주 벌어져도 별로 큰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퇴근을 해 집에 있는데 난데없이 교도소에서 탈옥수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운전병이 몰고 온 차로 대방동으로 향했다.

벌써 당번을 서던 헌병이 대신 닭장에 들어가 있었고 탈옥의 내용은 슬슬 옆에서 다른 죄수가 말을 붙이는 사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헌병의 열쇠를 슬쩍 했던 모양이었다.

모두 추적을 위한 업무 분담을 했다.

당시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어 혹시라도 통행금지로 경찰서 유치장에 묻어 들어 와 있지는 않은지? 또 사창가에 숨어들어 있지는 않은지? 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는데 결국 우리는 당일 요행스럽게도 청량리 588에서 탈옥수를 검거할 수 있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도 가, 해사 14기 윤춘웅 선배는 교육을 마치고 원대 복귀를 하셨고 이병준 대장께서는 점차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이 보였다.

이병준 대장께서는 일찍이 수륙 양용차 교육을 미국으로 건너가 미 해병대로부터 받고 오셨기 때문인지 멋쟁이에다 키는 작으셔도 인물이 좋으셨다.

 

자신이 진해 헌병 대장으로 있었을 때의 얘기로 미스 코리아와의 염문을 얘기하면 정말 실감이 날 정도로 묘사를 잘 해 나는 개면적어 웃기만 했다.

또 시간만 있으면 나를 붙들고 장기를 두자고 하셨는데 아마 유단자쯤은 되지 않나 싶은 실력이셨다.

그러나 하늘은 다는 주지 않는지 이미 간이 말이 아닐 정도로 나쁘셨고 그런데다 내 제대 기념 파티를 열어주시면서 너무 술이 과하셨던지 귀가하시다 차를 돌려 병원으로 바로 직행을 하셨는데도 그만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때가 1971년 1월이었고 나는 1971년 2월 1일에 제대를 했다.

 

대장님. 저가 잘 보필해 드리지 못한 죄인입니다.  삼가 대장님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빕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