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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수 절정기때 해병대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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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1947년 서울 출생
ㆍ 배문고 졸업
ㆍ 한일은행 투수, 배문고 ·상문고 · 동국대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 · OB 베어스 감독 역임
ㆍ 2001년 골드 스포츠 프로야구 대상 프로감독상 수상 
 

1967년 해병대에 입대할 당시 나는 그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 등 투수로서의 기량이 절정에 올라 있었다. 대회 참가 이후 나를 눈여겨 본 해병대·육군 야구팀 관계자들이 집중적으로 영입(입대) 제의를 해왔다.

내가 소속돼 있던 한일은행 강대중 감독은 좀더 선수생활을 한 후 입대하라며 나를 잡았지만 만류를 뿌리치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당시 해병대팀은 투수력만 보강하면 실업리그 우승도 할 수 있는 강팀이어서 내가 가면 뭔가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복무기간이 26개월로 짧다는 것도 구미를 자극했다. 해병대가 멋있어 보였다는 것도 입대하게 된 동기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훈련소에 입소한 후 힘들기로 소문난 해병대 훈련을 받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해와서인지 견딜 만했다. 그나마 훈련소에서는 열흘 정도밖에 훈련을 받지 못했다. 원래 4주 훈련이었지만 입소하자마자 실업야구대회가 잇따라 두 개나 열리는 바람에 거기에 참가하고 돌아와 보니 동기생들의 훈련이 이미 끝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격도 사격술 예비훈련만 받았지 총 한 번 제대로 쏴보지 못했으니 해병 치고는 상당히 허술한 해병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내게도 총을 잡아볼 기회가 생겼다. 그 계기는 다름 아닌 김신조 사건(1968년 1·21사태). 이 사건 이후 전군에 비상이 걸렸고 운동선수들도 태릉에서 사격훈련을 받게 됐다.
해병대 야구팀은 해군 헌병감실 소속이어서 서울 회현동 헌병감실 내무실에서 생활했다.

해병대 야구단을 최고의 팀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안고 입대했건만 사실 나는 당초 목표만큼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입대 전 어깨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은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군에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평소 공 100여 개는 던져야 피로가 오던 어깨가 60~70개만 던져도 아플 정도였으니. 그나마 내가 군생활을 하던 시기에 해병대 야구단이 1969년 실업리그 우승을 비롯해 전국체전·백호기 야구대회 등에서 우승해 체면 유지를 할 수 있었다.

해병대 야구단인 만큼 경기에도 `해병대 정신'으로 임하곤 했다. 당시 감독은 삼미·롯데에서 감독을 지낸 김진영씨였는데 선수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야구를 했다. 비록 우승해도 포상휴가는 못 갔지만.
그 중에서 우리 팀원들이 가장 눈에 불을 켜고 야구를 했던 경기는 실업리그도 아니었고 전국체전도 아니었다. 당시 군에는 해병대·육군에 야구팀이 있었는데 두 팀의 경기만큼은 해병대와 육군 모두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때문에 피와 땀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노란색이 조합된 유니폼을 입고 육군과 경기를 할 때의 그 치열함이란. 육군에는 질 수 없다는 자존심 문제도 있었고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을 당시 `지면 베트남에 보낸다'는 지휘관들의 협박성(?) 격려도 경기의 열기를 더하는 데 한몫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 신고를 하던 날 `뭔가를 해냈구나'하는 뿌듯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자로 태어나 병역의 의무를 수행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군에 다녀오면서 한마디로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정신력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요즘 프로야구 후배들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후배들을 보면 위계질서는 있지만 정신력이나 협동심 등이 이전에 군생활을 거친 선배들만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이기적인 면이 눈에 띌 때가 많다. 따라서 지금 군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장병들은 군문을 나설 무렵 강한 정신력과 협동심을 갖춘 인재가 돼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두산베어스 감독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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