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북파공작대 MIU부대 전우회

posted May 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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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해병북파공작대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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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훈련교장 흔적 그대로 남아있어
7년간 존재·119명 생존·8명 정부보상 받아
육·해·공 막론 ‘즉각 침투·임무 완수’
일반 회사에서 쓰는 직함으로 계급 대신
하수구 생존훈련·공동묘지 취침훈련도

북한 8군단소속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한 1968년이후 74년 남북공동성명이 있기까지 7년간 국내에는 북파공작부대가 존재했었다.
육군은 HID, 공군은 실미도부대, 해군은 UDU, 그리고 해병대가 운영한 MIU부대(해병북파공작대)가 그것이다. 강화도에 존재했던 MIU부대(일명 ‘까치’부대)는 육상침투부대인 HID, 해상침투가 목적인 UDU부대, 공군첩보부대 실미도부대와 달리 육, 해, 공 어느 곳을 막론하고 즉각 침투해 임무를 완수하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천후 부대로 알려져있다.
까치부대가 주둔하던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부근 일대는 현재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혀 있지만 부대의 흔적들은 지금도 찾아 볼 수 있다. 내무실이 있던 축대, 탄약고, 하강 훈련장의 로프매던 지주대, 유격장이었던 암벽교장이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세상에 알려질 날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다.
이곳 암벽교장은 떡갈나무 숲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암벽에 올라가면 강화도 남단 갯벌과 인천 영종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MIU부대’(일명 까치부대·해병대 북파공작대)는 ‘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 직후 실미도 부대와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병대에서 창설한 비편제 특수부대다. 계급은 없었으며 부대장은 회장, 부부대장은 사장, 다음은 전무, 상무, 과장, 직원 등 일반회사에서 사용하는 직함을 계급으로 대신했다.
1968년 11월 중앙정보부는 최초 장기하사관 11명과 사병 2명을 차출해 마니산 서남쪽 정수사 아래 텐트를 치고 합숙훈련을 시작하면서 MIU부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2년후 하사관 15명 사병 15명을 선발해 2진으로 투입시켰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총인원은 장교(공작관) 13명, 요원 158명이며 현재 연락이 가능한 요원은 공작관 5명, 요원 114명이다. 그중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하거나 혹독한 훈련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요원이 13명,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요원이 4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MIU부대’의 목적은 북한 8군단같은 특수부대를 일격에 격퇴하고 주석궁에 침투할 수 있는 목적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선발은 해병대원중에서 우수하고 강인한 자를 중심으로 선발했으며 선발기준은 장남과 외아들은 제외하고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과 특히 운동 주특기자를 대상으로 했다.
선발과정에서 외아들과 장남을 제외한 것은 훈련과 작전 중 사망해도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당시 고교졸업자 이상을 선택한 것은 북한의 모든 사항을 암기해야 하는 지적능력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선발은 야구선수의 경우 100M 떨어진 곳에서 달려가는 사람을 상대로 돌을 던져 쓰러뜨릴 수 있냐고 질문한 뒤 있다고 하면 확인과정을 거쳐 입대를 결정했다.
복싱선수 출신으로 중1에서 고3까지 6년을 선수 생활한 이진범(해병대북파공작원 회장) 씨의 경우 “같은 덩치 3명과 싸워 몇 분내 쓰러뜨릴 수 있냐”고 질문받고 “30분내 자신있다”고 답하자 실제 경기후 입대가 결정됐다.
입대후 요원들은 위장을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른 상태였으며 북한군 복장에 무기조립, 북한상황을 숙지·암기하며 혹독한 훈련에 임했다.
평상시 임무수행 요원은 40~50명을 항상 유지했으며 훈련중 부상을 입거나 사망해 결손인원이 생길 때마다 인원을 보충해 동일한 능력과 힘을 유지했으며 모든 요원들은 훈련시 “나라는 위해 몸바치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에 보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유서를 쓰게 했다.
훈련은 계절별로 내용을 달리했는데 봄에는 강화도내 하수구를 대상으로 생존훈련을 했으며 1주일은 하구수내에서 생활했다. 하수구훈련은 평양시내에 잠입했을 경우 피신과 생존을 위한 훈련으로 실시됐다.
여름에는 고무보트(IBS)를 이용한 해상침투훈련, 가을에는 공군첩보부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으며 겨울에는 대관령에서 스키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담력훈련을 위해 비오는 날 공동묘지 밑을 파서 관위에서 취침하는 훈련도 병행됐다.
침투를 위한 훈련은 대형 애드벌룬에 수소가스를 넣어 부공하고 3000M 상공을 유지한 체 북풍을 이용, 잠입하는 훈련으로 애드벌룬 2개를 연결하기도 했다.
치악산 정상에서 훈련했을 당시 단양 논에 떨어졌는데 간첩으로 오인, 영주경찰서에 연행돼 중앙정보부 확인을 거쳐 풀려나기도 했다.
모든 부대의 훈련, 특히 북파공작대 훈련에는 침투와 복귀를 위한 기안계획이 있으나 ‘MIU부대’는 투입작전계획은 있으나 돌아오는 계획은 없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훈련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75년10월 부대내에서 사병이 당직사관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해군첩보부대 이관철부부대장이 ‘MIU부대’ 김기태 회장을 찾아와 ‘북한과의 화해무드’를 말하며 더 이상 특수부대 존재이유가 없다며 해체시킬 것을 명령함에 따라 7년 동안 비밀리에 악명을 떨치던 해병북파특수공작대(해군첩보부대 503기지)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MIU부대’ 출신들은 2003년 12월 해병 북파특수공작대본부를 결성됐다.
이들은 북파공작대 ‘MIU부대’ 실체를 인정받기 위해 2003년 12월부터 국정원, 정보사령부, 해병대를 실체확인을 어렵게 받아냈으며 북파공작 특수임무자의 특별보상법과 예우법(2004년 1월8일 국화통과)에 따라 보상해줄 것을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121명이 보상을 신청했으며 현재 8명이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MIU부대’ 실체 확인을 위해 홀몸으로 동분서주했던 해병 북파특수공작대본부 이길범회장(현재 양평군 거주)은 해병대사령관에게 ▲실체인정 ▲해병역사지에 기록 ▲위령탑 또는 충혼탑건립을 주장했으며 확답을 받은 상태다.
이 회장은 인터뷰에서 강화주민께 죄송함을 전했다. 훈련과정에서 다소간 주민들게 피해를 입혔으며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절실한 행동으로 “기회를 만들어 사과하고 싶다”고 전했다.
마니산 ‘MIU부대’ 훈련장은 최근 해병대 수색대를 전역한 해병 예비역들이 ‘해병생존훈련단 그린베레’라는 해병대 훈련캠프 회사를 운영하며 선배들이 훈련했던 곳에서 그 정신을 사회인에게 전하고 있다.

김포=곽종규기자 gyoo@kgmae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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