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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수립된 1948년부터 6·25전쟁 때까지 남북 간에는 체제 경쟁이 치열했다.

특히 북한은 남로당을 조종해 남한사회의 혼란을 획책하기에 열중했다. 빈번한 납치와 테러, 파괴공작도 그 작전의 일환이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전후해서는 해군 함정 납북사건이 빈발, 신생 대한민국 해군의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총선거를 사흘 앞둔 48년 5월 7일이었다. JMS 통천정이 북한으로 납북됐다는 급보가 조선해안경비대사령부에 날아들었다.

5·10선거 전후 사건 빈발

묵호기지에 배속돼 있던 통천정은 주문진 부근 해상에서 38선 인접 해역 경비근무를 마치고 귀항 중이었다. 그 사이 좌익 승조원들이 정장 김원배 소위와 부장(副長) 백경천 병조장을 사살하고 배를 속초항으로 끌고 간 것이다. 그때는 속초가 북한 땅이었다.통천정이 납북된 지 8일 후인 5월 15일에는 YMS 고원정이 끌려갔다.

고원정은 제주도 근해에서 작전을 수행하다 묵호 배속 명령을 받고 항해 중 좌익 승조원들에게 납북당했다.한동안 잠잠하던 함정 납북사건은 49년 5월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춘천과 홍천에 주둔하던 육군 2개 대대 월북사건이 잇달아 터져, 군 수뇌부가 발칵 뒤집혀 있을 때였다.

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은 그해 5월 4일 북한 인민군과 내통해 자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인 5월 11일 YMS 508(강화)정이 납북됐다는 급보가 해군본부에 날아들었다. 부장이 정대사령 황운수 중령과 정장 이기종 소령을 사살하고 배를 몰고 올라간 것이다.

해군 고위 간부와 해사 동기생이 희생된 이 사건의 충격은 컸다. 나도 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데, 오래지 않아 내 차례가 왔다. JMS 302(통영)정이 묵호해역 경비임무를 마치고 임무교대차 부산으로 귀항한 5월 20일의 일이다. 그때 나는 막 결혼해 부산에서 살림을 시작한 신혼 초였다.

부산항 3부두에 302정을 정박시키고 아내를 만나기 위해 상륙한 사이, 부장 김점복 소위가 일을 저질렀다.김소위는 자신과 내통하는 510정 부장 서문걸 소위 등 동조자 3명을 태우고 밤 10시 기관사를 협박해 배를 출항시키려 했다. 낌새를 챈 기관장 황명호 병조장 등 6명은 일부러 기관을 고장 내 출항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고 이 사실을 신고했다.

여순사건을 겪은 302정 승조원들은 누구보다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돼 있었다. 김소위의 위협에 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고발함으로써 나는 살아남아 많은 무공을 세우고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다.

302정 승조원 반공정신 투철

“저를 믿고 배를 맡긴 정장님을 차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승조원들이 정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 정장님을 죽이면 더 어려워질 것 같아 외출나간 사이에 거사했습니다.”군법회의에 넘겨진 김소위는 법정에서 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진술했다.

“김점복은 충성심이 강한 훌륭한 장교로서 내가 가장 신뢰하고 좋아하는 후배였습니다. 그는 부임 후 한 번도 외출을 나가지 않았을 만큼 모범적인 장교였습니다.”증인으로 법정에 나갔던 나는 “김소위가 어떤 사람이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이렇게 진술했다. 그 순간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내 진술은 다 사실이다. 해사2기생 출신인 그는 정말 모범적인 장교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병들과 함께 함정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고 내 말에도 충직하게 복종했다. 승조원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졌던 그는 사관학교 때 성적도 좋았다. 사상이 뭔지, 체제가 뭔지, 우리는 아까운 청년장교 하나를 그렇게 잃었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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