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총기사고로 사촌동생 잃은 개그맨 임혁필

by 해순이 posted Aug 0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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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경호원 되고 싶어 했던 사촌동생 승렬이,

ㆍ다시는 이런 비극 일어나지 않았으면…"


<레이디경향> 지난 7월 4일, 강화도 해병대 2사단 내무반에서 일어난 총기사고로 네 명의 꽃다운 청춘이 세상을 등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개그맨 임혁필(39)의 고종사촌동생인 이승렬 상병도 그 희생자 중 한 명이다. 가족이자 해병대 후배인 사촌동생을 잃은 그는 애써 슬픔을 다독이는 중이다. 휴가 때 술 한잔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며 가슴 아파하던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임혁필을 만난 건 사건이 일어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 그가 공연을 하고 있는 대학로 공연장에서였다. 그와는 지난해 가을, 가족을 주제로 한 인터뷰를 통해 만난 적이 있다. 딸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인터뷰 내내 웃음꽃을 피우던 그의 얼굴에는 미소 대신 슬픔과 피로가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촌동생을 떠나보내야 했던 지난 일주일. 하루하루 더디게 가던 시간은 어느새 저만치 달려 나가고 있었다. 비보를 접한 건 사건 당일 오후, 아내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방송 녹화를 마치고 오후 4시 반 정도 됐을 때였어요. 아내가 전화로 사고 얘기를 하기에 처음엔 '아휴, 무슨 소리야'라고 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뉴스에 사고 소식이 나오더라고요. 사망자에 이승렬 상병이 뜨는 걸 보고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싶은 거예요. 제가 해병대 출신이니까 군부대 쪽 아는 분께 연락을 드려서 상황을 확인했죠. 오전 11시 40분께 사고가 발생했고 그때 이미 승렬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승렬이의 부모님이신 고모와 고모부는 강화도 사고 현장에 계셨고 친척들은 병원으로 모이는 상황이었다. 그 역시 공연과 방송 등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저녁 8시쯤 시신을 태운 헬기가 병원에 도착했고 승렬이를 영안실에 들여보내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건강하게 웃으며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사촌동생을 하루아침에 저 세상으로 보내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하지만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는 상황에서 그마저 넋을 잃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해병대 708기인 그는 다른 해병대원의 빈소에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유가족의 입장을 해병대 측에 전달하고 유가족과 사령관의 면담을 주선하는 등 양쪽의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유가족이자 해병대 출신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저도 물론 충격이 컸지만 승렬이 부모님께서 받은 충격과는 비교가 안 되죠. 군대 간 자식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해보세요. 유가족들은 상당히 흥분된 상태였고 아무래도 이성적 판단이 힘든 상황일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은 네 아이 모두 제 후배들이잖아요. 아이들을 붙잡고 슬픔에 잠겨 있기보다는 빨리 좋은 곳으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지금은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당시 상황에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군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병대이기 전에 그도 유가족이기에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동생의 해병대 지원에 자신이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가슴 아프고도 복잡한 심정이었다.

"저희 아버님이 8남매세요. 승렬이는 막내고모의 아들이고요. 형제가 많다 보니 사촌들도 많은데 그중 저와 승렬이만 해병대에 갔어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마음이 갔죠. 승렬이가 해병대에 대해 묻기에 남자라면 한번 가볼 만한 곳이라고 했어요. 입대를 결정했을 때도 잘했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했던 게 후회가 돼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기필코 말렸을 거다. 비극은 예고 없이 날아들었고 동생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무거운 마음을 벗을 길이 없었다. 지난해부터 해오던 대학로 소극장 공연도 미루고 모든 방송 스케줄도 올 스톱했다. 3일 내내 장례식장에서 빈소를 지키고 영결식과 안장식, 삼우제까지 대전 묘역과 서울을 오가며 동생의 마지막 길을 동행했다.

"승렬이에게 다섯 살 터울의 누나가 있는데 둘 사이가 각별했어요. 그런 동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고모도 그렇고, 승렬이 누나도 3일 내내 너무 울어서 이러다 또 무슨 일 나는 거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승렬이가 제 사촌동생인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어요. 힘내라는 말씀도 많이 해주셨는데 무척 감사하죠. 하지만 저의 슬픔은 친가족들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가족들에게도 많은 응원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수열외, 구타, 왕따…
자극적인 이야기에 커져가는 유가족들의 슬픔


나이 차이가 스무 살 가까이 나는 승렬이는 아들 같은 사촌동생이었다. 마냥 아이 같았던 동생이 훤칠한 청년으로 자라 해병대에 간다고 했을 때 말릴 이유가 없었다.

"고모부께서 태권도를 하셨고 승렬이도 태권도를 잘했어요. 경호학과에 다니며 경호원의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해병대에 가면 꿈을 꼭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꿈이 사라지게 됐네요.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착한 녀석이었는데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뭘 해도 이룰 수 있는 나이었는데, 멀쩡하던 녀석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너무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동생을 회상하던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면회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했던 게 내내 가슴에 남는다.

"제가 포항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너무 멀어서 가족도 면회를 잘 안 왔는데 그때 유일하게 고모부께서 면회를 오셨어요. 멀리서 고생 많다고 등도 두드려주시고 격려도 많이 해주셔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승렬이가 입대할 때 꼭 면회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못 갔어요. 사고가 나기 3주 전쯤 고모부네랑 시간을 맞춰 가기로 했었는데 그때 제가 일이 생겨서 못 갔거든요. 한 번 보고 올걸…. 그때 면회를 못 간 게 미안하고 그렇게 마음에 걸려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거구나 싶어요. 그동안 이런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저한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닥치고 보니 어이가 없더라고요. 전쟁 중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총 맞아 죽는다는 게 참 일어나기 힘든 일이잖아요. 사건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그의 말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 네 명의 안타까운 젊은이들이 세상을 등졌다. 군대 내에서 일어난 총기사고. 그것도 기강이 엄하기로 유명한 해병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크나큰 희생을 치른 사건인 만큼 문제점을 바로 찾아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기수열외니, 구타니, 왕따니 하는 자극적인 내용들로만 관심이 모아지며 유가족들은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고 있다. 해병대 출신인 그에게 '기수열외'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똑같은 질문이 되돌아온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수열외가 뭐예요? 저한테 가르쳐주세요. 요즘 방송이나 인터넷을 보다 보면 가슴이 무척 아파요. 기수열외니, 구타니,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너무 자극적인 내용으로만 포커스가 맞춰지다 보니 유가족들의 아픔은 사라지고 없어요. 물론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이 맞지만 그런 말이 나올 때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유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상처받은 모든 분들 다시 힘내셨으면…

사실 사건이 발생하고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사건을 일으킨 김 상병이 "구타와 기수열외는 없어져야 한다"라고 진술하며 마치 피해자가 왕따 문제와 기수열외의 가해자인 것처럼 지목되는 상황이었고, 해병대와 유가족 양쪽 모두에 속한 그의 말 한마디가 또 다른 기사가 되어 슬픔에 빠진 누군가에게 가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해병대가 아니면 해병대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유가족이 아니면 유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달라"라고 당부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해병대 생활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세요. 해병대가 힘든 곳이라는 건 전 국민이 다 알아요. 그걸 알면서 지원을 했다는 건 그만큼의 각오와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선택한 거예요. 본인을 믿고 최선을 다해야죠. 제가 군대에 있을 때도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저만 힘들었던 게 아니에요. 아마 군대에 다녀오신 분이라면 다들 고생했던 기억이 있을 거예요. 해병대뿐만 아니라 육군도, 해군도, 공군도, 공익요원도, 면제받은 분들도 4주간의 훈련기간이 힘들 수 있어요. 힘들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힘들어요. 해병대이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이겨내지 못하면 힘든 거예요. 결국 본인의 문제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만 돌리기엔 희생이 너무 크다. 그 역시 시대에 흐름에 맞춰 병영문화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군대의 격차가 급속도로 멀어지고 있어요. 바로 어제까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최첨단 시대를 살던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밀폐된 사회에 구속돼요. 현실은 나날이 발전해가는데 군대는 여전히 1970, 80년대 시설을 이용하고 20세기 사고방식으로 움직이니 그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점점 심해지는 거죠. 병영문화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가 필요하겠죠."

군대 문제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일은 분명 줄어들 거라 믿는다.

승렬이의 삼우제를 마치고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빈소를 지키느라 빠졌던 공연에도 다시 합류했다. 그는 현재 대학로 소극장에서 직접 연출한 퍼포먼스 옴니버스 쇼 '펀타지쇼'를 공연 중이다. 아직도 길을 가다 승렬이 또래들을 보면 울컥 가슴이 아프지만,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승렬이를 위해서 힘을 내려고 한다.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 있을 수는 없잖아요. 승렬이네 가족도 다시 힘을 내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승렬이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힘을 내 열심히 살다 보면 승렬이도 어딘가에서 좋은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시 한번 많은 분들께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아픔을 잊지 말아주십사 당부드리고 싶어요."

언제 슬픔이 가실지, 언제 눈물이 마를지 알 수 없지만 하루빨리 유가족들이 잃어버린 웃음을 찾을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리고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그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비극적인 사고로 세상을 떠난 네 아들들의 명복을 빌었다.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너무 놀란 가슴에 스케줄을 다 접고 국군수도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승렬이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친척 어르신과 기자들만이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헬기가 도착했고 싸늘한 시신만이 검정 비닐 백에 싸여 있는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뒤가 되어 고모가 강화도 사건 현장에서 수도병원으로 왔습니다.
고모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습니다.

마련된 빈소에는 승렬이의 영정 사진이 있더군요.
해병대 훈단에서 훈련을 마치면 자대 배치를 받고 자대에 가기 전에 정복사진을 찍는데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다니….
그 해병 정복사진이… 영정사진이라니. 그 안에 있는 승렬이는 아주 잘생기고 멋진 해병대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또 한 시간이 흘러 고모부가 왔고 다른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에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거의 밤을 샜기 때문에 피곤함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서늘한 그리고 어두컴컴한 반 평도 안 되는 냉동고 영안실에 있을 승렬이를 생각하면 나의 피곤함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슬슬 염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 가기 전에 승렬이가 엄마와 아빠 그리고 누나한테 인사하려면 예쁜 모습으로 맞이 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승렬이의 멋진 모습을 보려고 다들 안 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게 되면 이제는 승렬이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염이 끝났고 먼저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가 들어갔고 이제 친척들과 승렬이의 친구들이 들어가서 얼굴만 보고 나오면 되는데 줄이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엄마하고 누나가 승렬이를 잡고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도 봐야지" 하며 재촉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모습에 고개 숙여 울고만 있을 뿐입니다.

근데 누나가 갑자기 쓰러집니다.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누나를 부축하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하게 했습니다.
역시나 그 와중에도 아빠는 냉정함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압니다. 그 누구보다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또 하루가 흐릅니다. 어느새 아침이 되었고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합니다. 영결식을 하면서 승렬이는 난생처음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대통령이 꽃을 보내고 국방부 장관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고 해병대 사령관이 승렬이에게 칭찬을 하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국회의원도 승렬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합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승렬이는 그런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엄마랑 아빠랑 누나랑 함께 있고 싶을 뿐입니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이 먹고 싶고 아빠랑 목욕탕에도 가고 싶고 누나랑 영화 한 편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승렬이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바쁩니다. 영결식이 끝나면 부평에 갔다가 대전으로 가야 합니다. 이제 승렬이가 살아야 할 곳이 대전이니까요.
대전에 갈 일이 별로 없었던 승렬이는 대전이 낯설기만 합니다. 혼자서 그곳에서 이제 앞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엄마 아빠 누나는 승렬이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이제 떠나야 합니다.
엄마 아빠 누나는 함께 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뗍니다.

세상에 살아오면서 제일 무거운 발걸음입니다. 이제 스물 살밖에 안 된 아이를 대전에 두고 우리는 떠납니다.
마음도 무겁고 발걸음도 무겁지만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데 무척이나 사랑하는데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생이면서 해병대 후배인 승렬아 좋은 데로 잘 가렴. 사랑한다.

해병대 708기 혁필 형이
2011년 7월 8일 임혁필의 트위터 멘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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