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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프랑스 종군기자가 본 6·25
ㆍ육중한 전차 위에 몸을 싣는다, 전투가 다가온다

ㆍ“3% 주민이 땅 60% 가진 나라, 환상적인 드라마죠”

“마침내 8월2일, 해병대를 가득 태운 첫 번째 함정 빅토리가 부산만으로 들어섰다. 필리프 도디는 둑에 있었다.”

이날 저녁, 이틀 동안 막막하게 기다리던 해병대가 도착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팡파르를 울리며20100422_01100106000001_03M.jpg 환영식을 치렀다. 도시는 온 종일, 허탈에 빠진 듯했다. 지체되는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새벽 4시부터 원군의 도착을  기다렸던 종군기자들은 전혀 낙관할 수 없는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었다.
오후 5시쯤, 한 선원이 우리에게 해병대 수송선단이 나타났다고 알렸다. 나는 즉시 초계정을 타고 멀리에 나타난 대형 선단 앞으로 다가갔다. 부산만을 덮은 녹음과 겹쳐지는 붉은 바위산들을 배경으로 거대한 함정이 차츰 윤곽을 드러냈다. 갑판 선원들을 따라, 우리는 마침내 꽤나 힘든 임무를 맡은 병사들을 만났다. 이들은 아주 어렸다. 이들 대부분은 아직 전투를 겪지도 못했지만, 그 주위에 있는 하사관과 장교들은 백전노장이었다. 의욕적이고 공격적인 병사로 구성된, 전투에 투입될 엘리트 군대였다.

오후 5시쯤, 한 선원이 우리에게 해병대 수송선단이 나타났다고 알렸다. 나는 즉시 초계정을 타고 멀리에 나타난 대형 선단 앞으로 다가갔다. 부산만을 덮은 녹음과 겹쳐지는 붉은 바위산들을 배경으로 거대한 함정이 차츰 윤곽을 드러냈다. 갑판 선원들을 따라, 우리는 마침내 꽤나 힘든 임무를 맡은 병사들을 만났다. 이들은 아주 어렸다. 이들 대부분은 아직 전투를 겪지도 못했지만, 그 주위에 있는 하사관과 장교들은 백전노장이었다. 의욕적이고 공격적인 병사로 구성된, 전투에 투입될 엘리트 군대였다.

해병 부관 C M C 존스는 프랑스 사람인 줄 알아보고 내게 다가왔다. 그는 23세이다. 그는 후보사관 시절에 칸(프랑스 남부 휴양도시)에 있었다면서 거기에서 ‘프랑스 대혁명기념일’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부대원들을 소개하려고 선실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대원들은 침낭들을 끝없이 펼쳐놓고서 뒹굴며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너무 앳된 얼굴들. 가슴에 문신을 새기기 시작했고 등은 볕에 누렇게 그을었지만, 젖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풋내기들이다. (…)

이튿날, 자율적 단위부대로서 매우 유능한 해병여단이 육중한 전차들을 평평한 열차 위에 실었다. 나는 그 중 한 대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

반시간쯤 뒤 우리가 탄 열차가 아름다운 한국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면서, 병사들은 늘 그래왔듯이 ‘여자도 없어 끔찍하다’는 농담을 늘어놓았다. 높이 솟은 잿빛 바위로 갈라진 가파른 산, 낙동강의 맑고 조용한 물길 사이로 부드럽고 푸른 논들이 잠겨 있었다. (…)

우리는 쨍쨍한 햇볕만을 받으며 벌겋게 달아올랐다. 때로 유황 냄새를 풍기는 연기를 들이마시며 숨 막히는 터널들을 빠져나갔다. 그러다보면 또다시 영원한 거울처럼 덧없는 장면들이 마술처럼 나타난다. 풀밭 한가운데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히 쭈그려 앉은 한국 청년 넷이 우리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들에게 전쟁은 무엇인가.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미소를 지으며, 이 세상의 번잡을 벗어나라고 제자들을 부르는 부처의 손짓이나 꿈꾸고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다정한 삶을 위협하면서 전투가 다가온다. 또 우리를 싣고 달리는 이 열차는 후송되는 부상자들로 만원이다. 더러운 붕대, 누렇게 탄 얼굴들. 모두들 피곤에 지쳐 완전히 딴소리를 한다.

흙과 피가 흥건히 범벅이 된 천으로 팔을 둘둘 감은 청년이 “거기 가시려고?”라고 묻는다. “당신도 곧 우리 꼴로 되돌아올 겁니다.” 해병대원이 방금 본 것은 전쟁보다 맞서기가 더욱 끔찍하고 힘든 것이었다. 이런 만남은 긴 침묵으로 이어진다. (…)



“해병대원이 어디에나 풍부해 지휘부를 흐뭇하게 하는 안도감에도 불구하고, 비상이 걸리지 않는 날은 없었다. 8월10일 북쪽에서 포항이 떨어졌다. 앙리 드 튀렌은 그 비행장에서 포위된 부대들과 함께 있었다.”

사흘째, 미군은 포항에서 조용히 묶였다. 그 사흘 동안 북한군이 산맥을 100㎞에 걸쳐 기습해 들어오면서, 한국의 동해안에서 가장 큰 포항의 항구가 오늘 화염에 휩싸였다.

북한군 연대가 동해안을 나란히 따르는 내륙로로 남진한다는 소식에도 미군 사령부는 경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사령부는 이 지역 산악이 해발 1000m를 넘나들기 때문에 넘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한편 남한군은 포대와 미 해병의 지원을 받으며, 해안도로에서 영덕을 수호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이 도로만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북한군은 강행군 끝에 미군 병력이 보강되기도 전에 포항과 내륙을 잇는 유일한 도로(포항~대구)와 철도를 장악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영덕과 그 배후까지 차단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흑인으로만 구성된 미 지원군 1개 대대는 오늘 아침 길이 끊겼음을 알게 되었다. 오전 10시에 대대는 안강리 근처에서 매복에 걸렸다. 포항 서쪽 도로상에서 정확히 15㎞ 지점이다. 이 부대는 둘로 잘리고 대대의 소규모 병력만 길을 뚫고 포항으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탱크들은 포항시 외곽 20여㎞ 지점에서 발이 묶였다.

북한군 연대는 남진하면서 산중에 숨어 있던 빨치산 2000여명을 흡수해 규모가 커졌다. 빨치산은 공산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게릴라 부대는 훈련이 잘 된 편은 아니지만 극히 호전적이었다. 그들은 빨치산 노래를 불렀다. 포로가 들려준 그 후렴은 다음과 같다.

‘우리 죽음을 슬퍼하지 마라 / 우리 위대한 수령님께 바쳤으니 / 붉은 깃발로 내 시신을 덮어다오 / 그 위에 우리가 손에 총을 쥔 채 쓰러졌다 써다오.’

오늘 아침 우리가 비행장 기술자들을 후송하려고 날아온 수송기 편으로 포항에 도착했을 때 시내의 4분의 1이 불타고 있었다. 피란민들은 구할 수 있는 거룻배들을 죄다 모아서 바다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늘에서 보는 이 민중의 승선은 비극적이지 않았다. 경조(競漕)라도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그 주변에서 시커멓게 치솟는 잿빛 구름들은 금세 현실을 깨우치게 한다. (…)



“북쪽 전선 못지않게, 낙동강 좌안으로 바짝 휘어들어온 지역도 줄곧 위급한 사태를 알려왔다. 그래서 영어로 ‘브리지 헤드’라고, ‘교두보’라는 말이 빈번하게 8월달 공보에 등장한다. 필리프 도디도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6·25전쟁에서 데이비드 던컨, 칼 마이던스를 비롯한 여러 외신 사진기자들은 경력을 쌓았다. 피폭된 지프 위에서 특이한 취향으로 망중한을 즐기는 마이크 루지에, 존 딜 같은 종군사진가도 있었다.



북한군은 낙동강 좌안에 여전히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다. 공보에서는 큰 변화가 없다고 하지만, 오늘 그들의 위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분명 북한군 12, 15연대의 손실은 막대했다. 하지만 전차들이 계속 그곳을 지키고 있다. (…)

대구에서, 나는 왜관 가는 길에 올랐다. 전선으로의 첫걸음이다. 나는 500m마다 자랑스럽게 나무에 못으로 박아 내걸린 흰 삼각천들을 보았다. ‘고난로(苦難路)’. 이런 글귀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길은 ‘제1 기병사단’이 잡고 있었고, 또 게릴라는 상당 거리 떨어진 이웃 고지들에 조심스레 숨어 있었다. (…)

우리는 왜관을 지나 황량한 낙동강변을 달렸다. 평화롭던 이 강변의 유일한 삶의 자취라고는 거기에 매달려 살던 황토 초가 몇 채뿐이었다. 나는 ‘초토화전술’이 공연한 말이 아니었음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

나는 한 한국군 본부에 내렸다. 분위기가 활달했다. 오늘 아침, 북한군 교두보 공략에서, 150여명의 ‘빨갱이’를 사살하거나 생포했다고 한다. 27세의 김춘곤 중령은 전투를 수행한 대대가 적을 놀라게 했다고 자랑했다.

이 대대에는 대전 전투 때 보급선이 끊어진 채 사흘간 포위되었던 중대가 있다. 이 중대는 대원 절반을 잃는 악전고투 끝에 아군에 다시 합류했다. (…)

나는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크고 검은 자전거를 탄 남한 병사들의 행렬과 마주쳤다. 일본인들이 한국의 험한 길에 맞춰 제작한 이 투박한 자전거를 병사들은 당나귀처럼 허리를 굽히고 타고 있었다.

“대구, 최전선의 도시, 8월15일, 남한 광복절 행사가 있었다. 그날 도디는 이렇게 말했다.”

부산항에 도착한 미 해군.

주한 미대사 존 J 무초는 이 겹경사(해방과 정부 수립) 날 아침에 만국기와 알록달록한 종이화환으로 꾸민 대구시립극장에서 연설을 했다. (…)

시내에서도, 비참한 골목을 헤매면서 나는 절망을 쫓아다녀야 했다. 아니면, 차라리 내가 절망이라 생각해왔던 것을 찾아 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을 찾지 못했다. 온갖 시련을 겪은 사람들은 심지어 태연하고 명랑하게 누추한 집을 환하게 하고 또 이런 불행에도 인간적 위엄을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붐비는 시장에서 모든 것을 팔고 있다. 건어물, 석유남포, 담배, 일본 화장품, 양념, 코카콜라, 가락지와 과자 등…. 이 잡동사니는 끈으로 묶은 세 쪽짜리 판자로 엮은 그럴싸한 좌판 위에 쌓여 있다. 조금 떨어진 침침한 골목 양쪽으로 거적을 덮은, 정말이지 토끼장 같은 움막들이 늘어섰다. 거기서 남녀노소가 찌는 무더위 속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욕을 하면서 다투고 사랑한다. 격렬한 소나기도 숨막히는 공기를 식히지 못하고, 먼지를 시커먼 진창으로 만들면서 악취를 가중시킨다. 차로 한복판에 뚫린 작은 도랑은 더럽고 차마 볼 수도 없는 오물을 쓸어내린다. 영덕에서 온 한 가족이 친절한 미소로 맞이하면서 이런 불결한 곳에서 놀랍게도 깨끗한 돗자리에 나를 앉혔다. 아버지는 어딘지 알 수도 없는 길가에 묻혔고, 온 가족은 그 일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모두 지쳤다고 했다. (…)



“한국 정부가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철수하던 날, 즉 9월9일 한국군이 보루를 보강하려 애쓰던 대구의 또다른 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앙리 드 튀렌이 전한다.”

해병대가 재탈환한 영산에서 아직 연기가 치솟는 잿더미 사이를 지나던 길에 나는 갑자기 어마어마한 미군 화력의 소름끼치는 결과를 보았다. 탱크 뒤에서 한 벽면에 기대 쭈그린 채, 나는 오늘 1기병사단의 전선 어딘가의 전투현장을 지켜보았다. 미군 대대가 가파른 고지를 기어올랐다. 1시간 동안 대령이 공격 명령을 내리기까지, 북한군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포격이 쏟아졌다.

대령은 “공군과 포병의 지원은 멋지지만 결국 그 땅을 차지해야 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군은 매번 고지 정상에 코만 디밀었을 뿐이다. 집중된 기총소사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이렇게 자동화기를 갖춘 적은 결코 없었다.

사기가 저하된 미군(GI) 앞에서, 대령은 다시 한 번 포병과 항공 지원을 요청했다. 항공기 다섯대가 한동안 우리 위를 선회하다가 갑자기 먹이가 되는 새들을 낚아채듯 하강하더니 곧장 현란하게 씩씩대며 불을 뿜으면서 우리 앞에 ‘로켓’포탄을 떨어뜨렸다. 우리 탱크에서 불과 200m 앞이었다. 포병은 그야말로 고지의 중턱을 갈아엎었다. 미군 중위가 내게 이렇게 외쳤다.

“이 지옥에서 아무것도 살아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겠지? 그런데 북한군은 짐승처럼 땅 속에 숨었어. 그들은 참호 속에서 머리 위에 바위를 뒤집어쓰고 있거든.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견딜 수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는 노릇이야.”

중사가 말했다.

“광신자들이지 뭐. 저 놈들이 허리춤에 총을 차고 싸울 수밖에 없다고 하는 친구들 말은 기가 막혀. 오늘 아침, 저항하는 참호 공격을 하다가 우리 중위가 기관총 사수에게 수류탄을 까 넣었거든. 북한군이 그것을 후딱 다시 집어서 던지더라고. 그게 우리 딱한 중위 앞에서 터져, 갈갈이 찢겨버렸지. 우리가 여기서 우세해도 놈들은 무기를 산 속에 숨기고 사라져버릴걸. 놈들이야 그것들을 숨긴 동굴을 다 알고, 밤에는 우리보다 더 많은 수로 다시 돌아오거든. 놈들에게 도로 따위는 우스울 뿐이지.”

가령 이런 맹공에 미군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면 남한군이 포위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고물 트럭으로 길을 가는 남한 군대는 포병조차 없고, 또 미군 야포와 탱크는 다른 데에서 할 일이 너무나 많다.

2~3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서도, 째진 눈으로 태연자약 웃는, 작은 한국군들은 골짜기로 싸우러 내려간다. 그들이 겨우 밥술을 뜰까 할 때 북한군이 그들을 덮친다. 그 본부를 공격해 아비규환으로 만든다. 전쟁에 대비할 아무런 것도 없는 이 가엾은 청년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들이 중국에서 다섯해 넘게 전투를 치른 노련한 군대에 맞서 어떻게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인천상륙작전을 닷새 앞둔 시점이었다. 이 전선에서 혼란은 계속되었다. (…) 한편 이 모든 상황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정작 한국 자체는 물론 한국인조차 꽤 잊고 있었다. 최소한 북한 사람이 주목할 줄 알았던 남한 사람 말이다. 남한군이 서울에서 패배한 것은 비굴해서가 아니라, 몰려든 T34 전차에 혼비백산했기 때문이다. 패배한 한국군은 감탄할 만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마침내 필리프 도디는 8월12일 그들을 처음 만났다.”

이날 오전 9시, 나는 한국군을 공식적으로 접했다. 공식 발표로는 이제나 저제나 찬사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싸울 무기를 기다리는 이 딱한 동포를. 그런데 바로 이 군대가 지프나 야포도, 무전기나 텔레타이프도, 비상식량이나 모기장도 없이 영덕에서 미군을 감탄하게 했다. 오늘도 한국군이 다시금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강의 맞은편에 묶어두는 임무를 맡고 있다. 또 매일 밤 전차를 앞세우고 강을 건너오는 적을 맨몸과 소총으로 맞선다.

덩치가 작고, 눈이 날카롭게 찢어지고, 잘 웃는 한국 보병에게서 그림 같은 이국 취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읽고 쓸 줄 알고 대체로 토착적·상식적이며 또 위악스럽다. 이들은 물이나 거친 막걸리를 마시고 포도주를 마시지는 않는다. 이들은 빵처럼 생긴 밥(주먹밥)을 먹는다. (…)

이런 용사들이 낙동강 전선을 수호할 수 있겠지만, 종종 중화기가 부족하고 탱크는 아예 없으며 통신과 운송수단은 초보적이다. 그러니 이들은 곁에 있는 미군의 풍족함을 보면서 낙심하기도 한다. 선박에 필수무기는 실어보내지 않고, 대신 무용한 장비를 쌓아두고 있으니까. 결국 한국군과 미군 전투대원의 관계는 불충분하다. 미군은 반박할 여지없는 승리를 보고서야 한국군의 군사적 자질을 믿을 뿐이다.

왜관은 이틀째 불타고 있다. 양봉희 대위와 함께 우리는 낙동강 계곡을 굽어보는 고지에 올랐다. 시뻘건 화염이 시내에서 치솟는 가운데 숲의 막사 한가운데 서 있는 벽돌성당 한 채와 새로 지은 장로교회는 금세 성냥통처럼 화염에 휩싸였다. (…)

“이 연승가도에서, 수수께끼 같은 김일성은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하면서, 수도를 서울로 은밀히 이전했다. 북한 헌법 조문에 조선인민공화국 수도가 서울이었다고 명시하고 있고, 평양은 정부의 임시 소재지라고. 아마 이 공산군 장군은 자기 승리를 거지반 확신하지 않았을까. 앙리 드 튀렌은 이런 증언들을 전한다.”

대구에서 한국군 헌병들이 부역자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처형 준비를 하고 있다. 미 군사고문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7월27일 서울을 빠져나온 문인이자 교수인 김인향(30)의 증언은 그 온건하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미루어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극도로 능숙한” 선전으로 서울 주민의 3분의 1을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즉 그 선전에 따르면 미국은 남한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유엔은 이 사건에서 체면을 잃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남한에 적절한 무기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예로 들고, 김 교수는 이런 논지가 사람들에게 통했다고 전했다. 특히 미국인이 패배하고 또 남한의 80%를 상실했다고 하면서.

피란민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심각한 식량난으로 쌀값이 3000원에서 8000원으로 급등했고, 다른 물가도 전쟁이 시작되고 3배 올랐다고 한다. 마치 점령기 프랑스처럼, 주민들은 시골로 매일 곡물을 찾아 먼 길을 다녀오곤 했다. 상점 80%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북한은 국영화한 큰 가게들의 문을 열도록 했다. 북에서 가져온 물건이라고는 시내 주요 극장에서 상영하는 선전영화들뿐이다. 무료로 연속 상영하므로 많은 군중이 정기적으로 북한과 소련의 사회제도와 산업 발전을 보여주는 영상물을 관람했다. 특히 풀려난 정치범들의 보복에 따라 처음으로 군·경 몇 명을 처형하고 나서 인민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사람들이 평가하기는, 3000명이 서울 점령 처음 며칠 만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

미군기들이 뿌린 전단을 줍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라디오 청취는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감시가 매우 엄했지만, 개인들은 라디오를 걱정 없이 들었다. 미국이 남한을 “포기했다”고 공언하고 나서, 북한 신문과 라디오는 미국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7월4일부터는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다”고 비난했다. 피란민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6·25전쟁이 3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며, 또 이 점에서 북한이 최종적 승리를 거두고 나서, 통일된 한국은 그 보상으로 만주의 두 지방을 받게 된다는 주장을 믿는 듯한다고 했다.

“남한의 수도에서 벌어졌던 충격파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피란민뿐이었다. 극적인 일화가 라디오 방송을 탔다. 앙리 드 튀렌이 전한다.”

한강을 건너는 피란민들. 이 사진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슬렝 드라이트 제공


미 8군사령관은 북한군의 발표를 우리에게 전해줄 수 없어 유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별것도 없습니다. 허풍뿐이지요. 그래도 매일 저녁 890킬로사이클에 맞춰 8시20분에 ‘서울의 장미’ 방송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라디오 수신기가 없었다. 사흘 뒤에야, 전선에서 지프에 붙은 라디오로 처음 ‘서울의 장미’를 들었다. 미국보다는 영국인 억양에 가깝지만 둔탁한 동양식 발음으로 한 여성이 “여기는 민주주의 조선의 육성입니다”라고 알렸다. 그녀는 이어 서울과 대전 지역의 농지개혁 시행 소식을 알리면서 토지 분할에 따른 시골의 축제를 설명했다.

남한(신탁통치) 군정기에 2년간 근무했던 한 미군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 공산당이 여기에서 저질러 놓은 일을 되돌리기 쉽지 않을 겁니다. 몇 해 동안 우리는 이승만이 이런 개혁을 하도록 노력했지만, 할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주민의 3%가 이 나라 땅 60%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농민은 적어도 자신들이 수확한 것의 80%를 지주한테 바쳐야 합니다. 환상적인 드라마지요. 가난뱅이들은 너무 비참해 너무나 헐값에 고용되지요.

‘서울의 장미’는 미군들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그 목숨을 무모하게 ‘월스트리트’의 제국주의자들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명예롭게 묻힌 이름이라고. 그늘 속에서 한 GI가 비아냥거렸다.

“말 되네….”

- 아무개 19보병연대의 이등병이 대전에서 전사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모양입니다. 어머니가 부친 편지, 미화 3달러, 한화 80원, 그리고 그의 누이와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이 나왔습니다.

조금 전 어둠 속 목소리의 주인공이 갑자기 괴로워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래 맞아, 그 친구 알지.”

아무도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 아무개 소령은 조치원에서 사망했습니다. 부인 앤의 편지와 추잉검 한 통과 12달러가 나왔습니다.

한 대위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말했다.

“아무튼 놈들이 우리 주머니께나 뒤지는구먼.”

그러다 갑자기, 비상 사이렌의 썰렁한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우리는 일순간 서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의심할 만한 것은 없었다. 라디오 확성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북쪽 저 건너에서 미군 폭격기들이 수도로 접근하고, 비상경고가 라디오서울 방송국 복도에서 길게 울렸다. ‘서울의 장미’는 낭송을 중단했고 밤의 정적 속에서 사이렌이 멀리서 노호(怒號)하는 수십초 동안 헐떡이는 숨결만 들렸다.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고 나서, 아나운서는 방송을 재개했다. 그 목소리는 우선 비정상적으로 고조되었다. 이 모든 것은, 감히 누구도 농담을 하지 못할 만큼 깊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튿날 미 공군의 발표가 나왔다. 라디오서울 방송국을 전폭기들이 폭파했다고. 그런데 그날 저녁 다시 ‘서울의 장미’는 새로운 미군 사망자들을 열거했다.

- 아무개 대위는, 샐리라는 이름의 약혼녀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0달러짜리로 30달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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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바닷가에서 서성이는 미국 수병과 해병대 사진 1871년 6월, 미군이 촬영한 사진으로 미국 해병대원과 수병들이 강화도 바닷가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원판은 현재 미국 해...
    Date2010.06.02 By슈퍼맨 Views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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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No Image

    미해병대의 차기상륙돌격장갑차 EFV

    Date2010.06.01 By운영자 Views4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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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No Image

    미해병대 2사단 상륙작전 동영상

    Date2010.06.01 By운영자 Views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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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순찰하는 미국 해병8연대 장병들

    18일 아프가니스탄 헬만드 주(州) 미언 포시테이 지역의 침수된 들판을 헤치고 순찰하는 미국 해병8연대 장병들
    Date2010.05.28 By운영자 Views6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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