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군복 입으면 두려울 것 없었다… 전쟁 다신 일어나선 안돼”

by 운영자 posted Sep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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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영웅을 찾아] 을지무공훈장 신현우 중사 

국방일보 기획연재 스페셜리포트 글=정호영/사진=양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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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옹이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마당에서 인천 시내를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사진=양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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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있는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마당에서 신현우 옹과 무공수훈자회 인천지부장이 상륙작전 조형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양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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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옹이 을지무공훈장을 받은 장단 사천지구전투 내용을 기록한 원고를 펼쳐 보이고 있다. 사진=양동욱 기자 



2020년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와 공동으로 매달 6·25 전쟁영웅을 찾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서 싸운 이들의 애국심과 투혼을 기리고자 한다. 9월호의 주인공은 해병대의 주요 신화를 만들며 최일선에서 공산군과 싸웠던 불굴의 투사인 신현우 중사(당시 계급)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결속력과 유대감이 뛰어난 조직 중 하나가 해병대전우회다. 해병대전우회가 이처럼 강력한 조직력을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수문화로 상징되는 해병대 출신들의 선·후배 간 결속력 때문이다. 소수의 군대이다 보니 전국 어디에서도 기수만으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막강한 전투력의 근원이 됐다. 이런 해병대의 기수문화는 6·25전쟁 당시 처음으로 만들어져 해병대 신화를 일군 일등공신이 됐다. 

국방저널 9월호의 주인공은 해병대의 살아있는 전설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을지무공훈장 수상자인 해병2기 출신의 신현우 옹이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가 전국 16개 지부와 232개 지회를 통해 확인한 6·25전쟁 당시 을지무공훈장을 수상한 해병대 사병 출신 생존 노병은 신현우 옹이 유일하다. 인천광역시 무공수훈자회(지부장 정응환)가 적극 추천했다. 

기자는 30년 넘게 취재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군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중 해병대 장병이나 해병대 출신 노병도 적지 않게 인터뷰했는데, 이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병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었다. 인천광역시 남구 광복회관 1층에 위치한 무공수훈자회 사무실에서 만난 신현우 옹도 그랬다. 구십이 넘은 나이(1929년생)임에도 그는 단단하면서도 빈틈이 없어 보이는 전형적인 해병대 전사였다. 신현우 옹은 기자와 만나자마자 봇물 터진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해병대의 역사 그 자체였다. 

“해병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군대입니다. 창설 당시 해군에서 장교와 하사관을 증원받고 해군14기 중에서 440명을 해병 2기생으로 특별 모집해 기틀을 갖추었는데, 6·25전쟁이 터지면서 작지만 강한 해병대의 전투력이 유감없이 발휘됐습니다.” 

신현우 옹은 실향민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늘날 북한 땅인 개성 개풍군 림암면 하조강리다. 김포의 애기봉에서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그곳에서 2살 때 인천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와 친척들이 그곳에 살아 방학 때마다 놀러 가곤 했다. 학창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곳을 그는 수시로 애기봉에서 바라보며 그리워하고 있다. 

신현우 옹은 전쟁이 터지기 1년 전쯤인 1949년 7월 20일 해군에 입대(14기)했다.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총 380(해병 1기 300명)명의 병력으로 창설했다. 해병2기 440명은 8월에 해군14기 중에서 선발돼 합류했다. 

신현우 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뒤늦게 해병대로 보직을 옮겼다. 먼저 해병대로 옮긴 동기들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신현우 옹은 1950년 10월 원산상륙작전을 벌일 당시 해군에서 차출됐다. 

해병대의 일원이 된 신현우 옹은 1951년 6월에 도솔산지구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훗날 해병대 5대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된 전투였다. 신현우 옹은 해마다 도솔산에 찾아가 그날의 전투를 떠올리곤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올 6월에도 찾아갔다. 

“도솔산지구 전투는 해병대의 자부심을 갖게 한 전투였습니다. 도솔산 최종 목표 고지 점령은 3대대 10중대 1소대가 했는데, 제가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도솔산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펀치볼 일대에 위치한 1148m 높이의 험준한 고산이다. 펀치볼(Punch Bowl)은 6·25전쟁 당시 이곳에 주둔한 미군의 종군기자가 지형의 모습을 펀치를 담는 그릇(볼)을 뜻하는 펀치볼이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 이 지구는 일찍이 UN군이나 국군이 한 번도 진격하지 못한 곳이었고, 적 또한 난공불락을 장담하던 천연 요새였다. 

도솔산의 공격은 최초 미국 해병대 1사단의 5연대가 담당했으나 실패해 국군 1해병연대에 넘겨졌다. 도솔산에는 모두 24개의 목표 고지가 있는데, 북한군의 최정예 12사단과 32사단이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했다. 

1951년 6월 4일부터 시작된 1해병연대의 공세는 20일 최종 목표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시종 접전을 벌였다. 특히 도솔산 정상의 22고지는 24개 목표 중에서 가장 험악한 고지였지만 18일 3대대가 야간공격을 감행해 끝내 점령했다. 신현우 옹이 말한 최종 목표 고지 점령은 이것을 말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마지막 목표는 24고지로 1대대가 19일에 최종 점령했다. 이후 신현우 옹은 펀치볼 일대의 대우산과 김일성 고지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해병의 신화를 이어나갔다. 

기자는 신현우 옹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안겨준 전투는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신현우 옹은 잠시 말문을 닫은 뒤 어렵게 대답했다. 장단 사천지구전투였다고. 6·25전쟁에 참전한 해병대 노병 모두가 가장 끔찍했다고 치를 떨었던 바로 그 전투였다. 지난 국방저널 4월호의 주인공이었던 지형열 옹도 그곳은 살아선 나갈 수 없는 지옥이었다고 고개를 저은 바 있다. 

장단 사천지구는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한 6·25전쟁 당시의 격전지다. 경기도 파주의 도라산 전망대(구 OP)에서 보면 군사분계선 동서를 가로지르는 강이 있는데, 그곳이 사천강이다. 그리고 그 옆이 장단역이 있던 곳인데, 이 일대가 바로 장단 사천지구다. 

이곳에서 1952년 3월 17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때까지 1년 4개월 10일간에 걸쳐 5000명 규모의 한국 해병대 1전투단이 중공군 4개 사단 4만여 명을 맞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오늘날 서부전선 휴전선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한국 해병대는 6·25전쟁 당시 이곳 장단 사천지구에서 776명이 전사하고 약 3000명의 병력이 부상했다. 살아서 와서 나갈 때는 죽어서 간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장교든 사병이든 1년 이상을 버틴 장병이 거의 없었다. 그런 지옥 한복판에서 신현우 옹은 살아서 을지무공훈장까지 받았다. 신현우 옹의 전투경험담은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흡입력이 있었다. 

1952년 9월 6일 저녁이었다. 달빛이 환하게 전선을 감싸던 만월이었다. 아군의 67고지에서 전방의 적정을 살피던 정찰병이 다급하게 “적이다”를 외쳤다. 그 순간 ‘꽈광’하는 폭음과 함께 수천 발의 포탄이 하늘에서 우수수 쏟아졌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던 소대원들은 일제히 은폐·엄폐호로 몸을 숨겼고, 새까맣게 몰려오는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이날 만월공세에 5개 중대 병력과 7000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10배가 넘는 병력과 화력에 67고지 소대원들의 방어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소대 선임이었던 신현우 옹과 7명의 해병대원은 진지 대피소(토끼굴)에 있다가 적의 포탄에 천장이 무너져 내려 땅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소대장을 비롯한 다른 동료들은 모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흙먼지에 뒤덮여 숨이 막히는 상황이었지만 신현우 옹은 안간힘을 다해 흙 천장을 뚫고 빠져나왔다. 

그러나 쑥대밭이 된 67고지 기지는 이미 중공군이 점령했고, 신 옹은 생존한 일부 동료들과 함께 몸을 숨기며 기회를 엿봤다. 이때 아군포대에서 67고지로 포탄이 쏟아졌다. 67고지의 아군이 전멸했다고 판단하고 중공군을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중공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지리멸렬했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신 옹과 동료 해병들은 일제히 공격해 적을 물리쳤다. 신 옹은 또 굴속에 갇힌 다른 해병들도 구출하고 고장난 무전기를 고쳐 가까스로 아군과 교신함으로써 고지를 재탈환할 수 있었다. 

“해병 군복을 입고 있던 그 시절엔 어떠한 적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6·25전쟁과 같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자유 대한민국을 굳건히 잘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현우 옹은 전쟁이 끝난 뒤 1956년 중사계급으로 만기 제대했다. 그리고 인천으로 되돌아가 현재까지 고향 땅을 지키고 있다. 비록 태어났던 개성 개풍군 림암면 하조강리에는 생전에 다신 갈 수 없겠지만 오늘날 푸른 하늘 아래에서 번영된 대한민국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그는 지역 해병대전우회와 무공수훈자회의 최고 어른이자 회원으로 각종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늘 바쁘게 생활한다. 9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청춘처럼 주저함이 없다. 그는 한순간도 70년 전 전쟁의 풍화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앞장섰던 해병대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에게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는 노병의 뒷모습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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