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메뉴보기 검색열기
2010.12.09 21:12

백령도

조회 수 3066 추천 수 0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중국 어선들 어장 싹쓸이 그래도 덕분에 북한이 포 안 쏘겠지 싶기도 하고…”

“자식들 나오라고 성화 여기처럼 살기 좋은 데 없어…
저놈들 내려오면 총 들고 나설 것”
 
2134_18.jpg
▲ 육지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김장을 하는 백령도 주민들. 왼쪽이 이영자, 오른쪽이 최춘매씨.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포격 공격이 일어난 지 6일이 지난 11월 29일, 백령도에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당초는 출발 전날 배가 뜰 예정이었으나 출발 직전에 통신장비가 고장났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인천연안부두를 출발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배에 탄 사람들은 더욱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아휴, 백령도에 있는 아들딸 잘 있나 보러가.” 서울 은평구에 사는 박재욱(82)씨는 부인과 함께 섬에 사는 두 자녀를 보러간다고 했다. “우리 손주 일년 새 얼마나 컸을까”라고 말하는 박씨 부부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달라보였다. 배 안에는 휴가를 나왔다 복귀하는 해병대원도 눈에 띄었다. 아들이 들어가는 길을 바래다주러 온 아버지는 “어떻게 외박이라도 안되겠나”라며 연방 아들의 손을 부여잡았다. 평소보다 두 시간 가까이 긴 안전항로로 운행한 탓일까. 백령도에 가는 데는 다섯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오후 2시30분 인천행 여객선항인 백령도의 용기포항 부두는 남부여대(南負女戴)의 인파로 가득찼다. 말로만 듣던 백령도 엑소더스. 그날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은 인천에서 온 손님들이 내리기 무섭게 앞다퉈 배에 올라탔다. “저리 좀 비켜 빨리 타게.” 한 취재진의 카메라가 여객선 입구를 막아선 탓일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곳곳에서 짐을 바리바리 손에 든 가족들도 눈에 띄었다. 아내와 두 자식을 인천으로 보내러 부둣가에 나온 이상훈(45)씨는 식솔들이 여객선에 올라타기 직전까지 잡고 있던 아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같이 떠나고 싶지만 공무에 엮인 몸이라 어쩔 수 없지”라며 떠나는 여객선을 바라보던 이씨는 여객선이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렇게 아버지는 다시 당신의 일을 하러 섬 북쪽으로 향했다.
   
   불과 8개월 전 있었던 천안함 폭침 사건 때만 해도 섬주민들이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백령도 용기포항에 모였던 사람들은 무언가에 쫓기듯 일제히 흩어졌고 10여분도 안돼 부둣가엔 적막이 찾아왔다.
   
   
   천안함 때는 보았고, 지금은 느낀다
   
▲ 안개가 짙게 내리깔린 12월 1일 백령도 용기포항 부두.
천안함 폭침 당시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아이고, 떠나기는 무슨, 아무일도 없어!”라고 화를 냈던 섬주민들이었다. 천안함 폭침이 눈앞에서 벌어졌던 장촌 포구 앞 사람들도 오랜만에 만난 기자를 보고 반가워하기는커녕 냉랭한 시선만 보냈다. “보다시피 조용하잖아.” 실제로 그랬다. 마을은 유난히도 조용했다. 천안함 폭침 때 눈앞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열심히 기자들에게 말해주던 주민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솔직히 당신이 여기 산다고 해봐, 심정이 어떻겠어. 꼭 말로 해야 아나?” 장촌리에 사는 한 젊은 부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같은 섬주민, 당하지만 않았지 같은 심정이다. 그때(천안함)는 바라보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느끼는 입장”이라며 묵묵히 먹던 밥을 계속 먹었다. 마을 노인회장인 장두표(77)씨만이 ‘눈치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때보다 훨씬 불안하지. 심지어 토박이 주민들 중에도 나간 사람이 있어. 나가자니 살길이 막막하고 가만있자니 불안해 못살겠다고.”
   
   “솔직히 우리는 여기 사는 것만 해도 애국이야.” 김장에 쓸 무를 가지고 집에 들어오던 한 할머니가 90도로 굽은 허리를 오른손으로 두드리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북한땅 장산곶이 저만치 손에 잡힐 듯 바라다보이는 두무진. 백령도의 최북단이다. 대낮이었지만 동네엔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간신히 만난 할머니는 말 한마디만 던지고 집안으로 휑하니 들어갔다. 관광객도, 주민들도 없었다. 두무진 출항소에는 출항금지를 뜻하는 빨간 깃발만이 거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의 유일한 슈퍼마켓만이 가끔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4분의 1쯤 열어두고 있었다.
   
   부인과 함께 무를 다듬던 가게 주인 정세운(63)씨는 “만원짜리 구경한 지 오래됐다”며 입을 열었다. 슈퍼마켓과 함께 두무진항에서 출항하는 유람선을 운행하는 정씨의 울분 섞인 넋두리는 계속됐다. “천안함 사건 이후로 3분의 1 토막 났던 손님들이 그나마 완전 뚝 끊겼제.” 이번 주말에 예약돼 있던 손님 60명도 포격이 있었던 11월 23일에 바로 예약을 취소했다고 한다. 관광객으로 먹고살던 두무진 마을은 제대로 된서리를 맞았다. 빼곡히 들어선 횟집들 앞에는 활어들만 어항 속의 금붕어인 양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정씨가 전하는 두무진의 경제는 암담했다. “관광객들이 이제 안 찾아온다고 봐야 하니 활어들은 전부 찜으로 만들거나 포를 떠야제.” 출항이 금지된 우리나라 어선들을 비웃듯 중국어선은 새까맣게 몰려와 조업 중이었다. “저것들이 물고기만 잡으면 그래도 나아. 우리 어구들까지 전부 쓸어가서 문제야”라며 정씨는 안타까워했다. 어구값만 해도 1000만~2000만원. 다시 조업하려면 어구를 새로 사야 하니 이중으로 손해라고 한다.
   
   연평도 포격을 비웃듯 중국어선들 130여척은 매일같이 백령도와 북한 사이의 바다를 가득 메웠다. 중국어선들은 대체로 까만색이어서 멀리서 보면 개미떼처럼 보였다. 30년 동안 백령도 앞바다에서 살아온 해녀 김화순(63)씨가 “천안함 때는 얄밉기만 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쟤네들이 있어 안심인겨”라고 말했다. “그래도 저놈들(북한)이 중국한테는 벌벌 떠는데 우리한테 포 쐈다가 저 중국어선들 포탄에 맞으면 어떡하겠어.” 씁쓸하게 말을 잇던 김씨에게 정씨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저것들(북한)이 하는 짓은 당췌 알 수가 있어야지. 어디 앞뒤 가리는 놈들이야? 그런 말일랑 하지도 마.”
   
   
   “요즘 군이 너무 나약해”
   
▲ 북포초등학교 대피소의 외부 모습. 백령도의 대피소는 대부분 1974년과 1975년에 만들어졌다.
경찰 5명, 해경 2명, 그리고 택시기사 8명. 작은섬 백령도에는 그동안 큰 사고도 없었다. “관광객이 들어와 술 먹고 난동부리는 정도지”라고 말하는 파출소의 한 경찰관은 올해 들어 두 번이나 일어난 큰 사건 외에는 지난 수십 년간 사건이 아예 없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평온했던 백령도에는 수십 년 동안 고향을 지켜온 고집쟁이 토박이들이 많았다. 백령도에서 태어나 50년이 넘게 약국을 운영해온 최순덕(76)씨는 연평도 포격사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약국을 지켰다. 2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신식 약국이 생겼지만 여전히 최씨의 약국은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떠나면 사람들은 진짜 피난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연방 웃음을 잃지 않던 최씨는 사별한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최씨의 남편은 지난해 4월에 세상을 떠났다. 최씨는 “차라리 잘됐어. 살아생전 이런 일을 당했더라면 북한의 무도함에 너무 가슴 아파하셨을 거야”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최씨는 중학생이던 지난 1950년 백령도에서 나와 부모님과 함께 인천에 머물며 서울로 통학했다. 그해 6월 25일 전쟁이 터지고 집에서 머물고 있던 최씨는 당시 대낮에도 총부리를 겨누는 인민군의 폭정에 시달렸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탄에 아버지를 잃은 최씨는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고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백령도로 돌아왔다. 당시 백령도에는 약국이 한 군데 있었지만 무허가였고 이런 현실에 분개한 최씨는 인천의 한 약국에서 2년 동안 일을 배우고 1955년 백령도로 와 군청의 허가를 받은 약국을 열었다. 약사가 아니라 약을 조제하지는 않았지만 최씨의 약국은 섬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의 남편도 자주 약국을 찾던 손님 중 한 명이었다. 황해도 출신이었던 남편은 북한의 폭정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등지고 6·25 직전 백령도로 와있었고 이곳에서 최씨를 만난 후 정착했다. 부부는 1957년 약국을 개업한 이래 50년 넘게 함께 그곳을 지켰다. 한밤중에 아픈 아들을 데리고 와 약을 지어달라던 사람, 약을 지으러 읍내로 나온 해병대원들도 항상 약국을 지킨 최씨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신식 약국이 문을 연 지금, 최씨는 아침·저녁에만 약국 문을 연다. 낮에는 공공근로를 하며 돈벌이에 나서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우리 고향을 지키겠어.” 미국으로 시집간 딸의 안부전화에 담담하게 답하던 최씨는 섬마을 고향친구들과 함께 끝까지 백령도를 지키겠다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김병행(80)씨도 고향을 나와 홀로 서울에서 공부하던 중학교 4학년 때 6·25를 맞았다. 부산까지 피란갔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자원 입대해 낙동강 전선 전투에 투입됐고 4년 동안 군생활을 하다 제대했다. 1955년 고향인 백령도로 돌아온 김씨는 백령도 상이군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직접 전쟁을 겪은 군인이었던 김씨는 “요즘 군이 너무 나약하다”며 “저놈들(북한)이 내려오면 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총 한 자루라도 들고 앞장서서 나설 것”이라고 격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말없이 김치 보내는 어머니들
   
   지난 11월 30일 사흘 만에 백령도에 화물선이 들어오자 백령도 할머니들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섬 곳곳에서는 김장을 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부쩍 늘었다. 우체국 한쪽에는 육지에 사는 아들딸들 앞으로 보내는 30㎏들이 김치통이 빽빽이 쌓여갔다.
   
   이영자(87)씨는 서울과 인천에 사는 4명의 아들딸을 위해 김장을 담갔다. 일단 인천에 사는 큰아들네 30㎏들이 김치 두 통을 보낼 거라며 배추에 쉴 새 없이 양념을 버무렸다. 자식들은 “당장 섬에서 나오세요”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성화다. “나가봐야 자식들한테 짐만 되고 여기서 친구들이랑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최춘매(87)씨가 “그럼, 여기처럼 조용하고 살기 좋은 데가 어딨다고”라며 맞장구치자 김장을 하는 할머니들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김순내(89)씨가 하얀 배추가 빨갛게 김치로 변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입만 먹어보자”며 배춧잎을 하나 똑 떼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구 저 할망구가”라며 핀잔주던 이영자 할머니는 입 주위가 온통 빨개진 김 할머니를 보고는 “주책없긴 애들처럼”이라며 ‘호호’ 웃었다. 자식들은 당장 육지로 나오라고 하지만 할머니들은 예년처럼 묵묵히 김장을 담가 자식들에게 보낼 뿐이었다.
   
   한·미연합훈련이 끝나던 12월 1일 백령도를 출발한 화물선에는 30㎏들이 김치통 1200여개가 실렸다. 한 우체국 직원은 “하루종일 김치통 부치느라 팔 아파 죽겠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2010년은 작황이 안 좋아 흉년이었지만 뭍으로 가는 부모의 자식사랑은 예년과 다름없었다.




TAG •
  • 소닉 2012.09.05 19:19

    이렇게 아름다운 섬인데 그 북한때문에 많이 안타깝습니다 가슴졸이며 기다렸을 시간이 상상도 안갑니다


  1. notice

    해병대 기수별 연도별 입대일자 1000기 이전

    해병대는 현재 매월 1개 기수를 선발하여 양성하고 있다. 해병대는 교육단에서 신병교육을 실시한 1975년부터 2011년까지는 매월 2개 기수가 입대하였으나 해병대 2사단 총기사건 이후 병영문화 개선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월 2개 기수를 통합 1개 기수로 선발하여 양성하기 시작했다. 2012년 첫 입대한 기수는 1157기가 1...
    Date2021.08.24 By관리자 Views348422
    read more
  2. notice

    해병대 기수별 연도별 입대일자 1000기 이후 2009 - 2021년

    해병대 기수별 연도별 입대일자 2009년 - 2022년 해병대는 현재 매월 1개 기수를 선발하여 양성하고 있다. 해병대는 교육단에서 신병교육을 실시한 1975년부터 2011년까지는 매월 2개 기수가 입대하였으나 해병대 2사단 총기사건 이후 병영문화 개선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월 2개 기수를 통합 1개 기수로 선발하여 양성하기...
    Date2021.01.24 By관리자 Views307194
    read more
  3. No Image

    연평도포격 현장수기 - 행정관 상사 한훈석

    ▶ 본부중대 행정관 상사 한훈석'10. 11. 23. 화요일 14시 35분 청명한 초겨울 하늘에 검고 흉악한 포물선이 그려지고 서해5도 중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연평도가 무간지옥과 다를 바 없는 아비규환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 날은 해상 사격훈련이 있는 날이라 대원들에게 거점작전에 대하여 교육을...
    Date2010.12.14 By관리자 Views5458
    Read More
  4. 연평도포격 현장수기 - 군종과장 하승원대위

    ▶ 군종과장(목사) 대위 하승원 하승원 대위(사진 왼쪽) 굉음이 울리고 눈앞에서 포탄이 떨어졌다. 마을에서 연기가 올라왔고, 시선이 닿는 곳곳에 탄흔이 보였다. 급히 올라간 의무실은 이미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아이들(병사들 지칭)이 누워있었다. 복도에는 아이들이 흘린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응급실 안쪽에는 서서히...
    Date2010.12.14 By관리자 Views5207
    Read More
  5. 연평도포격 현장수기 - 의무실 이재선하사

    ▶의무실 예방의학담당 하사 이재선 이재선 하사 23일 아침 어느 때와 다름없이 관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가는 선후임들에게 인사를 하며 시작하였다. 부대에 도착하고 나서도 어느 때와도 하나 다름없이 평화롭다면 평화롭고 계획된 일과가 진행되었다. 그날 오후 우리 부대 사격훈련이 시작...
    Date2010.12.14 By관리자 Views5534
    Read More
  6. 연평도포격 현장수기 - 3포반장 하사 김영복

    김영복 하사 금일에 평가 ATT평가 사격이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전부터 사격준비 및 사격대비 비사격 임무를 실시하였다. 오후 13시 30분부터 평가사격이 되었고, 초탄은 우리 3포가 수정임무 사격을 실시하였다. 마지막 사격을 실시하는 도중에 4포가 불발이 나서 FDC에 불발보고를 하였다. 그때 우리 포반은 사격...
    Date2010.12.14 By관리자 Views6745
    Read More
  7. 연평도포격 현장수기 - 제7포병중대장 대위 김정수

    제7포병중대장 대위 김정수 우리 해병대 연평부대 포 7중대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포병중대'다. 전군 최초로 대한민국이 개발한 세계적인 명품 K-9 자주포가 배치됐다는 것을 알고 서북도서에서의 군 복무로 자부심을 갖도록 내가 붙인 애칭이다. 2010년 11월 23일 여느 때처럼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소연평을 바라봤었다. ...
    Date2010.12.14 By관리자 Views8280
    Read More
  8. 해병대원들의 연평도포격 수기

    해병대 사령부가 지난달 23일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전투에 참가한 장병들의 수기 가운데 일부를 14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수기는 현장에 있던 장병 12명이 직접 적은 것이다. 해병대 측은 다른 장병들이 적은 내용을 보완해 수기를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수기에는 장병들이 직접 보고 체험...
    Date2010.12.14 By관리자 Views7868
    Read More
  9. 전쟁에 반대하는 해병

    해병 539기 김복철(44)씨. 그는 지난 1986년부터 88년까지 서해 바다의 강화도에서 근무했다. 오랜만에 군대 얘기가 나오자 여느 해병대 나온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경험담을 쏟아내더니 신병교육을 마치고 동기들과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내민다. “해병대의 빨간 명찰은 아무나 다는 게 아닙니다. 전...
    Date2010.12.09 By슈퍼맨 Views4553
    Read More
  10. 대한민국 최일선 서해 5도

    ‘서해 5도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북한의 연평 도발 이후 대한민국 최전방에 떠 있는 서해 5도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새삼 되묻고 있다. 백령, 대청, 소청, 연평, 우도 등 대다수 뭍사람들에게는 이름조차 잊혀져 있던 이들 5개 섬은 이번 포격 사태로 우리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대한민국 영토임을 분명...
    Date2010.12.09 By슈퍼맨 Views6412
    Read More
  11. 백령도

    “중국 어선들 어장 싹쓸이 그래도 덕분에 북한이 포 안 쏘겠지 싶기도 하고…” “자식들 나오라고 성화 여기처럼 살기 좋은 데 없어… 저놈들 내려오면 총 들고 나설 것” ▲ 육지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김장을 하는 백령도 주민들. 왼쪽이 이영자, 오른쪽이 최춘매씨.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포격 공격이 일어난 지 6일이 지난 11...
    Date2010.12.09 By슈퍼맨 Views3066
    Read More
  12. 우도

    백령도·연평도 못지않은 전략적 요충지 1961년 남북한 비밀회담 루트 2주일마다 한 번씩 오는 부식 배가 생명선 서해 5도의 마지막 섬 섬 한 바퀴 도는 데 30분이면 끝 365일 민간인 구경 못해 고독과의 사투 근무 장병들 우울증 호소도 ▲ 우도의 일부분. 해병 OP가 보인다. photo 신미식 서해 5도(島). 북한의 연평도 포격...
    Date2010.12.09 By슈퍼맨 Views3940
    Read More
  13. No Image

    대청도

    “평생 고생해 민박집 하나 장만해 놨더니 낚시꾼 발길 끊겨 휴업상태 고기만 잡고 살았는데 육지 나갈 수도 없고…” 40년 전에 지은 방공호 있으나 마나북측은 서해안 기지에 온갖 포 집중배치北 앞마당이나 다름없어 ▲ 대청도의 한 주민이 선진동 해군기지에 정박 중인 해군 고속정들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지난 1...
    Date2010.12.09 By슈퍼맨 Views7994
    Read More
  14. No Image

    해병대 - 함혜리

    “그들은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 6·25 전쟁 당시 한반도의 전쟁터를 종횡무진 누비며 현장감 있는 기사로 전쟁의 참상과 이면을 세상에 알린 뉴욕헤럴드트리뷴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1950년 8월 23일 자에 송고한 기사다. 히긴스는 ‘귀신 잡는 해병대’란 제하의 기사에서 우세한 적군을 기습적인 양동 ...
    Date2010.12.07 By관리자 Views4256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 27 Next
/ 27
CLOSE

SEARCH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