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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호탑에서 바라본 파로호 전경. 파로호는 중공군을 격파한 호수란 뜻으로,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지었다. 사진=국방일보 이헌구 기자

 

 

화천군은 강원도 북서부에 있는 산수가 뛰어난 청정고장이다. 북쪽의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철원군, 동쪽으로는 양구군, 남쪽으로는 춘천과 경계하고 있다. 면적은 908.14㎢, 인구는 26,702(2016)명으로 주민보다 군인이 더 많은 대표적인 군사지역이다. 해방 이후 북한에 속했으나 6·25전쟁 이후 수복됐다.


6·25전쟁 이후 수복한 화천

6·25전쟁 전 화천은 북한 땅이었지만 전쟁 중 아군의 반격으로 몇 차례 우리 땅이 됐다. 1950년 10월 북진 때가 첫 번째고, 두 번째는 1951년 4월 유엔군이 반격을 통해 일시적으로 탈환했을 때다.

당시 아군의 전쟁지휘부인 미8군은 서울 재탈환(1951년 3월 15일) 후 캔사스선까지 진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펼쳤다. 캔사스선은 서부전선의 임진강과 38도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동으로 화천저수지와 태백산맥을 거쳐 동해안 북쪽 40㎞까지 약 186㎞를 동서로 연결하는 선이었다. 유엔군은 1951년 4월 21일 목표지점인 캔사스선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중공군이 대규모로 반격한 것이 바로 4월 공세였다.

1951년 4월 22일, 중공군 3병단, 9병단, 19병단은 문산-화천을 잇는 캔사스선 북방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이때 아군은 서부전선의 임진강 부근에 국군1사단과 영연방 29여단이, 중부전선의 김화와 사창리, 화천에는 미24사단과 국군6사단, 그리고 미 해병1사단(한국해병 1연대 배속)이 배치돼 있다가 순식간에 돌파됐다.


중공군 격파한 호수 의미로 ‘파로호’ 명명

특히 사창리에 있던 국군6사단은 거의 궤멸에 가까울 정도로 붕괴되는 치욕의 패배를 당했다. 양평까지 쫓겨 내려간 국군6사단은 이후 중공군의 5월 공세 시 용문산 일대에서 혈투를 벌여 중공군 63군 3개 사단을 물리쳤다. 이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해 화천저수지 일대에서 거의 2만~3만 명을 전멸하는 엄청난 전과를 거뒀다.

이러한 쾌거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저수지를 직접 방문해 ‘중공군을 격파한 호수’라는 의미로 ‘파로호’라 명한 뒤 휘호를 남겼다. 오늘날 파로호 전적비는 파로호가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져 당시의 전공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전사에 널리 알려진 파로호 전적비로부터 약 1~2㎞ 떨어진 곳에 최근 해병대화천지구전투전적비가 건립됐다. 2015년 11월 30일 작은 비석이 세워진 뒤 제반공사를 거쳐 2016년 5월 4일 정식으로 제막식을 가졌다.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 101-3이 제막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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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을 격파했다는 의미를 지닌 파로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파로호 자유수호탑. 사진=이헌구 기자

 

 

해병대 화천지구 포위돌파작전

비석에는 1951년 4월 10일부터 5월 3일까지 화천지구 전투에 투입된 해병대 1연대의 대략적인 활약 내용과 전사자 명단(18명)이 새겨져 있다. 도대체 1951년 4월에 이곳 화천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졌을까? 이 시기 해병대의 구체적인 전투 내용이 궁금했다. 그동안 전사에서는 국군6사단이 중공군을 파로호까지 추격해 전멸시켰던 5월의 내용은 자세히 다뤘지만 4월 하순의 해병대 전투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해서 이 시기는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의 춘계 공세로 국군6사단이 사창리에서 대패했을 때 인접해 있던 해병대 1연대의 행적과 맞물린다. 그런데 전사에서는 이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숨겼을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제막식이 열리고 20여 일이 지난 2016년 5월 27일 ‘해병대 화천지구 포위돌파작전’이란 제목의 책자가 발간됐다. 해병대 사령부에서 발행한 76쪽 분량의 이 책자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해병대화천지구전투전적비가 세워진 배경과 내용을 알 수 있게 됐다.

이 책자는 6·25전쟁 당시 전투에 급급하다 보니 미처 남기지 못한 해병대의 각종 전투기록을 보완 발굴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됐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더 정확히는 해병대의 특성상 공격작전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후퇴 이미지를 주는 전투내용은 감추거나 외면했기 때문에 뒤늦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숨겨진 것을 드러낸 비사(秘史)라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핵심지휘관이었던 해병대 1연대 1대대장인 공정식 예비역 해병중장(당시 소령)은 “해병대 1연대 1대대의 적진 포위돌파작전은 6·25전쟁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 미 해병대 1사단의 장진호에서의 중공군 포위돌파작전과 비교되거나, 또는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성공적인 돌파작전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중공군에 고립됐던 해병1연대 1대대의 돌파작전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된 1951년 4월 22일. 국군6사단이 화천 서쪽의 사창리에서 중공군에게 무참하게 무너질 때, 인접한 화천 동쪽의 한국해병대 1연대 1대대는 중공군 대병력을 궤멸시키며 콧노래를 불렀다.

당시 상황을 보면 미 1해병사단에 배속된 한국해병대 1연대는 1대대가 선두로 나서 미 해병 5연대보다 앞서 화천읍을 점령했다. 그리고 생포한 중공군 포로를 심문한 결과 22일 저녁에 대규모 공세가 있으리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공정식 대대장은 전진을 멈추고 방어태세를 갖춘 뒤 야간에 중공군이 공격하자 완강히 저지하며 미군의 강력한 포병지원사격으로 적을 격멸했다.

다음 날인 4월 23일 아침, 미 해병1사단 부사단장인 풀러 준장은 헬기를 타고 전투현장을 방문한 뒤 “한국 해병대가 정말 막강하고 대단하다”며 “중공군 전사자가 무려 2700명”이라고 확인해 줬다. 확인된 전사자가 2700명이면 사상자는 대략 5000명이고, 이는 중공군 1개 사단(1만여 명)이 한국해병대 1대대 고지 정면에 모두 투입됐음을 의미했다. 결과는 중공군 1개 사단의 궤멸이었다. 중공군의 피해 상황은 미 해병항공기가 관측해 산정한 BDA(폭격피해판정) 보고에 따라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비적인 대승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해병대 1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돼 험로를 걸어야 했다. 특히 최선두에서 적진 깊숙이 들어갔던 1대대는 완전 고립돼 이후 엄청난 사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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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에 세워진 해병대 화천지구전투전적비 전경. 사진=이헌구 기자

 

 

적진 돌파하면서도 장비·병력 등 전투력 유지

중공군은 1951년 들어 세 차례의 주요 공세(2월, 4월, 5월)를 벌였는데, 이때 몇 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을 보였다. 즉 공격하기 전 정면의 적을 면밀하게 정찰해 화력이 강한 미군보다는 주로 만만한 한국군을 공격했다. 중공군의 2월 공세에서는 횡성 북방에서 국군8사단을 붕괴시켰고, 4월 공세에서는 국군6사단을 골라 궤멸시켰다. 중공군의 전술은 아군의 선두제대를 단숨에 격파한 후 후방으로 신속하게 기동해 주요 지점을 선점한 뒤 아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공군의 공세에 국군6사단은 사단 전체가 무너져 수십㎞ 이상 돌파됐고, 그 여파로 인접해 있던 한국해병 1연대가 속한 미1해병사단과 미24사단 등 9군단 전체가 덩달아 후퇴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앞서 나갔던 한국해병 1연대 1대대의 고립은 필연이었다.

오늘날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에 세워진 해병대화천지구전투전적비는 바로 해병대 1연대 1대대의 6박7일간에 걸친 적진 포위돌파작전을 말한다. 이 작전이 높이 평가받는 것은 수차례 전투를 벌이며 적진을 돌파하면서도 장비와 병력 등 전투력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1대대 1200명 중 비석에 새겨진 20여 명의 전사자가 피해의 전부였다. 그 결과 한 달 후에 벌어진 국군6사단의 화천저수지 전투 시 동쪽에서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중공군 격멸에 일조하기도 했다.

해병대 1대대의 적진 포위돌파작전의 명암은 사실상 첫날 결정됐다. 공정식 1대대장은 도로망을 회피하고 야간에만 능선을 이용해 이동하기로 방침을 세웠고, 탄약과 식량도 철저히 준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대대 장병들은 추격해오는 중공군을 피해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며칠씩 걸으며 극심한 피곤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식량도 일찍 떨어져 배고픔과 산속의 매서운 추위 등 이중삼중의 혹독한 고통을 겪었지만 단 한 명의 낙오 없이 서로를 부축하며 나아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공군의 대병력을 피해 불가피한 소부대(중·소대급)전투 몇 차례와 아군 해병 3대대의 철수지원 작전에 힘입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판 장진호 전투’

이렇게 볼 때 해병대 화천지구 포위돌파작전은 ‘한국판 장진호 전투’로 미1해병사단의 투혼을 능가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병대화천지구전투전적비는 현지 화천주민들은 물론이고 군 관계자 대부분도 건립 배경과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이 오늘날 현실이지만 뒤늦게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강원도 화천으로 전사여행을 떠나보자. 그곳에서 1951년 4월의 처절했던 해병대의 투혼과 국군6사단의 파로호 승전보를 떠올리며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겨보자. <국방일보 정호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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