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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군에 간 아들이 지난 주말 첫 외박을 나왔다. 고작 2박3일에 오고 가는 길이 한나절, 그야말로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버렸다. …

겨우 넉 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또래 누구보다 자유분방했던 아이는 갑자기 훌쩍 커버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정복의 칼날 주름이 행여 무뎌질세라 등을 곧추세워 앉은 채 고된 훈련과 내무생활들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풀어 놓았다. 하반기에 치러낼 만만치 않은 훈련일정을 얘기하면서도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

아들이 짧은 외박을 마치고 귀대하던 날 포항에는 세찬 장맛비가 내렸다. 부대 멀찍이서 차를 내린 아들은 위병소까지 수백m 외길을 꼿꼿한 자세로 고스란히 폭우를 맞으며 걸어 들어갔다. 군에 보내며 기대했던 모습 이상이었다. …'

(2010. 7.16 한국일보 ‘지평선’칼럼 중)

 

  3년 전 해병 1114기로 입대한 아들의 첫 외박 때 소회를 썼던 글의 일부다. 공군에서 병역을 마친 나는 이 때부터 해병대 마니아가 됐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병대 사이트를 훑어본 뒤 다른 뉴스들을 보고, 해병대 군가를 이어폰으로 들어가며 일을 했다. 난생 처음 상륙돌격장갑차 플라스틱 키트를 사서는 퇴근 후 새벽까지 씨름해댔다.(아들은 1사단 상장승무병이었다) 한 2주쯤 걸렸을까? 만나는 이들마다 늘 손에 말라붙어 있는 본드를 보고 “요즘에 기자 말고 다른 부업도 하느냐?”고 놀렸다.

 

 재작년 하와이의 미 태평양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민간재난구조 활동을 하는 백발의 노인을 만났다. 얘기 중에 언뜻언뜻 해병대 경험담이 섞여있는 것 같아 괜히 반가운 마음에 해병대 출신이냐고 물었다. 사람 좋은 미소로 얘기하던 그가 돌연 정색을 했다. “No, I am not an ex-marine. I AM a Marine!(난 전직 해병이 아니다. 나는 해병이다!)” 역시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해병대만의 남다른 자부심은 미 해병대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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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은 지난 해 초 전역했다. 군에서 얻은 좋은 습관은 채 한 달이 못 간다던가? 아니었다. 해병대 이전과 이후의 아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성실해졌고, 스스로와 주변에 대한 책임감이 분명해졌다. 국가관도 건강해졌으며, 무엇보다 어떤 어려운 일이든 겁내지 않고 일단 부딪쳐보는 패기가 생겼다. 세상에, 20여 년 엄마의 잔소리와 학교도 해내지 못한 일을 단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해병대가 해냈다.

 

 지난 여름 국방부에서 군 체험을 제안했을 때 주저 없이 해병대를 택했다. 백령도 도처에 내걸린 ‘우리는 조국의 총 끝, 칼 끝’같은 맹렬한 구호들, 하루에도 몇 번씩 비지땀을 쏟으며 급경사로를 뛰어올라 순식간에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K-9 부대원들, “백령 바다에 적들을 수장(水葬)하자!” 구호와 함께 칠흑 같은 바다에 총탄을 쏟아 붓던 야간사격훈련, 절벽 위 초병들의 매서운 눈빛, 새벽 바다안개 속의 전투수영…. 돌아오는 뱃길, 저 외로운 섬마다 우리의 젊은 해병들이 기꺼이 희생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당시의 감동은 지금껏 크고도 깊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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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KCTC)에서 해병대가 전례 없는 전과를 올려 한창 화제가 되던 무렵이었다. 합참 고위관계자에게 농담처럼 제안했다. “타군 교관들을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 일정기간 위탁 교육받게 하거나, 해병대 교관들을 타군에 보내 해병대처럼 훈련시켜보면 어떨까?”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해병대식으로 훈련시킨다 해서 절대 해병대 같은 전투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해병대는 스스로가 고통을 선택한 병사들이기 때문에 어떤 훈련이나 지시도 다들 감수할 자세가 돼있다. 대부분 병역의무를 위해 입대한 타군 병사들을 똑같이 훈련 시켰다가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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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온화하고 신사다운 태도로 정평 있는 언론계 동료가 있다. 언론계 중진끼리의 모임도 막판이면 군대 얘기로 흐르는 건 다를 게 없다. 다들 저 아니면 벌써 대한민국이 망했을 것처럼 잔뜩 과장하는데 이 친구만 빙그레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당신은 할 얘기 없어? 혹시 군대 안 갔어?” “아니, 갔다 왔지.” “그래? 어디서 근무했는데?” “…응, 해병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후 아무도 더 이상 군생활을 자랑하지 않았다. 강함은 평소 함부로 드러내지 않을 때 가장 멋있다는 걸 그 친구를 통해 새삼 깨달았다.       

이게 해병대다. 국민들이 해병대에 갖는 신뢰는 다른 게 아니다. 직업군인을 안정된 공무원쯤으로 여기고, 군 복무를 좀 길고 빡센 캠프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현실에서 해병대만은 단연코 그렇지 않다는, 또는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이다. 실제로 3년 전 연평도 포격전은 충성, 명예, 도전, 희생 등 군 본연의 가치가 해병대에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해병대는 이미 대한민국의 일급 브랜드다. 해병대원 한 명 한 명마다 지키고 키워갈 책임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도 이 명예로운 브랜드를 훌륭하게 지켜가고 있는 해병대원 모두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이준희 한국일보 논설실장 / 해병대블로그 날아라마린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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