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메뉴보기 검색열기
조회 수 795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해병대 정신으로 독하게 달려온 그의 인생.그 인생을 알고 먹는 그의 요리는 더 맛있다.

rokmc37_024.jpg

“내 요리를 평가할 사람은 국내에는 없어. 내 책도 마찬가지고. 그 누가 감히 김원일을 평가하겠나.”
요리사 김원일(53)은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짐작은 하고 찾아간 인터뷰였지만, 그 자신만만함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젊었을 때 한가락 했다는 그는 딱 ‘부산 사나이’ 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전역하는 날 찍었다는 사진의 호리호리한 모습은 간데없지만 자신만만하고 호탕한 그 눈빛만은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 3대 요리학교인 아베노쯔지 조리사전문학교를 수료하고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그이다. 장사꾼에게 상도가 있다면 손님에겐 객도가 있다며 싫으면 먹지 말라고 소리치는 그이지만, 테이블 세 개로 시작한 식당을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일식집으로 키워낸 것도 그이다. 휴가 나온 해병들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해병 356기로 입대했다는 그는 요리라는 한 길에 인생을 다 바친 부산 사나이였다.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 때 훈련 생각을 하면 아직도 아찔해. 요즘 훈련은 훈련도 아니지. 그래도 빨간명찰 달 때의 희열은 안해 본 사람은 말도 못하지.”
얼핏 봐도 다혈질일 것 같은 그는 아니나 다를까 타군에서의 위탁교육에서 사고를 치고 퇴교를 당한다. 갈 곳을 잃고 포항에서 군 건물을 짓는 일에 잠시 투입됐던 그는 영농반의 오리농장에 배치된다. 목장을 하는 집에서 태어나 군대에서까지 그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이다.
그는 결국 호텔에서 잠시 일을 했던 것이 연이 되어 전역할 때까지 연대 본부에서 조리병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전역 후, 부산 코모도 호텔에 취직하면서 요리는 점점 그의 인생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몰려드는 일본인 손님들을 상대하기 위해 독학으로 일본어를 마스터했다. 이 때 인연이 닿은 한 일본 손님이 보내준 요리책은 김원일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그 요리책을 보는 순간, 그 동안 요리랍시고 했던 것은 요리가 아니었던 거야. 돼지죽이었던 거야. ‘아! 요리도 공부를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
유학을 가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일본을 왕복하는 화물선을 2년간 탔다. 배가 일본에 정박할 때면 요리학교 아베노쯔지를 찾아가 입학 절차를 밟았다.
“지금 생각하면 배짱도 참… 가방 하나에 옷이랑 일한사전, 한일사전 딱 두 개 놓고 2만 원 들고 간 거야. 그냥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대 정신으로 간 거지.”

rokmc37_026.jpg

그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재일동포 사업가의 도움으로 나라 지방에 일할 곳과 숙소를 제공받았지만 오사카까지 통학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부산에서 대구 정도되는 통학거리. 꼭두새벽부터 탄 기차 안에서도 그는 결코 쉴 수 없었다. 졸릴 때면 요리용 펜치로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공부에 몰두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힘들게 마친 유학생활.

최고의 학교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자신만만해 있었다. 정통 프랑스요리와 일본 요리가 가능했고, 일본어
와 프랑스어도 능통한 그의 이력서.

하지만 서울 유수의 호텔에서 그는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너무나 화려한 이력서가 문제였다.
서럽고 비참했던 그는 이틀 만에 다시 일본 땅으로 돌아갔다. 아베노쯔지의 이시나베 교수가 운영하는 식당에 취직한 그는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교수와 직원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신문에 소개된 쥐사건도 이때의 일이다.
“고양이만한 쥐가 있는데 아무도 잡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밀대로 냉장고 밑을 쑤시니 쑥 나오더라고. 밀대로 치는데 안 죽길래 주먹으로 머리통을 박살 내버렸지. 그 때부터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거야.”
그 자세를 눈여겨 본 이시나베 교수는 김원일에게 귀화를 권유했다.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것. 하지만 김원일이 이를 뿌리치자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라며 추천서와 비행기 표, 학비와 용돈 20만 엔을 선뜻 내밀었다.
유학 이후 그는 서울 힐튼호텔에 취직하게 된다. 하지만 그 생활이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재벌가 큰 손님과의 다툼이 문제가 되어 2년 만에 부요리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잘 나가는 국내 기업에서 그를 스카웃한 것. 대치동의 아파트와 자동차가 주어질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지만 그가 맡기로 한 600석 규모의 식당이 완공되기 직전 회사는 부도가 난다.

“조그만 아파트에 틀어박혀서 내내 책만 쓰면서 시간을 보냈어. 결국 출판사와 계약이 돼서 원고를 넘겼는데, 그 회사가 또 부도가 나버리더라고. 시련이 겹치니까 참 끝도 없는 거야.”
하지만 그 기구한 삶과 열정에 감동한 형설출판사의 회장이 선뜻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면서 그의 책은 그렇게 한 권, 두 권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rokmc37_027.jpg하루는 책에 들어갈 돈가스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큰 아들 동현이를따라 놀러온 친구들에게 일류 요리사의 돈가스는 너무나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끌려온 동네 아줌마들까지 사로잡아버린 그 맛. 그 아줌마들의 성화에 소스를 팔기 시작한다. 아름아름 소문이 나 작은 생수통으로 몇 백개를 팔았다.
“그걸 보고 마누라가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봐. 친척들한테 돈을 빌려와서는 나한테 말도 없이 7평짜리 구멍가게를 하나 얻은 거야.”
’95년 7월 1일. 그렇게 테이블 세 개짜리 가게에서 일본식 요릿집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손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동네 시정잡배 같은 손님에게서 입소문은 시작됐다고 한다.
“반바지 차림에 껄렁껄렁하게 “뭐 좀 할 줄 알아요?” 라면서 고등어회
1인분을 시키더라고. 임마가 몇 점 먹더니 자세가 달라져. 나갈 땐 정중히 실례했다며 나가더니 다음 날 양복을 차려입고 오더라고. 백발이 성한 노신사 한 분과….”
그 노신사는 한국영화협회 회장이었고 그 때부터 입소문은 시작됐다. 테이블 3개는 늘 만원이었고 가게 밖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길게 늘어졌다. 테이블 3개로 하루에 400만 원씩 매출을 올렸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4개월 만에 빌린 돈을 다 갚고 24평 가게로 이사를 갔다. 가게가 커지자 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당의 땅을 사고 지금의 건물을 지은 게 12년 전이다. 그 동안 얼마쯤 번 것 같은지 묻자 그는 100억을 불렀다. 하지만 그 돈을 다 책을 쓰는데 쏟아 부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요리사에게 중요한 눈이 망가질까봐 컴퓨터를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쓴 70권 가량의 원고는 모두 노트에 손 글씨로 적혀 있다. 게다가 대부분이 한문이고 그림도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 놨다. 가뜩이나 팔리기 힘든 고급요리책인데 그런 원고를 컴퓨터로 옮겨가며 책으로 내줄 출판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때려치워라. 그러면서 출판사를 만들어 버린 거야. 도서출판 원일. 더러워서 내가 만든다 이거야. 서점에서 책 팔자고 해도 됐다고 해버렸어.”
입소문을 타고 책을 사려는 사람들의 전화가 식당에 끊이지 않는다.
장부를 들춰보니 미국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올 정도이다. 한 권에 13만 원을 호가하는 그의 요리책. 하지만 확실히 그의 책은 질이 달랐다.
“된장찌개도 비법을 공개 안 하는 세상인데, 일본과 프랑스에서 배우고 34년간 연마한 고급기술을 다 공개하는 거라고. 시계나 가방에도 명품이 있는 것처럼 책에도 명품이 있는 거지. 내 책 사려면 가게로 와서 제 값을 치루고 사가라. 배짱인 거지. 자신이 있으니까.”
내년 2월이면 그의 자서전 ‘김원일의 외곬인생’을 포함한 나머지 6권의 책이 모두 발간될 예정이다. 촬영에 사용된 그릇이 1,100종류, 촬영 사진이 50만 컷. 재료비만 2억 원. 그릇 값이 2억 5천만 원, 사진촬영, 출장비가 3억 8천만 원, 인쇄비용 등을 합하면 10억 원이 훌쩍넘어간다. 이 정도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하지만 요리책은 표지의 때깔부터 남다르다.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 방대함과 세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제자를 키우고자 한 그의 열정도 한 때는 ‘미쳤다’ 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장인의 밑에서 혹독히 수련하며 일을 배우는 도제식 요리학원을 연 것은 ’94년 말이었다. 연간 학원비가 2,500만 원이 넘는 학원을 열어 4기까지 약 80명의 수강생을 받았지만, 이를 끝까지 마친 수강생은 단 10명이었다. 그 혹독한 방식에 제 발로 나간 학생들도 있었고, 퇴학당한 이들이 집단소송을 걸기도 했다.

“장인정신, 예술가 정신이 제대로 담긴 사람을 키워보려 했어. 칼을 다루는 기술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예술가를 키워보려고 했지.”
스스로가 혹독하게 일을 배웠고,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에 인생을 건 그이다. 하지만 칼을 잡기를 원했던 학생들은 붓글씨, 어탁, 꽃꽂이까지 하려 했던 그의 교육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편, 수강생들의 입장에선 강사진이 부실하고 커리큘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반발도 있었다. 뜻과 의욕은 좋았으나 식당과 학원을 동시에 경영하다 보니 생긴 문제에 대해서는 그 역시 아쉬워하고 있었다.
당시 학원으로 쓰이던 2층은 주인 없는 조리기구들로 가득해 휑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다시 최고의 요리학교를 세우겠다는 꿈rokmc37_025.jpg을 버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요리에 미치게 하는가.
“혼이지. 요리라는 것은 사람의 혼이야. 음식은 곧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혼을 다 불어넣어야 되거든. 그것이 안 들어가면 요리가 될 수가 없지. 요리는 소금, 물, 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거야. 나머지는 손과 기술로 혼을 불어넣으며 도와주는 것뿐이지.”
그런 그는 요즘 서점가의 가벼운 요리책이나 우후죽순처럼 문을 여 닫는 식당에 대해 근심을 보낸다.
“어릴 때 누가 회초리를 들면 무서워서 오줌을 찔끔하는 경험이 있을거야. 생선도 마찬가지야. 생선을 바닥에 확 패대기치면 근육이 수축되면서 본능적으로 정자를 배출한다고. 그럼 맛이 없어. 다들 막 잡은 싱싱한 생선만 쫄깃쫄깃 하다고 좋아하는데… 시간이 좀 지나면사후 경직됐던 근육이 이완되면서 더 부드러워지고 맛도 더욱 풍부해지는 거야. 그 때가 가장 맛이 있는 거지.”
그의 가게에서는 생선을 잡자마자 회를 치지 않는다. 생선의 살이 가장 맛있을 때까지 숙성을 시켜 내놓는 그의 음식. 이는 한국인의 입맛에 익숙하게 변형된 일식(日食)이 아닌 일본정통요리를 뜻하는 화식(和食)이라고 한다. 그 길에 자신의 모든 걸 건 사나이. 그 인생사의 전환점은 다름 아닌 해병대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의 큰 아들은 이미 해병대에서 복무 중이며, 작은 아들도 입대를 대기 중이다.
“주먹도 쓰고 껄렁하게 살던 내 인생이 해병대 덕분에 바뀌었어. 내자식들도 가서 도전정신이 뭔지, 해병대 정신이 뭔지 배워서 화끈하게 살라는 뜻이지.”
해병대 출신이라면 언제든지 제자로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김원일 요리사. 단, 제대로 된 정신을 갖고 올 것이라는 단서를 잊지 않았다.
생선과 밥을 조물조물 거리더니 투박한 접시 위에 초밥을 탁탁 올려놓는다. 일본 왕실에서 쓴다는 특제 간장에 살짝 찍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쫄깃하면서도 너무나 부드러운 육질. 그 사이로 탱글탱글한 밥알이 씹히더니, 고추냉이의 알싸한 맛과 함께 어느새 생선과 하나로 어우러진다. 몇 번 씹고 넘기기 아까운 그 풍부한 맛에 씹고 또 씹는다. 이 맛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맛있다는 말보다 이 맛을 더 잘 표현할 말은 없을 것 같다.
며칠 후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다보니 일전에 먹었던 그 초밥 맛이 떠오른다. 내가 씹고 있었던 것은 그냥 생선과 고추냉이와 밥 알갱이가 어우러진 초밥 덩어리가 아니었다. 요리에 미친 한 남자가 초밥에 담아낸 34년 외곬인생의 혼을 씹고 있었던 것이다. <해병대지 37호>






  1. notice

    해병대 기수별 연도별 입대일자 1000기 이전

    해병대는 현재 매월 1개 기수를 선발하여 양성하고 있다. 해병대는 교육단에서 신병교육을 실시한 1975년부터 2011년까지는 매월 2개 기수가 입대하였으나 해병대 2사단 총기사건 이후 병영문화 개선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월 2개 기수를 통합 1개 기수로 선발하여 양성하기 시작했다. 2012년 첫 입대한 기수는 1157기가 1...
    Date2021.08.24 By관리자 Views346642
    read more
  2. notice

    해병대 기수별 연도별 입대일자 1000기 이후 2009 - 2021년

    해병대 기수별 연도별 입대일자 2009년 - 2022년 해병대는 현재 매월 1개 기수를 선발하여 양성하고 있다. 해병대는 교육단에서 신병교육을 실시한 1975년부터 2011년까지는 매월 2개 기수가 입대하였으나 해병대 2사단 총기사건 이후 병영문화 개선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월 2개 기수를 통합 1개 기수로 선발하여 양성하기...
    Date2021.01.24 By관리자 Views305279
    read more
  3. 해병대 전우가 불러낸 복서출신 이승철의 연극 인생 30년

    【인터뷰365 서영석】 “배우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탤런트 이청아 아빠” 이순으로 접어든 중진 연극배우 이승철. 서울 동숭동 대학로 무대의 중심인물로 30여년 활동해 온 그가 만년에 이르러 경기도립극단의 지도위원으로 옮겨가 수원의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배우 인생 2막의 열정을 다시금 불사르고 있다. 주어진 배역...
    Date2011.01.04 By운영자 Views6945
    Read More
  4. 디자이너 고태용

    화려해 보이는 디자이너의 세계, 그 이면에 숨겨진 고난과 역경 해병대 정신으로 이를 극복해낸 서른 살 젊은이의 도전과 성공 스토리 <해병대지 글 중위 김창완 사진 편집팀>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의상을 협찬한 디자이너, 서울 패션위크 최연소 참가 디자이너 등 고태용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여성스럽고 감성적...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5908
    Read More
  5. 열정의 화가 한국의 고갱 최동렬

    화가 최동열(60)은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그림공부를 해본 적 없는 그는 어느 날 돌아보니 화가가 되어 있었고, 어느 날 돌아보니 뉴욕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 뜬 그는 ‘한국의 고갱’이란 별명까지 얻으며 화려하게 국내로 데뷔한다. 월남전에 참전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그...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6655
    Read More
  6. 외곬인생 요리사 김원일

    해병대 정신으로 독하게 달려온 그의 인생.그 인생을 알고 먹는 그의 요리는 더 맛있다. “내 요리를 평가할 사람은 국내에는 없어. 내 책도 마찬가지고. 그 누가 감히 김원일을 평가하겠나.” 요리사 김원일(53)은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짐작은 하고 찾아간 인터뷰였지만, 그 자신만만함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7956
    Read More
  7. 해병대가 낳은 세계적 예술가 - 조선의 칠장이 전용복

    “나는한국인이다” 조선의 칠장이 전용복 해병대가 낳은 세계적 예술가. 옻칠로 세계를 감동시킨 예술가의 꿈과 집념의 이야기 “분명히 얘기하지만 나는 할 수 있소. 백 번 물어봐도 내 대답은 똑같을 거요. 불가능하다고 한 사람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 줄 압니까? 그들은 목숨을 걸지 않았고 나는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오.” ...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5024
    Read More
  8. 포니대령과 현봉학박사

    글 /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 10만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흥남철수작전의 두 영웅 포니대령과 현봉학 박사 미 해병대 포니 대령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57년 내가 사령부 참모부장이던 시절에 수석고문으로서 함께 일해 당시 인원(T/O)과 장비(T/E) 등 해병대의 기반을 수립했다. 내가 만난 포니 대령은 우리 ...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8426
    Read More
  9. 장단.사천강천투를 기억하다.

    장단·사천강 지구는 6·25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2년 3월부터 1953년 7월 휴전까지 대한민국 해병대가 중공군의 공세로부터‘ 한 치의 땅도 적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일념’으로 사수한 곳이다. 장기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해병대 7대 전투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전투.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최될 당시, 피아간...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4550
    Read More
  10. 연평도전투수기 - 우리는 대한민국 국가대표다

    해병대지47호 - 연평도포격도발 특집 전투수기 연평부대 제7포병중대장 대위 김정수 해병대 연평부대 포 7중대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포병중대’다. 전군 최초로 대한민국이 개발한 세계적인 명품 K-9 자주포가 배치됐다는 것을 알고 서북도서에서의 군복무로 자부심을 갖도록 내가 붙인 애칭이다. 2010년 11월 23일 여느 때...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5367
    Read More
  11. 포화속의 어린이를 살려라!

    해병대지 37호 영웅들의 이야기 - 속의 어린이를 살려라! 글 대위 이기원 사진 편집팀 무자비한 북한군의 포격 속 나의 안위보다 타인의 목숨을 생각한 이 시대의 군인들 무자비한 북한군의 포격 속에서도 연평도 해병대원들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타인의 목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연평부대 인사과장 남정일 소령과 군숙...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6370
    Read More
  12. 해병대정신은 화염보다 뜨거웠다 - 영웅들의 이야기

    영웅들의 이야기 / 해병대지 37호 - 연평도포격도발 특집 글-중위 김창완 / 사진-대위 이성홍 등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故 서정우 하사와 故 문광욱 일병. 꽃다운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의 공격이 있은지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간다. 아픔은 시간의 물결에 씻겨 나간다고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청...
    Date2011.01.03 By운영자 Views5849
    Read More
  13. 해병정신 김정식씨, ‘남돕는 일은 이미 일상’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해병대 제대 후 칼과 도장나무를 들고 오로지 생활고(生活苦)를 해결하기 위해 연평도, 백령도 등지로 이곳저곳 다녔던 기억은 이제 아련한 옛 추억이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당시의 일이 시련으로 남아 있다. ◇ 김정식씨가 평생모은 수석 전시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Date2010.12.30 By운영자 Views4711
    Read More
  14. 해병대복무한 이재연 모델라인 대표

    軍이 준 만남·지혜·추억 `철부지 모델→모범생 모델' 변신 <국방일보 / 2010.12.23> 모델라인 본관이 자리 잡고 있는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뒤편은 모델, 에이전시 직원, 연예인들로 넘쳐난다. 이재연 대표를 인터뷰하던 날, 거리에서 수많은 패션 피플들을 만났다. 그래서일까? 왠지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녹차보다는 아...
    Date2010.12.29 By운영자 Views900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27 Next
/ 27
CLOSE

SEARCH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