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의 두 장군

by 운영자 posted Dec 2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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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두 장군

 

나는 1997년 가을 해병대 사령부와 해병 제1사단 및 제2사단의 위관장교들을 대상으로 "공격 시 소총중대"라는 제목으로 90분 간씩 순회교육으로 강의한 일이 있다. 이 강의는 나의 제언으로 당시의 해병대 사령관(전도봉 장군)의 요청으로 순회교육 일정에 의거 실시되었다.

이 강의는 1958년 2월 미 제1군단(집단) 사령부에서 해병대 사령부로 "공격 시 소총중대"라는 제목으로 강의 요청이 와서 내가 같은 해 3월에 미 제1군단 사령부(Camp Red Cloud) 강당에서 50분 간 미군 위관장교와 하사관들 300여 명에게 강의한 내용이다.

최초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통역장교 출신인 T소령으로 미군측에 명단을 제출했으나 보병장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여 그 불똥이 나에게 떨어저서 F.T.X.기간 중이어서 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사단명령으로 이미 발령이 나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연대장(김용국 대령)의 무관심과 비아냥 속에서, "그 강의는 연대와 관계가 없는 네 개인의 일이니 F.T.X. 기간 중에는 훈련에만 전념하고 밤에 자는 시간에만 준비하건 말건 네 마음대로 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부랴 부랴 F.T.X. 기간의 바쁜 틈을 타서, 물론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10일 간 준비하고 대타격으로 해병대를 대표하여 강의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강의 내용이다.

이 내용을 나는 언젠가는 우리의 후배 해병들에게, 특히 위관장교들에게 우리의 세대가 가기 전에 꼭 한번 강의할 것을 생각하고 강의개요를 500여 부를 준비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도봉 사령관이 나에게 1997년 가을에 기회를 허락해 주어서 이루어진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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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순회 교육 중 나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고 시대가 바뀌었구나 하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 해병가족들에게 설명하므로서 우리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보고저하는 것이 이 내용의 목적이다.

그것은 해병대 사령부 참모장을 위시하여 사령부 근무 전장교, 부사관들이 해병대 사령부 강당에 꽉 찬 앞에서 강의를 마치고 해병 제1 및 2사단에 순회 강의차 먼저 포항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고맙게도 나의 강의 내용을 전부 녹화하여 내가 사령부를 떠날 때 나에게 건네주었다.


해병 제1 사단
경북 포항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해병 제1 사단 본부에 내가 도착했을 때(사단에서 제공한 KAL기편 항공권) 현관 앞에 사단장을 위시하여 참모들이 나를 영접해 주고 기념사진 촬영까지 했다. 나는 이들을 보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반가웠고 또한 해병대 선배장교로서의 어떤 자부심을 다시 갖게 되여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번 나의 방문은 해병대 사령부가 박정희 정권의 어이없는, 허구한 구실로 해체된(1973년 10월 10일) 후 해병부대를 30년 만의 방문이었다.

사단에서는 나의 강의를 위해 '도솔관'에도 350명 정도의 위관장교들을 뫃이게 해 주었다. 이때의 사단장은 해군사관학교 출신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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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제2사단으로

그 다음에 나는 김포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해병 제2사단으로 같은 목적으로 갔다. 특별히 이 지역(김포반도 북단 지역일대)은 1962년 겨을 내가 해병 제1연대 제2대대장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근무한 지역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꽤 감개무량했고 그 때부터 35년만의 방문이다.

 

사단본부에 내가 도착했을 때 본부 앞에 부사단장과 참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악수 후 사단장은 출타 중인 것으로 생각하고 2층으로 안내되어 사단장실에 들어섰는데 거기에 사단장이 의자에 뻐치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본 순간 무슨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사단장실에서 도루 나오려했으나 나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다 하고 참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니 나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나는 해병학교에서 사관후보생 중대장을 2년 간(1955년-56년)했었기 때문에 이런 장교를 보게 되면, 기본 교육이 제대로 안 된 장교를 보면 참을 수 없이 분통이 터지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다. 이때의 사단장은 해병학교 출신 장군이었다.

이 두 장군을 보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이 두 장군의 장교로서의 성품과 기본 자세이다. 해사 출신 장군의 자세는 원칙에 입각한 행동이었고 해병학교 출신 장군의 자세는 적당히 요령껏 취한 행동이었다.
 
요령이라는 것은 부사관들이나 또는 병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어떤 임무를 수행하면서 쉽게 그리고 최선의 성과를 올리기 위한 방법인데 이 요령도 원칙에 입각하여 이루어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기 쉽다. 이런 것은 경험에 의거하여 터득되게 되는 데 이런 요령을 고급지휘관이 행사한다는 것은 그 내용의 대소 혹은 경중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사단장으로서의 부대지휘 능력과 또한 그 방법에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군 사관학교에서는 원칙을 배웠고 해병학교에서는 요령을 배웠음을 단적으로 이 두 장군의 행동은 보여 주고있었다. 해병학교 출신 장군의 행동은 해병 정신과 해병대 전통에도 어긋난 행동이었다. 추측컨데 이 장군은 사령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됐다면 해병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병대에서 필요로 하는 장군은 이런 요령껏 업무를 처리하는 장교가 아니라 만사에 원칙을 중시하고 또한 그것을 준수하기 위하여 솔선수범하는 순수한 해병 정신의 소유자인, 그런 충실하고 건전한 장군이다. 거기에 더하여 교육 장소로 회의실에 전방부대라는 이유로 약 80명 정도의 인원을 집합시켰는데 강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들과 악수하면서 보니 대부분의 인원들이 부사관들이었다.

나는 소대장, 중대장을 대상으로 강의한 것이 아니라 분대장들에게 "공격시 소총중대"를 강의한 것이다. 나는 이걸 보고 아주 어처구니 없었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해서 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시대에서는 상상조차할 수 없었던 그런 기이한 현상인데, 나는 싫어도 나의 모군인 해병대, 특히 김포지역에서 보아야 했다. 생각할 수록 실망스러운 오늘의 해병대의 일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1962년 이 지역에서 전방대대장을 했었기 때문에 나의 실망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 부대는 나의 초청강의를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강의일까지 나의 집으로 세번씩이나 정훈참모라는 장교가 교육목적과 무관한 내용의 문의 전화를 했었다. 심지어 전화 내용을 도청하는 소리까지 들렸었다. 나는 좀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나의 강의를 취소할 것을 생각했으나 해병대 사령부의 순회교육 공문까지 이미 예하부대에 배부된 이상 나는 나의 기분으로 멋대로 취소할 수 없어서 갔었는데 역시 결과는 예상한대로 좋지 않았다.

위의 두 장군은 내가 대령 때(1966년) 아마 민간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두 장군을 비교해 보면서 해병학교 출신과 해군 사관학교 출신과의 큰 차이점을 보고 역시 해병대는 미국 해병대와 달리, 미국 해병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O.C.C.(장교 후보생 과정) 출신 장교들이 해군 사관학교 출신을 제치고 해병대 사령관이 되는 전통에 비해 한국 해병대 사령관은 반대로 해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가 해병대 사령관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미 해병학교(Basic School US Marine Corps Schools Quantico, Va. 1954년)에 유학 중 관찰한 해사 출신 장교들의 미국(미 해병학교)에서의 무례했던 행태와 국내에서의 편가르기식 태도와 언행 등으로 인하여 내가 가지고 있던 해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에 대한 나의 편견,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때부터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해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에 대한 편견, 미 해병학교에서부터 시작된, 같은 것을 버렸다. 물론 사람나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선인들의 말을 나는 믿고 싶다.
 
그러나 우리, 해병대가 오래 전부터 안고있던 편가르기의 악습, 잠재 의식이 아직도 어떤 장교들 속에는 그대로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나는 무척 낙담한 일이 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내가 사실 그대로 저술한 "해병대 전투 및 해병대 해체 2005년 7월 27일 발간" 라는 책자를 출판한 후 이 내용을 읽은 오래 전의 해사 출신인 70대의 老해병장교는 "왜 해사 출신들만 까고 해병대의 비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까?"하는 엉뚱한 항의를 내가 혁역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장교가 나에게 했었는데 나는 아주 실망하고 또 크게 놀랐고 심지어 격분까지 했다. 이는 이들 속에 아직도 네편 내편이라는 편가르기식 오래 전의 그 잔념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해병대 비리는 왜 폭로하지 않았습니까?"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는 마치 자기는 해병대 장교가 아니고 아직 해사 출신 장교라는 관념이 그의 머리 속에 깊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십년 전의 사실을 그대로 사실대로 언급했다해서 나에게 항의할 정도이니 그 당시의 이들이 갖고 있던 출신별, 해사 출신, 편가르기가 어떠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그렇다면 아직도 해병대내에는 우리 시대에 안고 있던 그 망군적인 '편가르기'의 악습이 아직 상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우리의 해병대를 위해서 무척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떡하다가 우리 해병대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것 역시 오래 전의 해병대가 정부의 예산 절감이라는 허망하고도, 허구한 정책으로 우리 해병대를 해체했을 때(1973년 10월 10일) 우리가 부르짖었던 "누군가 책임지고 대답을 하라"하던 우리의 부르짖음이 아직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해병대들에게도 해당될 것으로 생각된다. 누군가 책임지고 우리 시대에 안고 있던 그런 망군적인 '편가르기의 악습'을 퇴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반면에 나의 저서를 읽은 해사 출신, 우리가 존경하는 老해병장군은 "이 대령의 심정은 이해하나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하니 인제 다 지난 일들이니 잊어버리고 우리의 여생을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떤가?"하고 나를 위로까지 했었다. 이 얼마나 넓고 깊은 老장군의 생각이며 또한 마음씀인가?
 
오늘의 해병들은 이런 老장군의 말대로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하고 지난 날을 체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 끝 -

해병 대령(예) 이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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