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복무한 이재연 모델라인 대표

by 운영자 posted Dec 2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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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이 준 만남·지혜·추억 `철부지 모델→모범생 모델' 변신 <국방일보 / 2010.12.23>

모델라인 본관이 자리 잡고 있는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뒤편은 모델, 에이전시 직원, 연예인들로 넘쳐난다. 이재연 대표를 인터뷰하던 날, 거리에서 수많은 패션 피플들을 만났다. 그래서일까? 왠지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녹차보다는 아로마 향이 짙게 풍기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야 안심이 될 듯싶었다. 그렇지만 필자의 생각이 짧았다. 이 대표는 그 어느 것도 다 어울릴 만큼 우아함과 소탈함을 두루 갖춘 진짜 대한민국 모던보이였기 때문이다.

이재연.jpg

경주 감포 초소 근무 당시 전우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재연(가운데) 대표

이재연_01.jpg

올해도 어김없이 모델라인 주최로 지난 14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제26회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시상식에서
이재연(가운데) 대표와 송창의·유승호·조여정 등 백조상
수상자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재연 대표는
1946년 강원 원주 출생. 제1세대 모델로 71년 데뷔 후 79년 88 패션스튜디오 오픈. 83년 모델라인을 설립하고 그해 베스트 드레서(백조상) 시상식을 출범시켰다. 84년 국내 최초 패션쇼 전문 소극장을 개관했으며 88년 서울올림픽 오프닝 행사를 기획, 연출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과 유럽에서 성공적인 비즈니스 활동을 벌이던 중 2005년 폐암 투병과 지인에게 당한 배신으로 험난한 5년을 보냈으나 올해 새 사옥 입주와 함께 패션 사진전을 열어 호평받았다.

 1946년 강원 원주 태생인 이 대표는 자신을 원주 최고의 명물이었다고 소개했다. 자그마한 동네에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원주 일대를 누빌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픈 지난날이지만 화목한 가정, 따듯한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웠던 그에게 어린 날의 치기는 고이 접어 묻어둘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안타까웠던 이야기도 잠시, 이 대표는 ‘안 되면 될 때까지 모르면 알 때까지’라는 구호로 중무장한 해병대에 사실 도망치듯 입대했다며 크게 웃었다.

 “64년 겨울에 입대했지요. 정말 오래전 일이군요. 사회에서 사고 친 일이 있었는데 자원입대가 가능했던 해병대에 얼른 들어왔던 거지요. (하하) 경남 진해에서 신병 교육이 있던 당시 동장군이 떡 하니 버티고 있을 그 추운 날 그것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속옷만 입고 연못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온몸이 마비될 정도로 추운데 조교가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라는 겁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 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얼마나 눈물이 납니까? 다들 몇 시간 동안 울었을 겁니다.”

 그는 그때 가족이 생각났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날 철없이 보냈던 청소년 시절이 떠올랐다고도 했다. 그 이후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 원망보다 이해로, 미워하기보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힘들수록 더욱 기대게 되는 것이 핏줄이라 했던가? 이 대표에게 해병대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한 작은 등불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힘든 훈련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귀신 잡는 해병, 대한민국 남성의 영원한 로망인 해병대 훈련 이야기는 탄성의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해병이 되는 길이라 할 수 있는 상남훈련소에서 정신없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죽음의 계곡, 눈물 고지 등을 지금 해병들은 아는지 모르겠군요. 웬만큼 훈련 강도가 셌던 게 아닙니다. 땀범벅이 된 훈련복에 하얗게 마른 소금기가 쉬지 않고 앉았으니 나중에는 푸석거릴 정도였죠. (하하)

해병은 실전과 같은 훈련을 계속해야 하니 실탄이 장착된 총을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고 방지차원에서 조금도 딴생각을 못 하게 조교들은 끝없이 훈련을 시키더군요. 야간전투·수색훈련·독도법·수류탄 투척·박격포 사격·가스훈련 등으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철모에 물을 떠서 머리에 올려놓아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4열 종대로 서 있는데 날씨가 추우니까 온몸에 한기가 드는 거죠. 이가 덜덜덜 떨리는데 옆 동기에게 피해주지 않으려면 물을 쏟을 수 없잖아요. 정신력으로 버텼던 거죠. 악으로, 깡으로. 천자봉 기합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모포 한 장에 소대원 전원이 올라가야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얼마나 무서웠던지요.”

 이 대표에게 훈련병 시절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당시 소대장과도 여전히 연락한다며 60여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지켜준 것은 인생 목표라 할 수 있는 ‘만남’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군 생활 이후 사람들과의 만남을 ‘인생의 역사를 만난다’라고 생각한다며 강조, 또 강조했다. 정말 군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고마워하면서 인생의 나침반이자 삶의 등대와도 같았던 그 당시가 있었기에 오늘날 모델라인 이재연이 건재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 연평도 포격도발로 목숨을 잃은 해병대 전우의 기사를 읽었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올바른 국가관을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요? 북한은 분명 동포이기는 하지만 언제 또다시 이런 만행을 저지를지 모르잖아요. 2000년대 들어와서 우리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이 분단국가라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 군 복무기간을 줄이는 데만 발 벗고 나서는 것 아닌가요? 내가 지켜야 할 내 나라, 내 민족이지 않습니까? 군인으로서 판단력이 서려면 최소 1년 6개월은 지내야 할 텐데 신병 훈련 기간을 빼면 입대하자마자 제대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거 같네요.”

 경험하지 못한 자와 경험한 자의 견해 차이는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혜라는 것은 경험한 자만이 나눠줄 수 있는 인생의 가치다. 그래서 걸어온 길을 돌아볼 줄 아는 이 대표는 인생 후배들에게 실수하지 않는 길을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다.

제대 후 우연히 명동에서 시작하게 된 모델일, 맵시·마음씨·말씨라고 하는 3C를 마음에 담고 시작한 모델 에이전시 사업, 그리고 한성대 대학원에서 시작한 교수직까지 더듬어보면 그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하면서도 파란만장했다.

 이젠 앞만 볼 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로 후배들에게 지혜를 전하고 싶다는 모델라인 이 대표. 아름다운 사람에게서는 이토록 진한 향기가 피어나기 때문에 만나고 만나도 또 만나고 싶은 열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로마 향 가득 배어 나왔던 아메리카노는 이미 식어버렸지만, 인터뷰가 끝나고도 이재연 향기는 그 자리에서 전혀 사라지지 않고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조기준 씬플레이빌 기자 iammaximus@naver.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