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화가 한국의 고갱 최동렬

by 운영자 posted Jan 0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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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kmc37_028.jpg

화가 최동열(60)은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그림공부를 해본 적 없는 그는 어느 날 돌아보니 화가가 되어 있었고, 어느 날 돌아보니 뉴욕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 뜬 그는 ‘한국의 고갱’이란 별명까지 얻으며 화려하게 국내로 데뷔한다. 월남전에 참전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그의 스토리는 한편 의 영화와도 같았다. 국내 유명 미술관과 재벌가에서 그의 그림을 사들이기 바빴고 전시회는 연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지난 11월. 대구 인당박물관에서의 초대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강렬하고 열정적인 그림으로 주목받은 본능파 화가이지만, 초승달 같은 눈매와 서글서글한 웃음이 너무나 매력적인 노신사였다. 하지만 그 눈매에는 젊은 시절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여전히 남아 꿈틀거리는 듯 했다.


그가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것은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으니 그림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1951년 서울 인사동의 99칸 한옥에서 태어난 그의 할머니는 ‘벙어리 삼룡이’의 작가 나도향의 누님으로 3대가 의사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소파 최진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을 대표하는 변호사였다. 일제의 간섭에도 사재를 털어 한국최초의 법학연구단체인 법학협회를 결성했고 3·1운동 민족대표 48인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경기중에 입학할 만큼 영특했던 최동열 화백은 그의 롤모델로 이승만 박사를 삼았다. 경기고, 서울대, 프리스턴대를 졸업한 뒤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의 큰 꿈은 경기고 진학에 실패하면서 좌절된다. 스스로를 안하무인이라고 밝히는 그의 자존심에 재수란 있을 수 없었나 보다. 검정고시를 치러 15세에 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 학과에 진학한 그는 또다시 막무가내 같은 선택을 한다. 고생을 좀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곱게만 큰 도련님이 해병대에 덜컥 지원을 해버린 것이다.
“어머님이 유별나셔서 입대 전 날까지 얘기를 안 했는데 실무 배치가 한남동 보안부에 편한 자리로 된 거예요. 그 때 마침 월남에 가는 첩보부대 얘기를 들어서 지원해버렸어요. 월남 가는 것도 그 전날에야 집에다 얘기했죠. (웃음)”
그의 나이 17살.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나이에 전쟁터로 뛰어든 것이다. 당시에 베트남어와 영어 모두에 능통한 인재가 얼마나 있었을까. 때문에 일반전투부대가 아닌 첩보부대(HID)에서 17살 소년은 너무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시내에 있으면서 미국 CIA 산하의 피닉스에서 정보를 얻고 정보원들을 관리하고 포로가 오면 심문을 하죠. 주로 적들이 은신해 있을 비밀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심문을 했어요.”
유창한 베트남어 실력 덕분에 현지인들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주민들과 베트콩을 아군의 협조자로 포섭하는 일도 그가 맡은 일이었다.
“비가 엄청 오는 겨울날, 혼자 베트남 주민처럼 위장해서 조그만 동네까지 나룻배를 저어서 가요. 부락의 촌장을 만나서 인삼주 같은 걸선물하면서 ”베트콩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주면 쌀 몇 가마니를 주겠다.” 이런 협상도 하곤 했어요.”
그가 해병 첩보부대(HID)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지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의 존재는 비록사병이지만 무척 소중했으리라. 17살의 나이에 어딘가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가 파병기간을 1년 더 연장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좋았어요. 혼자 있어서 외롭고 위험하기도 했지만 전 월남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또래들은 경기고에 갔지만 저는 전쟁터에서 있었죠.
멋있잖아요. (웃음)”
rokmc37_029.jpg귀국 후 서울에서 편히 전역할 수도 있었지만 뛰어다니고 박박 기는
생활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포항행을 선택한다. 마침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그 소망은 이루어진다.
“그 사건이 일어나서 훈련 강도가 무척 세졌어요. 한 겨울에 ‘김신조
가 어떻게 뛰어서 내려왔으니 우리도 해야 된다.’ 라면서 지독하게 했죠. 어휴 어려웠어요. (웃음)”
해병대를 전역한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교환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는 애초에 미국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자리를 잡기 위해 영주권을 따는 과정에서 해병대의 인연이 큰 도움이 된다.
“당시 첩보부장이 나중에 해군 정보부장을 하셨어요. 영주권을 받는
데 대한민국 해군 정보부장이 최동열은 월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
웠다고 추천해주니 금방 받았죠. (웃음)”
이제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유도를 했던 경험을 살려 도장에서
흑인들을 가르치기도 했었고, 술집의 바텐더로 일하기도 했다. 인심
좋은 농부 같은 최 화백은 자신이 한 때 잘 나가는 술집 기도였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내 아래 흑인 덩치가 4명이나 있었어요. 해병대 출신이고 전쟁터도
다녀와서 그런지 눈빛이 달랐나봐요. 당시 5시간에 백 불이나 받을
정도니 제일 비싼 기도였죠.”
하지만 그 생활이 그리 정상적인 삶의 패턴은 아니었다. 싸움, 마약,섹스에 탐닉하던 그는 이제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욕망의 전차’를 보고 무작정 찾아간 뉴올리언스에서 그의 삶은 또다시 변화하기 시작한다. 예술가 카페에서 글을 쓰던 최동열은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엘디를 만난다.
첫 만남에 서로가 통하는 것을 안 그들은 거침없는 예술의 여행길에 오른다. 그가 어느 날 화가가 되어 있던 것도 그 때의 일이다. 갑자기 반 고흐와 폴 고갱을 동경하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그는 정육점으로 가서 고기를 싸는 종이를 한 통 샀다. 100m나 되는 종이에 ‘뛰는 말’을 5~6회의 붓놀림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1,000마리 쯤 채워 졌을까.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한 획으로 주욱 말 한 마리를 그려냈다. 그 그림을 카페에 걸면서 그는 홀연히 그림의 세계로 들어선다.
“산과 바다를 누비면서 작업을 했어요. 야영을 하고 차 안에서 자면서 히말라야, 인도, 아프리카 곳곳을 다녔어요. 유카탄이라는 멕시코정글에서 6개월 있을 때는 움막에서 먹고 자면서 작업을 했는데 그때 가장 좋은 작품이 나왔던 것 같아요.”
때로는 독전갈을 막아줄 닭을 키우며 해먹에 몸을 누인 채 여름을 보내기도 했고, 때로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소라와 홍합으로 끼니를 때우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원시적인 수렵생활 속에서 거칠고 뜨거운 삶만큼이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작품들이 나왔다. 마침 당시 뉴욕은 마약과 폭력이 유행하는 험악한 상황에서 신표현주의, 힘 있는 그림들이 주목을 받던 때였다. 20대 젊은이들이 억지로 힘 있게 그려내려던 그림과, 전쟁을 겪고 자연과 함께 살던 사람의 에너지가 자연
스레 녹아 있는 그림은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세계 미술의 초점이었던 뉴욕 이스트빌리지. 순수예술을 부르짖던 젊은 예술가들은 폭력과 공포마저도 아름다운 경지로 승화시킨 최동열 화백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촉망받는 예술가들과의 단체전에 연이어 초대됐고 언론에서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개인전을 열면서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엘디와 함께 한 2인전에서는 오프닝 날작품이 다 팔려버릴 정도의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그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귀국해 전시회를 열기로 마음을 먹는다.
혈혈단신 떠날 때와는 달리 “뉴욕이 주목한 한국화가” 라는 타이틀을 단 채, 그리고 임신 7개월 차인 파란 눈의 신부를 데린 채 그는 돌아왔다. 반응은 뜨거웠다. 뉴욕과 유럽에서 득세하던 신표현주의는 그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그의 뜨거운 작품은 젊은 예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으며, 한국 수집가들의 침을 흘리게 했다.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나 같은 작가도 없었죠. 백남익 선생님과 나이 정도였어요. 지금보다 훨씬 강렬한 작품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처음봤던 거죠. 그림 좋아하는 재벌가 사람들은 다들 사들이고 그랬어요.”
한창 잘 나가던 1990년 중반. 정착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그가 시애틀 북쪽 올림픽 반도의 시골 마을에서 자그마한 라벤더 농장을 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 쯤이었다. 그 선택의 이유에는 사랑스러운 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이솔. 그의 삶 만큼이나 딸을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는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서 어린 딸을 키웠다.
이제 부모처럼 예술가가 된 딸의 이야기를 하는 최동열 화백. 그의 표rokmc37_030.jpg정은 왠지 홀가분해 보였다. 이제 다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홀가분함. 실제 그는 예전의 뜨겁고 열정적인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됐다고 얘기한다.
“나이는 들었지만, 다시 젊은 시절 강했을 때의 기분으로 하고 있어
요. 아이가 있을 때는 그러지 못했는데 요즘은 안 좋은 걸 보면 한 번씩 ‘패버릴까’ 라는 기분도 들곤 해요.(웃음) 그러니 작품도 강하게 나오고 다시 전성기가 오는 것 같아요.”
실제로 한 동안 뜸했던 그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자주 보도되기 시작했다.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한 중턱쯤 온 것 같다는 그는 모든 게 생
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되고 있다고 얘기한다. 게다가 첫 번째 전성
기 때의 인기와 경험은 그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월의 연륜이 젊은 시절 강렬함과 더해져 힘이 있으면서 성숙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세잔 같은 화가들을 보면 마지막 작품들이 정말 좋아요. 작가는 마지막에 불태우는 게 있어야만 대가예요. 이제 불이 붙
기 시작하는 단계예요. 이제부터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될 것 같아요.
그 때는 대가가 되는거죠.”

그는 오는 2012년에 그 전성기가 다시 올 거라고 스스로 예상했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2012년 전시회까지 계획되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 내년 1월 시애틀 아트센터 전시회는 미국과 뉴욕 공략의 시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욕심은 작품활동 그자체에 있는 듯 했다. 내년에는 다시 라벤더 농장을 떠나 자유롭게 이집트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작품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밝힌 그는 전시회에 대한 소망 한 가지를 이야기 했다.
“전시회를 하게 되면 화랑이나 관객들을 위해서 찾아가야 되잖아요. 이걸 안 했으면 좋겠어요. 작품만 보내고 안 가는 거죠. 피곤하거든요. 인사하고, 기분 좋아서 마셨지만 술 마시는 것도 정신없다고. 시차 바뀌니까 시간 낭비도 많고 그래서 나를 초청할 때도 “그림만 보내고 오지 마세요.” 이랬으면 좋겠어요. (웃음)”
이 화가. 자유분방해도 너무 자유분방했다.

백발에 스웨터를 입고 커피를 마시며 웃는 그의 모습에서 월남전이나 마약, 술집 기도의 모습은 찾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가 터뜨리는 너털웃음에는 아직도 20대때의 자유분방함이 묻어났다.
“해병대와 전쟁터에 갔다 온 데서 많이 배웠어요. 삶을 깊게 볼 수 있었거든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하나의 모험처럼 생각했고 그걸 이겨냈던 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해병대의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어려워도 그걸 즐기면서 이겨내는 것. 그런 정신이 제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됐죠.”
화가 최동열만큼 자유분방하게 인생을 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 한국말의 억양이 조금은 낯설게 느낄 정도로 미국의 삶이 더 편안하게 된 그이지만, 17살 해병대 시절의 기억은 그에게 아직도 반가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해병대 정신, 해병혼, 영원한 해병. 이런 것들을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살아가면서 우리 해병대가 얼마나 특별한지 느끼게 되죠. 미국에 서 미 해병만 만나도 나도 월남전 참전했던 한국해병이라고 소개하면서 얼마나 반가워하는데요~ (웃음)”
공항에서의 짧은 만남이 있은 몇 일 후. 라벤더 농장에서 찍은 그의 사진이 메일로 날아왔다. 라벤더를 깔아놓고 시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내후년 쯤엔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전시회장에 있을 그를 보면서 혼자 웃게 될 것만 같다. ‘아이고 이 아저씨. 어지간히도 귀찮아하고 있겠구먼.’
너무나 뜨겁고 자유로운 삶을 산 최동열 화백.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하고 싶은 건 다해봤다는 그가 보여줄 뜨거운 열정과 강렬함이 철철 넘치는 그림을 기대해본다. <해병대지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