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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미군 전력 모르고 공격했다 연이은 참패 日, 4차에 걸쳐 전사 14800·병사 9000·포로 1000명 손실 연합군에 육지뿐만 아니라 해상·공중서도 주도권 넘겨줘 / 2011.06.01

 

석지실장(惜指失掌)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손가락을 아끼다 손바닥을 잃는다’는 말이다. 우리네 속담으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와 비슷한 말이다. 작은 일이었을 때 해결하지 못해 결국 일이 커져 버려 막기 어려워지는 것을 말한다. 브라질 농민전쟁이었던 카누두스 전쟁 때 정부는 처음 병력 107명으로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전투에서 참패하자 그다음에는 625명을 보냈다가 또 졌다. 다음에는 1300명의 병력을 보냈다. 또 참패했다. 네 번째에야 최신무기로 무장한 거의 1만 명의 정규군을 동원했다. 무려 네 달 동안 반군 도시 전체를 대포와 폭탄세례를 퍼부어 간신히 승리했다. 초반에 중규모 이상의 정규군을 투입했으면 쉽게 끝날 전쟁이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전쟁이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도 이와 유사한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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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투에 참전한 일본 전함 ‘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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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투에서 전멸한 일본군의 시신.
1942년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자 곧바로 과달카날 섬에 상륙해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비행장을 닦아 미국과 호주를 위협하겠다는 의도였다. 미군은 이에 즉각적으로 대처했다. 42년 8월 7일 미 제1해병사단은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지휘하에 1만1000명이 과달카날에 상륙을 감행했다. 미 해병들이 상륙에 성공한 다음 날 일본군의 함재기가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미국의 중순양함 4척을 침몰시켰다. 막대한 피해를 본 미 함대는 철수했다.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 해병사단은 고립됐다.

 이 당시 일본 군부는 미군의 상륙작전이 무력정찰 정도의 것으로 판단했다. 상륙한 병력이라야 기껏해야 1000명 정도로 생각했다. 일본은 괌으로부터 병력을 과달카날로 급송했다. 이치기 대좌가 지휘하는 1000명의 일본군은 후속부대의 병력을 기다리지 않고 미군을 공격했다. 미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일본군은 미군을 무시하고 아무런 전술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다. 약 1만 명이 버티고 있는 미군의 전력을 까맣게 몰랐던 일본군은 미군의 막강한 방어력에 전멸하고 말았다. 한 달 뒤 일본군은 가와구치 소장이 6000명의 병력으로 공격했다. 두 번째 공격도 미군의 사력을 다한 방어에 격퇴되고 말았다. 10월에 일본은 3차 공격을 단행했다. 하쿠다케 중장의 17군이 전면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미군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이 전투를 분석한 전사가들은 일본이 처음부터 가래로 막으려 했다면 이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군을 너무 우습게 보고 호미로 막으려다가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당시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군의 작전은 무리였다. 아직 일본이 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갖고 있었고, 또 미군보다 일본군의 병력과 물량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이 바뀐 것은 정보전에서 뒤졌고, 일본이 자기들의 강점을 살리지 않고 엉뚱한 작전을 구사했기에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3차에 걸친 공격이 패배로 돌아가자 일본은 2만 명의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과달카날의 지형은 험하기로 유명하다. 10월 이후에는 북반구로 북상했던 수렴대가 남하하면서 소나기와 비가 자주 내린다. 일본군은 지형도 날씨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은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장대비가 쏟아지는 정글에 길을 내면서 진군했다. 진탕으로 변한 정글과 험준한 지형은 야포를 끌고 이동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이들은 하루에 겨우 5㎞ 정도밖에 진군하지 못했다. 사령관은 지쳐 있는 병사들에게 식량을 버리고 각각 포탄 1발을 지고 가도록 명령했다. 5일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오염된 물을 마시면서 일본군은 이질과 설사로 쓰러져 갔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창길을 헤치며 진격한 일본군의 행군은 그야말로 정신력의 한계를 보여준 극한의 행군이었다. 일본군이 미군 진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전쟁은커녕 두 발로 서 있을 기력도 없었다. 일본군은 하루 만에 9000명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일본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전사 1만4800명, 병사 9000명, 포로 1000명의 손실을 보았다. 결국, 42년 12월에 일본은 과달카날을 탈환하려는 더 이상의 시도를 포기했고, 43년 2월에 섬을 연합군의 수중에 남겨놓고 잔여 병력을 가까스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과달카날 전투를 마무리한다.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첫 번째 전략적 승리로 기록됐다. 이 전투에서 육상에 이어 해상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로 과달카날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라 불린다. 과달카날 전역 이후 연합군은 방어적 작전에서 전략적 공세로 전환했으며, 일본군은 전략적 방어에 치중하게 됐다. 일본에 무엇보다 뼈아팠던 것은 연합군에게 육지뿐만 아니라 해상과 공중에서도 주도권을 넘겨주었다는 것과 총반격의 계기를 만들어 주엇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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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과달카날 다이어리’의 광고 포스터.

[Tip]패트리엇을 고취하는 미국의 힘-영화속 美 해병 활약에 감동 자진해 軍 지원

이 전투를 그린 영화로 ‘과달카날 다이어리’가 있다. 전투가 벌어진 직후인 43년에 제작된 영화다.

안소니 퀸 주연의 이 영화는 용맹무쌍한 미 해병대원의 활약을 그렸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자존심이 상했던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자존감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앞에는 미군 모병관이 자원입대 원서를 받았다. 무수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영화에 나오는 미 해병의 활약에 감동해 자진해서 군에 지원했다고 한다.

 98년 테렌스 멜릭 감독이 이 전투를 그린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을 만들었다.

과달카날 전투의 처절한 전투장면과 함께 전쟁 중에 나타나는 인간의 삶과 사랑, 전쟁의 공포와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담겨 있어 명화로 꼽힌다.

아카데미영화제 7개 부문의 후보작에 올랐으며, 베를린 국제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전쟁영화를 만들도록 국가에서 지원해야 한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은 몇 개 군단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과달카날 전투 당시 미국의 전쟁장관이었던 스티븐슨이 한 말이다. 우리의 리더들이 영화를 통해 패트리엇(애국심)을 고취하는 미국의 힘을 배웠으면 한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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