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812 망치부대

by 박인식 posted Jun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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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124군 부대가 있었다면 남한에는 812망치부대가 있었다"
 
   제5공화국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1980년 518 광주사태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일부 좌익세력의 준동에 의한 폭동으로 여기고 있었다.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고, 연일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북한은 1981년 11월에 있을 88올림픽 개최 선정과 관련해 일부 종목에 대해 북한 개최를 주장하였고, 만약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남한의 올림픽 단독 개최 준비를 방해하고, 주요 시설 및 요인에 대해서 테러하겠다고 경고하였다.
 
   1980. 11. 전남 횡간도 무장간첩 침투(횡간도 어민 괴한 3명 발견 신고, 군경합동작전으로 전원 사살), 같은 해 12. 1. 경남 남해 간첩선 침투(남해 목도 남방 7킬로미터 해상에 있는 괴선박 레이더 포착, 육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간첩선 격침, 9명 사살, 아군 3명 전사, 3명 부상) 1981. 3. 강원도 금화 무장간첩 침투, 81. 6. 충남 서산 간첩선 침투, 81. 7. 임진강 간첩 침투 등 북한은 끊임없이 남한에 간첩을 침투시켜 사회 혼란을 부추기고,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 주요인사의 암살 등을 노리고 있었다. 
 
   오키나와 카데나기지에 본부를 둔 미 전략공군사령부(SAC)는1968년부터 1986년까지 약 20년간  매월 평균 6회에 걸쳐 산하 제9 전략정찰단 소속 SR-71(일명 블랙버드)정찰기를 이용하여 한반도와 극동지역에 대한 정찰 비행을 하였다.
 
   북한 군부로서는 북한 상공을 지나 주요시설을 정찰하는 SR-71정찰기가 눈에 가시 같았지만 24킬로미터 상공에서 마하 3의 속도로 비행하는 정찰기를 그들의 미그 전투기나 대공미사일로는 격추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매번 맹렬히 비난해 왔다.  당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김일성이 70회 생일을 맞이하는 1982. 4. 15.이전까지 SR-71기를 격추해 수령님에게 선물하겠다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인민무력부 산하 방공부대들은 SR-71 정찰기를 격추하기 위해 온갓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으나 서해에서 동해까지 수분이면 통과하는 정찰기 격추를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북한 공군사령관인 조명록은 북한 전투기를 이용하여 남한의 영공을 침범하는 도발을 감행하였다.
 
   1981년 봄 황해도 황주에 있는 북한 공군비행장에서 이륙한 전투기들이 군사분계선 북측 외곽 40킬로미터 지점에 설치한 전술조치선(TAL)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넘어 북방한계선(NLL) 근처까지 남하하여 영공을 침범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경기도 성남에 있는 공군 제30 방공관제단 소속 제1중앙방공통제소(MCRC) 관제사들은 북한 전투기들의 도발가능성에 대비하여 레이더 스코프 상의 항적을 예의 주시하였고,  군산에 있는 우리 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은 항상 출격대기상태를 유지하며 북한 전투기의 영공침범에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또한 방공포사령부도  24시간 비상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1981. 8. 12. 재차 항주비행장을 이륙한 북한의 미그 19기 6대가 곧장 서남진 하여 전술조치선과 한국방공식별구역을 넘자 중앙방공통제소는 무선경고 및 침범경고 방송을 하고 군산의 비상대기 전투기 부대에 출격을 지시하였고, 우리 공군 F-5A 전투기 편대가 서해 NLL 북단으로 출격하였다.
 
   미그19기들은 백령도 서북쪽에서 NLL를 넘어 약 5마일가량 대한민국의 영공을 침공하자 공군은 계속하여 침범경고 , 격추경고와 함께 즉각 돌아갈 것을 경고방송 한 후 F-5A편대가 육안식별 지점에서 경고사격을 하자 미그기들은 그때서야 기수를 돌려 북한쪽으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1981. 8. 26. 16:34경 서해 연평도 24킬로미터 상공, 갑자기 "꽝"하는 폭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여 아연 우리 군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
 
   연평도 인근 북한의 지대공 미사일기지에서 발사된 SA-2미사일이 폭발한 것이다. 이 미사일은 서해 북방한계선 (NLL)남쪽 24키로미터 상공에서 마하 3의 초고속으로 북한 지역을 정찰 중이던 미국 전략정찰기 SR-71 정찰기를 격추시키기 위해 발사됐던 것이다.
 
   공군은 위 사실을 국방부 등에 보고하였고, 국방부장관은 청와대에 보고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즉각 대통령, 총리, 안기부장, 외교부장관,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등으로 구성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하였고, 같은달 8. 28. 전두환 대통령은 강력한 군사적 대북 제재 준비를 지시하였다.  
 
   또한 유엔군사령관 위컴 대장과 작전참모 세네월드 소장은 북한측에 즉시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하였고, 1981. 9. 1. 판문점에서 군사정전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유엔군사령부측은 북한측에 "만일 또다시 이번처럼 북한측 영공 밖에서 정찰임무를 띠고 비행하는 정찰기를 공격한다면 유엔사는 정찰기와 승무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그 어떤 조치도 서슴치 않고 취할 것이다. 휴전을 위반하고 그 어떤 행위를 감행하면 상대방은 필요한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앞으로 그런 도발행위를 계속하면 그 근원지를 공격할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측의 결의를 오산하는 것은 아주 중대한 과실이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하였다.

 

  한편 국방부장관과 안기부장 등은 대통령에게 북한 전투기의 도발상황과 최근 북한군의 동향 등이 심상치 않음을 재차 보고하였고, 대통령은 국방부장관과 안기부장에게 북한의 도발행위의 감시를 철저히 하고 도발행위에 대해서 강력한 군사적 응징 또는 보복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지시하였다.
 
  북한의 124군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할 때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는 청와대 외곽경비를 담당하고 있었고, 30대대는 공비들과 첫 교전이 있는 날 북악산에서 공비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던 부대이며, 당시 30대대장은 전두환 중령, 작전주임은 장세동 소령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미 실미도 사건과 00첩보부대 요원 결혼식장 난동사건, 대원이 사관을 살해하는 등 유사한 사건을 많이 봐왔고, 선갑도 대원 인천지역 해병 헌병대 난동사건, 사창가 총기 발사사건, 1972년 이후 남한에서 실제로 북파된 공작원은 정부의 공식적이든 민간단체의 비공식적인 통계든 4명을 넘지 않은 상황이었고, 첩보부대 소속 북파부대들을 한편 오합지졸로 여기고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국방부가 밝힌 자료에 의하면 1972. 7. 4. 남북 공동성명전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1만명에 이르며, 그중 사망 및 실종자가 7726명으로, 1951년부터 1959년까지 5576명, 1960년부터 1972년까지는 2150명이다) 
 
    당시 비무장지대는 이미 남북 양측 철책이 완공되고, 경계가 심해 124군 김신조 부대와 같이 육상을 통해 단시간 내에 북한에 침투하여 군사적 보복과 응징을 하고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우수하고 강인한 해병대 정예요원을 차출해서 1950-1960년대 북파전진기지라 할 수 있는 백령도, 대청도에서 북한의 서해안을 통해 군사시설 등에 기습 보복과 응징하는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국방부장관은 해군에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기습침공, 테러 등을 감행할 경우 이에 상응하여 북한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대북보복부대를 부대장도 없는 비편제부대로 창설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해병1사단 특수수색대장 홍0표 소령을 찾아가 북파요원을 선발하여 특수교육을 시킬 것을 주문하고, 자세한 내용은 국가안전기획부를 통해 하달하겠다고 하였다.
 
  홍0표 수색대장은 인천지역 해군 정보부대를 통하여 북파에 필요한 장비(AK소총, 통신기, 군복 등)를 구입하였다.  한편 이0수 해군참모총장은 재차 제2참모장이며 해병대사령관인 최0덕 장군에게 특수공작계획을 수립토록 지시하였고, 해병대 전략기획 참모부는 연평도와 백령도에 각 1개 소대 규모의 북파 보복부대로서 북한 해주의 군사시실과 군항이 있는 일부 도서의 레이더 기지 등을 폭파 또는 요인암살 임무를 수행할 ‘망치부대(812요원)운영계획’을 수립한 후 국방부에 보고하였다. 국방부는 1982. 12.경 해군에 대통령 결재시 즉각 시행을 위한 ‘망치부대 운영계획’ 등의 준비지시를 하달하였다.
 
  그 무렵 해병대 전략기획 참모부는 최초 망치부대 자원을 해병대 최고의 정예부대인 해병 1사단 특수수색대 요원을 선발하려고 하였으나 임무수행 중 요원들이 모두 몰살할 가능성이 있고, 또한 특수수색대에서 2개 소대 인원을 차출할 경우 특수수색대 본연의 임무수행에 차질이 발생하므로 일부 특수수색대 요원과 특수수색대 요원들과 같은 능력을 보유한 기습특공대 요원 중 수색교육이수자들로 망치부대 자원을 확보하기로 하였다.
 
  당시 망치부대에 차출되어 임무수행명령을 받으면 그것이 곧 죽음으로 알았고, 차출된 대원들 중에 일부는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려 부모들이 군 고위직들을 동원하여 망치부대에 차출되지 않도록 압력을 넣어 차출에서 제외시키도 하였다.  
 
  최0덕 해병대 사령관은 유00 해병 1사단장과 차0정 6여단장에게 망치부대 운영계획 등에 대하여 “각하의 특별지시이니 망치부대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특히 보안에 유념할 것”을 지시하고, 따라서 해병대의 망치부대 운영계획과 관련된 모든 사항은 군사보안상 “극히 보안을 요하는 특수공작계획” 또는 “보안을 요하는 특수작전계획”으로 분류하여 관리하였다.

망치부대 운영계획에 따라 해병 1사단 작전참모실에서는 특수임무를 수행할 자원을 선발하고, 특수임무수행을 위한 보수교육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문서플레이는 교육과에서 관장하기로 하였으며, ‘망치부대(812요원) 운영계획’과 관련된 모든 문서에는 ‘전지훈련’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게 되었고, 그 내용 또한 사실과 다르게 작성되었다.
 
  해병 6여단장 차0정 장군은 망치부대 요원들이 기거할 병사(兵舍) 및 군수물자 지원을 위한 세부계획을 수립한 후 병사 및 북한 목표시설의 위치와 모형을 그대로 옮긴 모의교장 14동, 주요시설 폭파를 위한 폭파훈련 시설 등을 건립하였다.

북한의 124군부대가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황해북도 사리원에 있는 인민위원회 청사를 이용해 실전연습을 반복했다면 망치부대는 북한의 공격지점을 가건물로 만들어 계속하여 반복훈련을 하였다. 
 
  김신조 부대 31명은 침투조, 습격조, 탈출조 등 3개조로 나누어 청와대를 습격하기로 했으나 망치부대는 정찰조, 엄호조, 돌격조로 나누었고, 망치부대가 그들과 다른 점은 탈출조가 아예 없었고, 구체적인 탈출 계획도 없었으며, 임무를 완수한 후 적해안에서 보트를 타고 전속력으로 백령도와 대청도의 일정한 방향으로 도주하는 것이었고, 아군의 지원이란 보트를 추적하는 북한 경비정이 접근을 차단하는 해안포 지원밖에 없었다.  
 
  북한지역 침투는 해안 1-2킬로미터까지는 저속 엔진을 이용하여 접근하고 그때부터는 패덜링을 통해 소총 또는 기관총 유효사거기까지 이동한다.  소총 또는 기관총 유효사거리에 도달하면 척후 쉼어가 투투총, 석궁, 대검, 야간투시경 등으로 무장한 후 북한지역 해안까지 약 1킬로미터 정도를 은밀히 헤어쳐 들어간다. 
 척후 쉼어는 서해안의 거센 조류를 이겨내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휴대한 무성무기 등을 이용하여 적의 초병을 살해하고 야간투시경을 이용하여 해상에 떠있는 본대에 신호를 보내 본대를 해안선까지 유도한다.

초기 임무의 성패는 척후 쉼어에게 달려있었다. 본대는 정찰조, 엄호조, 돌격조 순으로 해안에 상륙하고, 처음 도착한 정찰조는 공격루트를 찾아내 일부는 경계를 펴고, 일부는 뒤이어 들어오는 엄호조와 돌격조를 목표지점까지 안내한다.  엄호조는 목표지점 경계상태를 확인하고, 중요지점에 배치붙어 교전시 적의 공격을 제압하고, 돌격조를 엄호한다.

돌격조는 목표지점에 들어가 중요 정보 및 자료를 빼앗고, 요인을 납치 또는 암살하고, 주요시설을 폭파하거나 다수의 북한군을 몰살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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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해병 1사단장 유00 장군은 망치부대 선발 및 교육에 관한 세부계획에 의거 기습특공대대인 22대대, 72대대, 32대대 대원 중 그해 제23차 특수색교육을 이수한 대원들을 주축으로 망치요원 81여명을 선발 차출하였다.
 
   특수수색대장 홍0표는 백령지역과 연평지역을 다녀오고, 미 정보부로부터 최신의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위성사진 등을 전달받아 목표지형과 유사한  지형을 택해 1981. 9. 19.부터 10. 7.까지 3주간 망치요원들에 대해서 밀봉교육을 실시한다. 밀봉교육은 주로 해상침투, 폭파 교육 위주로 훈련을 하였고, 임무수행 중 북한 지역에 잔류할 경우 은신과 생존능력, 그리고 기타 공작원과의 접선 요령 등을 교육하였다.
 
   경북 포항시 죽장면 상.하옥리에서 서해안 북한의 목표지역과 유사한 유사한 지역을 택하여 도피, 탈출, 생존 훈20100409141939.png련과 기동사격, 비트구축, 요인암살, 포획, 시설습격 등 다양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특수수색대장은 재차 망치부대 요원 81명을 차출하여 1982. 1. 5.경부터 같은 해 3. 6.까지 12주간의 강도 높은 수색보수교육을 실시하였다.
 
   수색대장은 망치요원들이 적개심을 갖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교육장에 "모조리 죽여라,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기고"라는 글을 게시하고, 담력과 잔인함을 배양하기 위해 대원들을 화장터에 끌고가 한사람씩 산을 넘어 화장터 고로 속에 들어가게 하고, 타다만 인골을 씹어먹게 하고, 적지의 극한 상황에서도 참고 견뎌 생존할 수 있도록 포항 근교에 있는 하수구, 오물통, 똥통 속에 몇시간씩 몸과 머리를 담그게 하였다.  
 
   북한의 124군 부대는 30킬로그램의 무장을 하고 시간당 10킬로미터를 주파하는 급속행군 훈련을 받았지만, 망치부대는 야간에 중무장을 하고 6-7명이 머리위에 100킬로그램의 보트을 매고 산과 계곡을 시간당 10킬로미터로 주파하는 훈련을 받았다.
 
   동계수색교육은 해병대 수색교육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엄동설한에 해상훈련은 상상할 수 없이 혹독하고 힘든 훈련이었다. 영하 10도가 넘는 혹한의 날씨로 모래사장이 얼어붙어 곡갱이도 들어가지 않는 겨울철 황천의 날씨에 바다에 몸을 담그며 훈련을 하다보니 대부분의 대원들은 동상에 걸쳐 손가락과 손등, 귓볼이 갈라지고 터지고, 상처에서 피고름을 흘리기도 하였지만 훈련을 계속되었고,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다.
 
   한편 해군에서는 선발된 요원들에 대하여 거주지 정보기관과 경찰에 신원조회를 의뢰하였고, 추후 신원조회에 이상이 있는 대원들은 모두 특수임무수행에서 제외시켰는데 모대원은 큰아버지가 625때 실종됐다는 이유로, 모대원은 군입대전 벌금형 폭력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제외되기도 하였다.  
 
   1982. 3. 4. 17:00경 포항 도구앞바다에서, 폭파 등 종합훈련을 마치고 수색대로 귀대하던 중 고무보트끼리 충돌하여 보트에 타고 있던 故 이광석 해병(62.07.02.생)이 바다에 떨어지면서 보트 모터에 머리를 부딪쳐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약전 옆 일명 토끼꼬리에서 침투훈련과 폭파훈련을 멋지게 마치고 고무보트를 타고 철수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계속된 훈련으로 대원들 체력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날은 저물고, 해무까지 끼어 보트는 멀리 포항제철에서 비추는 불빛에 의존해 모터를 딸딸거리며 수색대로 향하hbcom_vha09.jpg고 있었고, 대원들은 지친몸을 고무보트에 업드려 피곤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파도가 몇번 철썩이는가 싶더니 보트 2대가 부딪치고 그 위에 타고 있던 대원들이 순식간에 차가운 바다로 떨어졌다.  바다에 떨어졌던 대원들은 반사적으로 다시 보트에 올라왔는데 딸딸이(무전기)매고 있던 고 이광석 해병이 보이지 않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딸딸이 안테나만 물밖에 조금 나와있다가 가라앉는 것이었다.
 
  국가대표 수영선수출신으로 척후쉼어인 서0원 대원과 이0성 대원이 얼른 슈트를 벗어던지고 무전기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고 이광석 해병은 없었다. 한번 두번 세번 숨이 차 죽을 것만 같았지만 서0원, 이0성 대원은 계속해서 차갑고 어두운 바닷물 속으로 몸을 집어 넣었다.  대원들은 그렇게 고 이광석 해병을 보냈다.  

 대원들은 고 이광석 해병을 보내면서 반드시 김일성의 목을 따와 고 이광석 해병의 묘앞에서 제를 지내겠다고 다hbcom_vha099.jpg짐했다.  실종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와 약혼녀(육군하사관)는 통곡을 하며, 대원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달라고 하였지만 지휘관들의 함구 명령이 있어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 돌아가야 했고, 대원들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다.   
 
   사고 후 수색대 요원들이 사체 수색작업을 실시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하였고, 다행이도 약 30일 지나 고 이광석 해병 사체가 어망에 걸린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참으로 처참하였으며, 명찰만으로 겨우 시신을 확인한 후 부대장으로 장례를 치루고 전우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야 했다.
 
   다른 대원들은 전우를 잃은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고 후에도 계속하여 약 4주간의 동계훈련을 실시하였다.(동계훈련 22대대장 중령 신0배, 32대대장 중령 한0걸, 72대대장 중령 문0옥, 교관단 중위 김0엽, 중사 김0휘, 중사 김0택, 중사 강0실, 하사 서0근, 하사 이0선, 하사 서0용 2R소대 소대본부 김0수, 송0헌, 유0상, 1팀 박0호, 우0길, 문0기, 황0수, 정0석, 박0의, 김0환, 2팀 이0준, 성0수, 현0호, 한0일, 도0모, 손0구, 임0빈, 김0철, 3팀 임0호, 김0도, 이0근, 조0호, 황0익, 박0원, 정0봉, 3R 소대 소대본부 이0흔, 박0규, 박0열, 유0주, 김0호, 하0학, 송0영, 정0채, 1팀 김0채, 공0식, 한0석, 강0식, 이0우, 유0뮤, 황0철, 조0형, 2팀 최0주, 이0재, 유0홍, 최0영, 한0규, 신0근, 유0성, 김0종, 3팀 임0록, 홍0수, 서0주, 정0모, 주0형, 홍0모, 이0섭, 김0진, 7R 소대본부 황0원, 김0길, 김0수, 이0석, 이0희, 조0규, 1팀 김0규, 고0철, 이0흔, 한0회, 서0원, 박0수, 박0경, 이0수, 2팀 심0근, 김0호, 김0기, 권0열, 오0건, 김0환, 류0규, 김0호, 이0우 등 교단단 7명, 피교육생 22대대 25명, 32대대 32명, 72대대 24명 등 총 81명)

 

   북한의 124군 부대가 은밀침투를 위해 눈밭에서 수미터 이동하는 훈련을 받았다면, 망치부대는 인내력과 지구력을 단련하기 위해 한겨울에 물속에서 수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는 저체온 훈련과 100킬로그램에 가까운 고무보트를 머리에 얹고 1주일 내내 잠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산과 계곡을 옮겨다니는 훈련을 받았다.  또한 매일 선착순 구보 등으로 수킬로미터를 구보하고, 매주 12킬로미터 산악과 해안 기록구보를 해서 김신조라 하더라도 풀어놓으면 1시간안에 쫒아가 잡을 수 있었다.
 
   교육과정에 국군보안사령부 소속 장교 및 정훈장교는 수시 대원들에 대한 정신교육을 실시하였고, 그 과정에 대원들에게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여러분은 임무완수 후 국가 최고유공자 대우를 받을 것이다"라고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빨리 북파되어 임무 수행하기를 바라는 대원들도 있었다.
 
   한편 1982. 3.초 국방부는 국가안전기획부 등과 협의를 한 후 응징부대는 군에서 차출하고 최종 임무수행은 안기부장과 국방부장관이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하는 대북 응징부대 운영에 관한 최종 계획을 작성하여 청와대에 보고하였다.
 
   1982. 3. 15.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망치부대 운영계획에 대하여 최종 결재를 하였고,  대통령의 결재 직후 망치부대 요원들은 장비 등을 갖추고 해병 6여단 백령도와 연평도로 투입되었다. 백령도와 연평대로 투입되기 전 대원들을 상대로 월남한 북한의 귀순자로 하여끔 북한의 생활, 주민들의 의식 등에 대해서 교육을 하였다. 812망치부대로 선발된 김영길 선임하사는 백령도로 가기전 3일전 북파임무를 수행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하고, 고향땅을 밟지 못한다는 생각에 소주 2박스를 마시기도 하였다. 
 
 망치부대에는 부대장이 없었다. 침투명령을 최종 재가할 대통령이 곧 부대장이었다. 
 망치부대가 백령도에 파견되고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북한의 대남방송 등에선 “망치부대 동무들 오시느라고 수고들해시요, 밤에 모가지고 붙어있는지 확인 잘 하시라요” 등의 방송을 하였다.
 
 처음 방송을 듣고서는 대부분의 대원들이 잠을 자지 못하였고, 갑작스러운 침투명령에 수시 내려지곤 했는데 결혼한 대원은 소대장에게 달려가 울며 자신은 처자가 있는 몸이라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며 임무수행에서 빼달라고 하기도 하였다. 망치대원들은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처럼 임무명령이 떨어질때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유품을 챙길 뿐이고,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망치부대는 밤에는 훈련하고 낮에는 취침을 하였다. 이는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 이후 창설된 육군 첩보부대(AIU) 산하 902정보부대 803대, 이른바 '선갑도 부대'의 훈련방법과 같았다.
 
   6여단장은 망치부대의 군수지원 등에 대해서만 권한 및 책임이 있었으므로 따로 임무를 주거나 설명하지 않았고, 훈련을 독려하거나 부대운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지 망치대원들이 불편한 점 등에 대해서만 살폈을 뿐이고, 망치부대 소대장으로부터 가끔 임무또는 훈련과 관련없는 일상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보고를 받을 뿐이었다.
 
   북한은 해병 1사단이 동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원산 등 동해에 2개 전단을 배치하고 있었고, 서해에는 해주에서 개성, 개성에서 군사분계선 사이에 2개의 전연군단을 배치하고 있는데 특히 연평도 맞은편 지역은 북한 최정예부대인 전연4군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북한군 전연4군단은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최선봉부대로서 북한의 3대 진공로의 하나인 파주 문산의 축선을 따라 침공을 감행할 것이고, 그 뒤를 이어 815기계화 군단이 T-62전차를 이용하여 밀고 내려올 것이며, 우리군은 이에 맞서 1사단, 25사단이 1차 방어에 나설 것이고, 방어선이 무너지면 9사단과 17사단, 기계화보병사단인 30사단이 방어를 할 것이며, 그러면 북에서는 후속부대가 공격을 가할 것이었다.

 북한은 해병 2사단이 서해를 통해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에 대비하여 많은 수의 병력을 해안방어에 배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병 6여단에 대해서는 방어부대에 불과하고, 6여단 병력이 공격을 감행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해병1사단에서 정예병력이 북파임무를 목적으로 백령도와 연평도에 각 1개 소대가 상주하자 북한 군부의 입장에선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고, 망치부대에 대한 대비책으로 보병 1개 사단(약 1만~1만2천명)을 추가로 배치하여 해안방어를 강화하였다.
 
   북한은 군사정전협정회의 등에서 망치부대 존재 사실을 지적하며 상응한 대응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측에 일반적인 훈련부대의 전지훈련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국방부와 해군에 망치부대 운영 등에 대하여 확인을 요청하였으나 해군은 통상의 전지훈련임을 보고하였다.
 
   1983. 5. 5. 어린이날 미확인 비행체가 서해상공으로 대한민국의 항공방공식별구역으로 접근하였고, 공군의 전투기들이 출격을 하였다. 비행체는 중국 민항기로서 우리 전투기에 양날개를 흔들며 비상착륙을 의사를 밝혔다.  한편 연평망치부대는 마침 군관합동 체육대회를 하고 있었는데 비상이 걸려 전대원이 위장복을 갈아입고 보트에 공기를 넣어 당장이라도 임무에 투입될 준비를 한다. 위 항공기는 우리 전투기의 유도를 받으면 춘천의 00비행장에 불시착 하였으나 나중에 일부 납치범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83. 10. 9. 10:28 버마 랑군에 있는 아웅산국립묘지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폭탄을 터트려 전두환 대통령이 동남아 6개국 순방을 수행하던 부총리, 외무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경제수석비서관 등 1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미연합사령부는 북한이 계속하여 망치부대 운영과 관련하여 정전협정 위반임을 주장함에 따라 해병대의 망치부대 운영에 예의주시하던 중 1983년 여름경 국방부와 해군에 망치부대 운영에 대한 재고할 것을 건의하였다.  국방부는 한미연합사령부의 의견에 따라 안기부와 협의를 거친 후 해군에 망치부대의 운영에 신중을 기할 것은 지시하고, 해군 또한 해병대사령부와 해병1사단에 단순 전지훈련의 성격으로 부대운영을 적절히 할 것을 지시하였다.

 

    해병 1사단은 해군본부 등의 지시에 따라 자체전지 훈련의 성격을 보이기 위하여 1984년도 망치부대 요원들에 대해선 수색교육이수자가 아닌 일반 요원을 선발하여 자체 교육을 실시한 후 망치부대에 투입하였다. 국방부와 안기부, 합참, 청와대는 북한과의 과도한 보복전, 비정규전 등이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판단하고 북파 및 응징부대인 망치부대의 운영을 중지하였다.
 
  망치부대 요원들 중에 고 이광석 해병은 망치훈련을 받다가 사망하였고, 고 홍0식 해병과 고 우0준 하사는 망치부대 임무를 마치고 부대 복귀하여 스트레스 등으로 부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자살하고, 고 송0인 해병은 수색보수교육때 입은 상처로 헬기를 이용한 해상침투훈련 중 사망하고, 고 심0근 중사는 헬기가 추락해 사망하고, 고 우0길 상사, 고 유0준 상사는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리다 결국 사망하고, 제대 후 일부 요원들을 제외한 많은 수의 요원들이 정신질환 또는 알콜중독 등으로 사망하거나  어려운 삶은 살아가고 있다.
 
   고 송승인 해병(423기)은 제주 출신으로 수색대 소속이었다. 송승인 해병은 망치부대 임무를 수행하면서 쇄골이 부러졌으나 치료를 받지 못했고, 임무수행을 마치고 수색대에 복귀할때까지도 부러진 쇄골이 붙지 않아 자주 통증을 호소하였다. 제대 20여일을 남긴 1983년 겨울 수색대에서 수중낙하 훈련을 하던 중 위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다. 
 
   1972. 7. 4. 남부공동 성명은 남북간 무력도발을 중지한다고 약속하였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1984년 망치부대가 해체 된 직후부터 사실상 남북간의 무력도발은 중단되거나 급격히 줄어들었다.
 
   북한은 망치부대가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망치요원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 북한 1개 사단 병력이 추가로 해안방어에 배치되어 전력이 분산되었고, 망치부대가 해체된 1984년 이후부터 1990년대 초까지 간첩이나 무장공비를 이용한 테러행위는 거의 중단되었다.   

 역사는 몇사람에 의해 바뀌듯 국가는 극소수 애국자의 희생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88올림픽을 무사히 치룰 수 있었고, 지금과 같이 자유를 만끽하고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812망치부대 요원들의 특별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북한의 124군 부대는 전원 군관으로 이루어진 부대이며, 대단한 부대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망치부대에 비하면, 124군부대는 베낭매고 급속행군만 뛰어났을 뿐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였고, 우리측 경찰과 첫 조우하여 4시간만에 혼비백산 한 오합지졸이었다. 
 
   국가는 정전협정 위반 사실을 시인해가며 812망치부대 존재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애국자들의 값진 희생을 무시하고, 이들의 명예를 드높이지 않는다면 국가가 위급할 때 아무도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812망치부대 요원들의 애국정신과 임무는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임무수행을 위한 특수공작부대로 남을 것이다. [자료출처 : 해병대 망치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