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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판이 질펀해지면 한국의 보통 남자들이 흔히 내놓는 단골 안주가 있다. 군대 이야기다.  "대한민국남아''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라고 군대 이야기를 비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귀신 잡는 해병'' 출신이다. 1백21기. 1961년 9월에 입대해 64년 2월에 제대했다. 농담삼아 얘기하는, 대장 위의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나처럼 작은 키로 어떻게 해병대에 갔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빽''을 써서 간 것은 절대 아니다. 키 1백60㎝로 하한선에 ''거뜬히'' 걸려 입대했다.

나는 59년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징집을 연기한 상태로 몇년을 지냈다. 미 8군 쇼 출연과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60년)의 음반 취입 등으로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쁠 때라 군 입대는 잠시 접어두고 있었다. 물론 한가지 바람이 없지 않았다. "군에서도 장기를 살려 노래할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61년 ''해병 연예대''의 모병 광고가 신문에 실린 사실을 알게 됐다. 그해 여름 어느날 부산 공연을 마치고 서울역에 내렸는데, ''청포도 사랑''으로 유명한 도미가 마중 나와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마침 도미도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잘 됐다. 이참에 우리 해병대 입대해 고락을 같이 하자." 

5.16 직후라 입영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다. 해병 준장으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법률위원장이던 강기천이 "진해에서 일주일 정도 훈련을 받으면 서울로 올라 올 수 있다"고 꼬드겼다.

그런 줄 알고 훈련소가 있던 진해로 갔으나, 얼마 안가 이 말은 전부 거짓말로 드러났다. 석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을 마치고서야 그해 겨울 서울로 올라왔다. 연예대숙소는 한남동에 있었다. 요즘이야 군대 ''짬밥''도 사제(私製) 수준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당시 군대 식사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열량이 턱없이 부족한 짬밥으로는 고된 훈련을 배겨내지 못했다. 허기를 달래려 밤이면 몇몇 동료와 짜고 몰래 진해 경화동의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잡아 구워먹기도 했다.

너나할 것 없이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나는 군대 덕을 참 많이 본 편이었다. 해병 연예대에 있으면서도 영외의 사적인 가수 활동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달에 두세번 나가는 모병(募兵)선전과 위문공연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엔 극장 공연을 다녔다. 군 입대를 계기로 미 8군 쇼 출연은 접은 상태여서 오히려 이전보다 가수 활동은 더욱 활발했다. 나는 지금도 "내 서포터는 해병대였다"고 드러내놓고 말한다.

모병선전이나 위문공연을 나갈 때는 으레 군 의장대와 고적대가 함께 했다. 트럭 세대 정도가 움직여야 하는 대규모였다. 전라도.경상도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나갔다. 공연장은 해당 지역의 학교 운동장이나 강당이었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공연을 했다.

프로그램은 보통 노래.코미디.노래.합창 순으로 짜여졌다. 반드시 여자 가수도 동행했는데, 박재란.이금희.한명숙.현미.이춘희 등 당대의 스타들이 단골 찬조 출연자들이었다. 지역 주민과 동료 군인들의 뜨거운 호응은 불문가지. 이런 열광 때문에 찬조 출연자들도 불만이 없었다.

당시 해병 연예대의 멤버는 화려했다. 가수로는 나와 도미.남백송.박일호.방태원.박경원 등이 포진해 있었다. 코미디언으로는 임희춘이 있었다. 우리의 뒤를 이어 남진.태원.진송남.박일남.오기택 등이 해병 연예대의 전통을 이었다. 나를 미 8군 쇼에 데뷔시킨 파피(김안영)도 해병대 출신이다. 

해병대 시절 노래만 잘 풀린 게 아니었다. 하루에 네댓개의 극장을 돌며 공연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매니저를 따로 두는 건 생각도 못했던 때라 모든 스케줄을 내가 관리했다.  지방공연도 정신없이 다녔다. 고심 끝에 44년형 지프를 구입했다. 아직 돈을 벌어서 살 형편은 못돼 집안 신세를 좀 졌다. 인기 덕에 나는 ''마이카 시대''를 연 첫 가수가 된 것이다.

 

◆ 연예대대장 도미  

 

잠시 해병대 시절 이야기로 시계바늘을 다시 돌리려 한다. 군 시절을 짧게 정리하려 했더니, 옛 동료들이 아쉬운 모양이다. 

글을 보고 전화하는 사람이 몇이 됐다. 제대 후 극장 공연 때면 수시로 찾아오던 동료들이다. 고생이 심한 만큼 재미도 있었던 때라 나도 추억이 새롭다. 아직도 주민등록번호를 외듯 군번 '9293744'를 술술 읊어댈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상남 훈련소'다. 메인 캠프가 있던 진해에서 완전군장을 한 채 도보로 그곳에 갔다. 지금의 창원 근처 어디였다. 

진해에서 두달을, 이곳에서 한달을 훈련했다. 막걸리가 이곳의 특산품이었다. 수통에다 막걸리를 가득 넣어 행군 중 목이 마르면 이걸로 갈증을 풀었다. 

지휘관에게 들키면 그 즉시 맨땅에 머리를 박았다. 이 훈련장에서는 침투 사격 훈련이 악명이 높았다. 낮은 포복으로 철조망을 통과한 뒤 목표지점을 향해 사격을 하는 등의 훈련이었다. 반복 또 반복. 조교는 조금이라도 성이 차지 않으면 수시로 기합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옥 훈련을 용케 빠지는 '행운'을 얻게 됐다. 마침 도미를 비롯한 연예대의 악단 멤버들과 함께 해병 홍보 영화를 찍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염치없는 일이지만, 일단 훈련을 빠지게 된 게 너무 좋았다. 

나와 도미는 칼날처럼 주름을 세운 해병대 군복을 입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봐도 폼 났다. 나는 '낙엽'을, 도미는 자신의 히트곡인 '청포도 사랑'을 불렀다. 이 홍보필름이 영화 상영 직전 '대한뉴스'로 소개된 덕에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로 촉발된 내 인기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신고합니다. 훈련병 최희준 해병대에서 열심히 복무하고 있습니다." 그 짧은 영화가 팬들에게는 확실한 신고식 구실을 한 셈이다. 

당시 해병 연예대의 '대장'은 도미였다. 나이나 가수 데뷔 경력으로나 나보다 선배였다. 본명이 오종수인 도미는 육사 2학년을 중퇴한 뒤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50년대 중반에 데뷔해 경쾌한 리듬의 '청포도 사랑'으로 이름을 날렸다.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어여쁜 아가씨여 손잡고 가잔다/그윽히 풍겨주는 포도 향기/달콤한 첫사랑의 향기/그대와 단둘이서 속삭이면/바람은 산들바람 불어준다네…." 

사실 도미는 해병 연예대가 만들어질 때 큰 역할을 했다. 우리 멤버를 구성한 게 그였다. 그런 이유에다 나이도 많아 자연스레 대장이 되었는데,그만큼 통솔력도 뛰어났다. 같은 사병이면서도 대장은 하사관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60년대 초는 가수의 세대 교체기였다. 가수로 나보다 윗세대였던 도미는 제대 후 이런 격변기의 여파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와 동시대 인물인 박경원.원방현.명국환 등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도미는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맹꽁이 타령'의 박재란,'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한명숙 등 장병 위문 공연에 찬조 출연한 단골 여성 가수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이금희다. 이씨는 폴 앵카 노래의 일인자였다. 

게다가 '키다리 미스터 김'이라는 히트곡도 있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싱겁게 키는 크지만/그래도 미스터 김은/마음씨 그만이에요…." 

노래를 시작하면 장병들은 자지러지듯 환호했다. '라이브 무대의 황녀'라는 별명답게 몰입이 대단했다. 한번 공연을 하면 땀으로 흠뻑 젖어 드레스를 짜야 할 정도였다. 위문 공연이나 극장 공연을 가릴 게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연병장이건 극장이건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동고동락하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개성이 뚜렷한 가수들이 우후죽순처럼 머리를 비집고 나오던 '백가쟁명'의 시대였지만, 누구를 눌러야 내가 스타가 된다는 무모한 욕심은 없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은 풍요로웠던 시대였다. 맘껏 풍요를 누리면서도 어린 가수 일색의 몰개성적인 노래가 판을 치는 지금 가요계의 풍토와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최희준<가수>


  • 운영자 2010.07.26 14:15

    ◆ 연예대대장 도미  

     

    잠시 해병대 시절 이야기로 시계바늘을 다시 돌리려 한다. 군 시절을 짧게 정리하려 했더니, 옛 동료들이 아쉬운 모양이다.
    글을 보고 전화하는 사람이 몇이 됐다. 제대 후 극장 공연 때면 수시로 찾아오던 동료들이다. 고생이 심한 만큼 재미도 있었던 때라 나도 추억이 새롭다. 아직도 주민등록번호를 외듯 군번 '9293744'를 술술 읊어댈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상남 훈련소'다. 메인 캠프가 있던 진해에서 완전군장을 한 채 도보로 그곳에 갔다. 지금의 창원 근처 어디였다.
    진해에서 두달을, 이곳에서 한달을 훈련했다. 막걸리가 이곳의 특산품이었다. 수통에다 막걸리를 가득 넣어 행군 중 목이 마르면 이걸로 갈증을 풀었다.
    지휘관에게 들키면 그 즉시 맨땅에 머리를 박았다. 이 훈련장에서는 침투 사격 훈련이 악명이 높았다. 낮은 포복으로 철조망을 통과한 뒤 목표지점을 향해 사격을 하는 등의 훈련이었다. 반복 또 반복. 조교는 조금이라도 성이 차지 않으면 수시로 기합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옥 훈련을 용케 빠지는 '행운'을 얻게 됐다. 마침 도미를 비롯한 연예대의 악단 멤버들과 함께 해병 홍보 영화를 찍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염치없는 일이지만, 일단 훈련을 빠지게 된 게 너무 좋았다.
    나와 도미는 칼날처럼 주름을 세운 해병대 군복을 입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봐도 폼 났다. 나는 '낙엽'을, 도미는 자신의 히트곡인 '청포도 사랑'을 불렀다. 이 홍보필름이 영화 상영 직전 '대한뉴스'로 소개된 덕에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로 촉발된 내 인기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신고합니다. 훈련병 최희준 해병대에서 열심히 복무하고 있습니다." 그 짧은 영화가 팬들에게는 확실한 신고식 구실을 한 셈이다.
    당시 해병 연예대의 '대장'은 도미였다. 나이나 가수 데뷔 경력으로나 나보다 선배였다. 본명이 오종수인 도미는 육사 2학년을 중퇴한 뒤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50년대 중반에 데뷔해 경쾌한 리듬의 '청포도 사랑'으로 이름을 날렸다.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어여쁜 아가씨여 손잡고 가잔다/그윽히 풍겨주는 포도 향기/달콤한 첫사랑의 향기/그대와 단둘이서 속삭이면/바람은 산들바람 불어준다네…."
    사실 도미는 해병 연예대가 만들어질 때 큰 역할을 했다. 우리 멤버를 구성한 게 그였다. 그런 이유에다 나이도 많아 자연스레 대장이 되었는데,그만큼 통솔력도 뛰어났다. 같은 사병이면서도 대장은 하사관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60년대 초는 가수의 세대 교체기였다. 가수로 나보다 윗세대였던 도미는 제대 후 이런 격변기의 여파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와 동시대 인물인 박경원.원방현.명국환 등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도미는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맹꽁이 타령'의 박재란,'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한명숙 등 장병 위문 공연에 찬조 출연한 단골 여성 가수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이금희다. 이씨는 폴 앵카 노래의 일인자였다.
    게다가 '키다리 미스터 김'이라는 히트곡도 있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싱겁게 키는 크지만/그래도 미스터 김은/마음씨 그만이에요…."
    노래를 시작하면 장병들은 자지러지듯 환호했다. '라이브 무대의 황녀'라는 별명답게 몰입이 대단했다. 한번 공연을 하면 땀으로 흠뻑 젖어 드레스를 짜야 할 정도였다. 위문 공연이나 극장 공연을 가릴 게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연병장이건 극장이건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동고동락하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개성이 뚜렷한 가수들이 우후죽순처럼 머리를 비집고 나오던 '백가쟁명'의 시대였지만, 누구를 눌러야 내가 스타가 된다는 무모한 욕심은 없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은 풍요로웠던 시대였다. 맘껏 풍요를 누리면서도 어린 가수 일색의 몰개성적인 노래가 판을 치는 지금 가요계의 풍토와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최희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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