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준금지 철모사진의 이명수씨

by 운영자 posted Sep 0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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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준금지.jpg
 

 

해병대지1969.jpg
해병대사령부가 1969년 12월 발행한 정훈홍보용 잡지에 게재된 이명수 장로(당시 청룡부대 하사)의 사진
 

역사 사진 속 주인공 찾기 - 정조준 금지 철모 사진의 이명수씨

‘정조준 금지’라는 글자가 적힌 철모를 쓴 병사 사진 또한 베트남전쟁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이다. 전장에 선 장병들의 소박하지만 솔직한 희망이 담긴 사진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지 서로 다른 사람이 사진 속 주인공이라며 나섰지만 ‘진짜’를 찾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당시 글자이명수.jpg가 적힌 철모 외피를 지금도 갖고 있다는 제보가 접수됐기 때문이다.

현장 확인 작업을 통해 진짜 40년 된 철모 외피를 가진 이명수(부천교회 장로·63)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장로는 광운전자공고 출신의 군장학생이었다. 이 장로는 고등학교 재학 중 군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5년 동안 군에서 의무복무하는 ‘군 국비장학생’ 제도를 통해 1965년 3월 해병대 청룡부대에 입대한다.

67년 6월 베트남에 파병된 이 장로가 철모에 정조준 금지라는 문구를 적은 사연은 독특했다. 하사 계급으로 청룡부대 1대대 3중대 통신반장으로 베트남 정글을 누비던 이 장로는 67년 9월께 바탄칸 반도를 평정하기 위한 용화작전에 투입된다.

1대대 3중대가 바탄칸 반도의 밀림 속을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도중, 상공을 정찰하던 우군 정찰기에서 후방에 적이 있다는 통보를 해 왔다. 통신반장이던 이 장로가 중대장에게 보고하는 순간 갑자기 적의 총탄이 쏟아졌다.

이 장로는 “통신반장으로 AN/PRC-25 무전기를 휴대한 탓에 베트콩의 표적이 됐다”고 말했다. 베트콩은 통신병과 지휘관을 주된 표적으로 삼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기본 공격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장로는 “베트콩이 쏜 것이 에케이(AK) 소총 소리는 아니고 비-에이-아르(BAR) 자동소총 같은데 총을 맞고 제가 2m는 날아 갔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중대장과 중대 전령도 적탄에 맞아 신음하는 가운데 땅에 처박힌 이 장로도 급하게 가슴과 배를 더듬었다. 군복에 구멍이 날 지경이었는데 피를 흘린 흔적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적탄이 혁대의 버클 부분을 맞고 튕긴 후 탄창에 맞아 힘을 잃은 덕에 군복에 구멍이 두 개나 나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곧 이 장로의 사연은 널리 알져져 중대원 전체가 기적의 사나이, 억세게 운이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장로는 “중대장님이 적 총탄에 뚫린 군복은 기적의 증거품이라도 본국의 집으로 보내주셨어요”라며 당시 군복을 기자에게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자기 구멍 뚫린 군복을 소포로 받아든 어머님이 아들이 전사한 줄 착각해 놀라 쓰러지기도 했다”는 것이 이 장로의 회고담이다.

총격 사건 이후 이 장로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철모에 소망을 적기 시작했다. 철모에 적힌 ‘정조준 금지구역’도 그렇게 해서 나온 단어다. 원칙적으로 군장에 글자를 적는 행동은 용인되지 않지만 위장을 하면 표도 나지 않는 데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부하를 배려해 준 중대장 덕에 온갖 소원이 적힌 철모를 계속 쓸 수 있었다. 철모에 적힌 ‘울산큰애기’가 누구냐고 묻자 “당시 좋아했던 여자친구”라며 멋적게 웃던 이 장로는 “결혼까지는 운이 닿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널리 소개된 사진에 대해 이 장로는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공세 당시 호이안에서 작전을 벌이던 중 한국 종군기자가 특이한 철모를 보고 촬영한 것”이라고 했다. 적 총격에도 카메라부터 안전한 곳에 숨기던 종군기자의 근성이 지금도 기억난다는 것이 이 장로의 회고다.

이 장로가 기억하는 베트남은 ‘만날 싸움이 연속되고, 끝없는 매복이 계속되는 전장’이다. “상황이 걸리지 않으면 마치 소풍나온 듯한 느낌이 들다가도 순식간에 전쟁터로 바뀌는 것이 베트남”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장로는 “베트남 전쟁터를 누비면서도 훌륭한 지휘관과 동료들이 많아 가슴 든든했다”고 기억했다.

특히 중대장이었던 김영상 대위, 소대장이었던 김도삼 중위는 부상하고도 치료가 끝나면 주저없이 부대로 복귀한 용감한 지휘관이었다고 이 장로는 회고했다. 작전 중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동료 권동일 작전하사도 잊을 수 없는 전우였다고 했다. 유지조 병장처럼 람보같이 용감한 병사도 있었다는 것이 이 장로의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이 장로 또한 베트남 참전 전공으로 68년 7월 5일 인헌무공훈장을 수훈했다.

한때 군교회에서 간증활동도 자주 했던 이 장로는 지금 군 복무 중인 후배 장병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가 아직 분단국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싸워야 하는 것이 장병들의 몫입니다. 장병 여러분이 맡은 바 역할을 다하면 그 어떤 적도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국방일보 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