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59주년 | 두 노병의 증언
이성호 전 해군참모총장과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지난달 27일 80대 중반의 노구를 끌고 경남 진해를 찾았다.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리는 손원일 제독 탄생 100주년 기념일(5월 28일) 행사를 위해서다. 진해 앞바다에 초승달이 걸린 이날 밤 두 사람은 생도사에서 60년도 더 차이 나는 후배들과 얘기꽃을 피웠다. 최대 3주간 수중작전이 가능한 첨단 잠수함인 손원일함도 둘러봤다.
공 사령관은 그날 85년 인생을 살아온 보람을 느꼈다. “지금과 그때의 해군은 정말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당시 나와 동기생들은 죽 먹고 배고파가며 생활을 했습니다. 주린 배를 참지 못한 생도들이 취사반을 습격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죠. 그렇게 1년2개월 만에 교육을 끝내고 임관했습니다. 그리고 3년 뒤 6·25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우리가 6·25를 치르고 밑바탕이 됐기 때문에 우리 후배들이 이런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감개무량했습니다.”
두 사람은 대한민국 해군 창군 원로다. 일제 때 진해고등해원양성소(한국해양대의 전신)를 나온 이 전 총장은 1946년 해군사관학교(당시 해군병학교) 초대 교관으로 해군에 뛰어들었다. 공 전 사령관은 해사 1기생으로, 47년 임관했다. 대한민국 해군이 정식 출범(48년 9월 5일)하기 전 해방병단(海防兵團) 시절의 일이다.
인천상륙 직전엔 영흥도 첩보활동
이성호· 공정식씨는 6·25 전쟁의 분수령이 된 인천상륙작전(50년 9월 15일)에 참가했다. 전투함 703을 이끈 이 전 총장(당시 중령)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첩보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영흥도 등 인천 앞바다에서 작전을 펼쳤다.
당시 미군과 국군은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한 뒤 이곳을 바탕으로 인천·서울 등 내륙지역의 정보를 모았다. “7월 초였어요. 인천 해안까지 들어갔다가 북한군의 해안포 사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영흥도에서 당시 북한군과 연합군 간에 뺏고 뺏기는 교전을 벌였습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다. 이 중령은 704 함장으로, 공 소령은 704 부함장으로 해병대 상륙 작전을 지원했다. 공 전 사령관은 그날의 장면을 사진처럼 기억했다. “ 당시 우리 701, 702 ,703, 704함정은 인천 바로 앞인 월미도 앞바다까지 들어가 근접 지원사격을 했습니다. 서쪽을 바라보니 덕적도 앞바다에 맥아더가 탄 기함 마운트 매킨리를 비롯해 연합군 함정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어요.”
상륙작전에는 우리 해병대 2700여 명이 최전방에서 나가 돌격했다. 우리 해군의 총수였던 손원일 해군참모총장도 “함대에 남으라”는 맥아더의 지시를 묵살하고, 해병대와 함께 총을 들고 뭍으로 올랐다. 인천과 수도 서울의 수복은 그렇게 이뤄졌다.
타고가던 지프 지뢰 밟아 부상도
50년 12월 1일 공 소령은 704 부함장에서 해병대 대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통영상륙작전에서 인연을 맺은 김성은 해병대 참모장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중동부 전선의 요지인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부상도 입었다. 지프가 대전차 지뢰를 밟은 탓이다. 동행한 전령이 숨지는 등 피해가 컸다. 다행히 공 소령은 파편으로 엉덩이에 상처를 입는 데 그쳤지만 당시 후유증으로 오른쪽 귀의 청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 전 사령관은 요즘도 60년 전 그때 꿈을 자주 꾼다. “내가 20대의 젊은 해병대 대대장이 돼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뚫고 달리는 거예요. 귀 옆으로 ‘쉭-’ 총탄이 지나가는 소리도 들어요.”
내륙의 서부전선보다 북쪽으로 한참 올라와 있는 서해 5도 위쪽까지 북방한계선(NLL)이 그어진 것도 해병대의 공이었다. 해병대는 섬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북한의 원산·청진 앞바다까지 점령해두었다. 하지만 이들 섬은 휴전협정 때 “너무 위쪽에 있다”는 이유로 남한 영토에서 제외됐다.
이 전 총장은 서해 5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북한과 국지전이 벌어진다면, 침공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서해 5도라고 했다.
“북한은 제일 먼저 서해 5도를 칠 것입니다. 수도 서울을 침공하는 가장 쉬운 길이 서해 5도입니다. 내륙의 서부전선은 우리 측 군부대가 너무 많아 침공이 어렵지만 바다는 특성상 그렇지 못합니다. 서해 5도가 북에 넘어가면 서울의 옆구리가 떨어지는 겁니다. 인천공항도 인천시도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평해전, 씁쓸한 기억
이 전 총장은 2002년 6명의 우리 해군이 목숨을 잃은 2차 연평해전 뒤 씁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성남 통합병원 장례식에 가서 놀랐습니다. 대통령도 장관도 오지 않았습니다. 쉬쉬하면서 장례식을 치렀죠. 나라 위해 목숨을 건 우리를 소모품 정도로 생각한 거죠.”
공 전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홀대해 온 역대 정부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얼마 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프랑스 북부의 미군 전사자 묘역을 찾아 화제가 됐는데, 우리는 지금껏 대통령은 물론 총리도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 참석한 적이 없어요.”
2010.05.18 02:17
서해 5도를 지켜낸건 해병대의 공
조회 수 3279 추천 수 0 댓글 0
TAG •
- 서해5도,
-
해병대는 원래부터 국가전략기동부대 였다
지난달 23일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한 대응으로 해병대를 국가전략기동부대로 육성하겠다는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의 언급에 대해 해병대 전역자들의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해병대 전역자들은 “해병대는 원래 국가전략기동부대였다.”면서 “이 사실은 해병대 나온 사람만 알고 있는 것이냐”고 반문하고 있다. 실제... -
북도발 좌시해서는 안돼...공지기동 해병대 건설해야!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 지난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북한은 연평도 지역에 대한 무차별 해안포 사격으로 해병대에 대한 도발을 감행했다. 수백발의 포탄이 연평도에 떨어졌고 연평도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연평도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 중이던 해병대 고(故) 서정우 하사와 고(故) 문광욱 일병은 북한의 무... -
서정우,문광욱해병의 묘소를 찾아.....
후배해병을 잃은 슬픔과 그들의 명복을 비는 마음을 기사로라도 대신하고자 지난 11월30일 서정우하사와 문광욱일병의 묘소를 찾아 대전국립현충원에 다녀왔습니다. 자세한 기사는 아래 링크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정우하사,문광욱일병을 묘소를 다녀왔습니다. http://demaclub.tistory.com/271 11월 30일 오전에 다... -
해병대를 이끌어가는 힘! 장교가 되는 길
어느 덧 사관후보생 110기를 모집하는 시즌이 다가왔다. 해병대 장교의 매력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선배장교이자 동시에 후배 장교 모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령부 인력획득과의 박진호 대위를 만나보았다. 병 군 복무기간이 예전에 비해 많이 단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장교의 길을 선택하는 이... -
해병대정신
해병대 정신의 상징은 젊음이다. 그것은 잘 다듬어진 젊은 남성의 육체가 주는 강력한 파워다. 그러나 힘은 육체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 만들어 내는젊은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것을 말한다. 글 변화경영연구소 소장 구본형 여름은 무성하다. 나는 늘 여름이면 제자들과 아름다운 여행을 한다. 가고 싶은 사... -
나라를 구한 섬사람들 제주해병 3,4기
지난 9월 1일. 제주도 동문 로터리 일대에서 ‘해병대 주둔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다. 60년 전 해병대 사령부가 주둔했음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해병대는 1949년 12월 28일 제주도로 이동하여 한라산의 공비를 토벌하고 4·3사건으로 피폐된 제주도의 민심을 수습하는데 전력투구한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 -
골수기증으로 한 생명을 살린 김성관소령을 만나다.
“누구나 약속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이 남긴 말이다. 우리는 타인, 또는 자기 자신과 무수히 많은 약속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많은 약 속들 중 상당수는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도 사실이다. 골수 기증은 적혈구, ... -
연평도의 K9자주포 해병대가 늦장대응이라고???
연평도에서 13분 걸렸다. 평시가 아닌 전시에서. 한대에 40억하는... 정말 그런 몸값을 하는 자주포를 6대 연평도에 배치했다.(한부대가 6대) 나는 155밀리 견인곡사포를 상병떄까지 하고 군단급이라 포가 자주포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덕분에 상병떄 분대장달고 다시 공부했다. 결국 전역할떄까지 K9과 살았다. 포병은 T0T... -
빗발치는 포격속에서 빛난 해병대의 뜨거운 전우애
중화기 중대 김지용 상병은 다른 해병들과 함께 북한군의 포격간 마을 주민을 대피시키고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부대로 복귀했다. 하지만 곧 2차 폭격이 시작되었고, 중대건물에 포격이 시작되며 파편으로 인해 목 파편상을 입었다. 하지만 중대 관측담당관인 김종선 상사가 김상병의 목을 지혈하고 "너는 내가 반드시 살린... -
No Image
해병대는 줄이고 자주포는 늘려야 하는데 (예비역 육군중사)
게시글출처 : 다음 아고라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228274 해병대 감축안을 폐지하고 현행대로 유지한다는 언론 뉴스를 보고 한마디 합니다. 서해5도 다시말하면 해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백령도,연평도에 가장 필요한것은 적의 공격을 가장 효과적 으로 방어할수있는... -
No Image
이대로 있어야만 합니까?
해병대출신 홍사덕의원은 "해병은 공매 맞는 군대 아냐..몇배 보복토록 내버려뒀어야" 하다는 발언처럼 즉시 대응했어야 하고 더이상으로 보복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3분만에 대응사격도....즉시 대응할 수 있었던 우리 해병들이 아마 보고체계때문에 늦어졌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13분이라는 긴시간동안 우리 ... -
해병6기 이승만교수의 역경의 열매
역경의열매 이승만 (11) 성경 읽으며 해병대 혹독한 훈련 견뎌 / 국민일보 [2010.11.11 17:55] 서울에서 방위군으로 자원입대한 후 18일간 사선을 넘나든 끝에 훈련소인 진해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 도착했다. 1951년 1월이었다. 그곳에서 해병대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훈련은 제일 세고 가장 치열한 전투에 ... -
허정무 감독에게 해병대란?
올 해 여름.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의 기쁨을 국민에게 안겨준 국가대표팀의 선봉에는 허정무 감독이 있었다. 이제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돌아온 허정무 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은 문학 경기장. 문을 열어주는 허정무 감독은 빨간 명찰을 달고 있는 취재팀을 너무나 반갑... -
작지만 강한 해병’ 새 슬로건에 동의하십니까
<사진 국방일보 11월 3일자 6면 하단광고> 해병대 재창설 23주년 맞아 공식 발표 해병대는 1일 재창설 23주년을 맞아 대표 표어(슬로건)로 ‘작지만 강한 해병대’를, 핵심 가치로 ‘충성’ ‘명예’ ‘도전’을 선정하고 선포식을 했다. 1949년 4월 15일 창설된 해병대는 73년 해군에 편입됐다가 87년 11월 1일 재창설됐다. 그러나 ... -
해병대축구단에서 복무한 허정무 감독
“정신만 똑바로 서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 / 국방일보 2010.10.01 허정무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30일 국군의 날 축하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정의훈 기자 ▲전남 진도(1955년생) ▲영등포공고 ▲연세대 학사·수원대 석사 ▲국가대표(74~86년·멕시코 월드컵 대표) ▲해병대 축구단 군 복무(78~80년)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