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첫 여군의무부사관

by 운영자 posted Jun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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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첫 여군의무부사관으로서의 자부심 - 2사단 하사 김예나

 

군인에대한동경심
‘넌, 편하게 간호사나 하지, 힘들게 군대 왜 왔냐?’내가 군대 와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다. 아니 나뿐만이hbcom_625_065.jpg

아니고 여군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말일 것이다. 가장 강한 쇠는 가장 뜨거운 불에서 만들어진 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군인에 매료된 것도 강해보여서, 나의 한계에 도전해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고교시절 학교로 찾아온 제복입은 선배를 보고서 참 멋있다는 생각과 함께 여군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생겼었다. 내 주위에 군인이 흔하지 않다보니 여군은 간호장교만 있다고 생각을 했고, 나름 간호사관학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간호사관학교를 없앤다는 얘기와 함께 신입생을 뽑지 않는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꿈은 가슴 속에 잠이든 채, 집에서 원하는 간호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평범한(?) 간호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똑같은 일상이 싫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길 좋아하는 나의 성격 덕분에 사회에서 첫 발은 응급실에서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 수술실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바쁜 현실 속에 나의 어릴 적 꿈은 저 멀리 기억속 끝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웹서핑 도중 부사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거다!’라는 생각과 함께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너무 군인이 되고 싶다고. 제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라고… (그때 당시1,000명이나 되는 직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산업간호사의 길을 걸은 지 6개월이 채 안 되는 시기였다)”‘이 편한 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힘들고 어렵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것인지?’짧은 고민 끝에 두 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4년여 동안의 직장생활 속에서도 늘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공허함 속에 살았던 내가 삶의 활력소를 찾은 것이었다. 부모님께도 내 생각과 비전을 얘기하며 설득한 끝에 허락을 받아내었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독립운동가의외손녀답게
그러나 너무 자만했던가, 너무 기대를 했었던가.
최종 합격자 명단에 내가 없었다. 부모님께 죄송하고 내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을 했다. 그러나‘엇쭈,나를 떨어뜨려? 어디 붙을 때까지 한번 해보자.’라는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또 준비하면서 정신과 병원에서도 10개월을 근무하였고, 여러 가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 준비 기간 동안 외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개명을 하셔서 10년이넘는 동안 보훈처에서 못 찾았다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 때문인지 가족뿐만이 아니고 친척분들까지 나를 적극 응원해주셨다.
2년을 기다렸던 결과였기에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뻤고, 외할아버지께도 정말 부끄럽지 않는 멋진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합격 발표 15일 후 입대를 했고, 2년간의 마음의 준비로 단단해진 나는 그저 즐겁기만 할 뿐이었다.
부사관 교육대대의 첫날 밤, 혹시나 꿈일까, 꿈에서 깨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도 너무 좋았고, 남들보다 강인한 체력은 아니었지만 한 번의 열외 없이 9주간의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500여명 정도 되는 동기생들 중 화려한(?) 사회 경력 덕분에 국방일보에 화제의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

 

해병대로발탁(?)되다
임관하기 며칠 전 소대장님께서 의무 여군만을 야간비상훈련에 소집하셨다.
의무여군 5명을 불러놓으시고“여기 있는 여군 중에 2~3명은 해병대로 갈 수도 있다. 나약한 정신 상태로는 해병대hbcom_625_066.jpg로 갈 수가 없다.”며 큰소리를 치시는 것이었다. 잠결에 비몽사몽으로 소대장님의 훈시를 들으며‘설마 나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2007년의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꿈같은 임관휴가를 즐기고 있는데, 난데없이 동기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우리 인사명령 났대. 그런데 언니만 해병대야~”동기생 중에 제일 연장자(?)였던 나에게는 거짓말같은 소식이었다. 암울하게 임관 휴가를 보내고 부사관 교육대대로 복귀하였고, 소대장님과 교관들의 격려를 받으며 그렇게 부사관 교육대대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해병대 2사단 의무근무대로 전입을 오면서 여러가지 많은 생각들이 나를 감쌌다. ‘동기도 없고, 그렇다고 여군 선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이제 나 혼자인데 잘해낼 수 있을까?’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간호사)선생님이 아닌 여군의무하사로서의 첫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멋진의무부사관의꿈을위해
한 달간의 짧은 해병대 생활과 군의학교의 입교.한 달만에 만난 동기생들과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점점 해병대에 근무한다는 게 자랑스러워지고,우쭐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교육을 마치고 맡게된 업무는 다름 아닌 정보 업무였다.
조금 생소한 업무였지만 내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호기심 많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볼수 있고 해병대를 알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해군 병사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해군으로서의 부드러움과 해병대만의 강인한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며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것을 겸비한 내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비록 해군 의무부사관으로서는 처음 해병 2사단에 전입왔지만, “해병대와 해군은 하나다”라는 슬로건 앞에 서 있는 내가 마지막이 아니기에‘내가 이자리를 잘 닦아 놔야 겠구나!’라고 생각을 했고, 의무 부사관의 최고 선임이신 행정관님도“네가 2사단 의무 여군 부사관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서로 다른 비전을 꿈꾸지만 그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군대라는 길을 선택한 여군들인 만큼 지금은 힘들겠지만, 연단의 과정을 통해 멋진 조각품이 탄생되듯 현재의 자신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키워 먼 훗날 전국 각지 서로 다른 곳에서 리더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멋쟁이들이 되길 소망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주목을 받고 군 생활을 시작한만큼 나의 직별(주특기)과 전문성을 살려 최초의 최초를 달리며 언제 어디서나 해군과 해병대 군 의무발전을 위해서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멋진 여군 부사관이 되겠다고 오늘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