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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다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장인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일어난 「文世光(문세광) 사건」이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긴 것은 陸英修(육영수) 여사의 죽음이다. 陸여사의 죽음과 함께 국민들이 기억하는 사진이 한 장 있다. 총격이 나자마자 단상으로 뛰어올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연단 앞에서 총성이 난 방향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는 젊은 경호원의 모습이다. 목숨을 건 「총알받이」로서의 「본능적 임무」가 국민들에게는 「멋진 모습」으로 비쳐졌을 이 용감한 경호원이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시절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을 지낸 朴相範(박상범·62) 前 보훈처장이다.
 
  朴相範 前 경호실장에게는 「死線(사선)의 불사조」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경호업무를 하면서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다. 10·26 사건 때는 朴대통령을 시해한 金載圭(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총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호원이었고, 1983년에 발생한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 때도 간발의 차이로 폭파 현장에서 비켜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1981년의 全斗煥(전두환) 前 대통령의 訪美(방미)를 앞두고 사전에 현장조사를 갔다가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는 등 朴 前 실장은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할 말은 해야겠다』
 
  朴 前 실장이 1998년 3월 보훈처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 많은 언론들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무용담」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경호원으로서 朴 前 실장이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역대 대통령 5명과 관련된 秘話(비화)를 듣고 싶어서였다.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력과 관련해서 朴 前 실장이 인터뷰를 한 것은 문민정부 경호실장 취임 직후에 가진 공식 인터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언론을 극구 피하던 朴相範 前 경호실장이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 응했다. 이유는 『할 말은 해야겠다』였다. 최근 「과거사진상규명」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文世光 사건 등에 대한 일부 언론의 보도태도에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우리는 4월13일과 5월13일, 이렇게 정확히 한 달 간격을 두고 서울 방배동에 있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장학회」 사무실에서 두 차례 만났다. 현재 그의 직책은 민주평화통일 장학회의 이사장이다. 朴 前 실장이 중간에 가족들과 함께 장기간 태국으로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에 두 만남 사이의 간격은 길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에서의 화제는 金炯旭(김형욱) 前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최근 한 시사주간지가 金炯旭 前 중앙정보부장을 프랑스에서 직접 살해했다는 특수공작원의 증언을 게재했는데, 그 특수공작원의 증언 중 朴正熙 前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불러서 술을 주었다고 하던데요.
  朴 前 실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웃기는 얘기예요. 대통령이 공작원을 청와대로 불러서 술을 준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金炯旭을 파리에서 납치해 와서 車智澈(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이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역시 웃기는 얘기죠. 청와대 어디에 車智澈 실장이 金炯旭 부장을 권총으로 처형할 장소가 있겠습니까』
  
 무술 고수
 
  朴相範 前 실장은 유도·합기도 등 무술의 고수다.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인들 앞에서 무술 시범을 보여 주기도 했고, 일본 NHK에 출연해 무술 시범을 보여 주기도 했다.
 
  ―무술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중학교 때부터 했어요. 제가 다닌 성남중고등학교는 유도와 검도를 정규시간에 넣어 가르쳤어요. 저는 유도를 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하다가 합기도를 했어요. 해보니까 합기도가 제 체질에 맞더라구요』
 
  ―그 외 다른 무술은 안 하셨습니까.
 
  『조금씩 다 했죠. 복싱도 하고, 펜싱도 해보고, 검도는 안 했어요』
 
  ―지금까지 하신 무술의 단수를 다 합하면 총 몇 단입니까.
 
  『합기도가 7단이고… 다 합치면 10단은 넘겠죠. 저는 무술을 정말 취미로 좋아서 했어요. 다른 무술들이 있으면 관심도 많았고』
 
  무술의 고수인 朴 前 실장을 두고 앉은 상태에서 몸을 공중으로 띄우는 공중부양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공중부양이라는 게 가능합니까.
 
  『그게 기공·내공의 하나고, 어떻게 보면 무술의 한 분야인데 웬만큼 노력해서는 힘들어요. 정말 피나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런 걸 하려면 닭 소리도 안 들리고 개 소리도 안 들리는 곳에서 수련해야 되고, 담배도 피우지 말아야 되고, 여자관계도 하지 말아야 돼요.
 
  100일간 수련을 해야 하는데 현대생활 속에서 과연 그런 데가 있겠습니까. 아침에 해가 뜰 때 태양에서 나오는 氣를 흡수하기 위해 앉아서 정좌법을 해야 되고, 또 정오에 해야 되고, 해가 서산에 질 때 해야 되고 그걸 하루에 세 번씩 해야 되는데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죠』
 
  ―시도를 하신 적은 있습니까.
 
  『軍에 입대하기 전 한 6개월 동안 산에 들어가서 수련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거 오래하면 정신이 약간 이상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공중부양 경험이 있으십니까.
 
  『앉아서 공중으로 뜨는 것이라기보다 내가 이런 데(자신이 앉아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이렇게 앉아 있는 자세에서 (앉은 자리에서 탁자 건너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저곳으로 뛰어 넘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죠』
 
  ―지금도 하실 수 있습니까.
 
  『지금은 못 해요(웃음)』
 
  朴 前 실장 본인은 부인하지만 車智澈 경호실장 시절 그는 경호실 내에서 최고의 무술 고수로 평가받았다. 車경호실장 시절의 에피소드다.
 
  車智澈 실장은 경호원들의 무술 실력을 중요시했다. 1977년에는 경호원들의 무술연습장인 연무관을 준공하기도 했다. 한번은 朴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시범을 보인 통일교 산하 무술 단체에 소속해 있는 안 모씨의 무술 실력을 칭찬했다. 車실장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당시 경호관이었던 朴相範 실장과 안 모씨의 실전 대련을 시키려고 했다. 한쪽이 완전히 쓰러져야 끝나는 글자그대로 실전 대련이었다.
 
  ―대련은 안 이루어졌죠.
 
  『그 당시가 全斗煥 前 대통령이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를 겸하고 있었을 때로 기억되는데, 경호실은 경호실대로 자존심이 있으니까 저보고 대련을 하라고 하더라구요. 매일 운동은 해오고 있었지만 보름간 집에 와서도 훈련을 하며 준비를 했어요.
 
  상대도 내가 아는 사람이었구요. 그런데 대통령하고 가족들과 비서실 등 참모진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꼭 피를 보여야 하느냐는 의견이 나와서 대련은 안 됐어요. 그 사람도 무술 시범만 보이고 저도 무술 시범만 보이고 말았죠』
 
  ―통일교 산하 무술 단체가 보인 시범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차돌도 깨고 아주 거창해요. 차력도 하고… 사실 대련이라는 게 무술만 가지고는 안 돼요. 경험이 많아야 돼요. 기술만 가지고는 안 돼요』
 
  ―많이 싸워 보셨습니까.
 
  『(웃음) 원래 성격이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부모님 걱정할까 봐 말도 않고 월남전 참전
 
  朴 前 실장은 고려大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대학 졸업 후 해병대에 장교로 입대해 5년간 복무 후 대위로 제대했다. 원래 의무 복무 기간은 3년이었는데 軍에 복무하고 있는 동안 2년이 더 늘었다.
 
  ―해병대 복무 당시 월남전에도 참전하셨던데요.
 
  『1967년에 월남에 갔어요. 1965년 10월에 청룡부대 제1차 월남파병이 있었는데 지원을 했지만 그때는 안 됐어요. 포항에서 의장대장을 했었는데 안 보내 주더군요. 의장대는 행사가 많잖아요? 세 번째인가 지원을 하니까 받아들였어요. 월남전 교육을 3개월 받고 청룡부대로 파견됐죠. 청룡부대 제5대대 106미리 소대장으로 갔어요. 소대장을 이미 마쳤지만 해병대 장교가 얼마 안 되니까 다시 소대장을 한 거죠』
 
  ―위험한 전쟁터인데 월남은 왜 가시려고 했습니까.
 
  『20代 때니까 그때 생각은 그래도 내가 軍에 들어와서 소대장도 마치고, 의장대장으로 있었는데 전쟁이 도대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관심이 생기더라구요. 기왕이면 군복을 입었으니까 한번 가보자, 해가지고 간 겁니다』
 
  朴相範 실장의 고향은 충북 옥천으로 알려져 있다. 친척들이 옥천에 살고 있고 6·25 때 피란 가서 1년 정도 산 적은 있지만 엄밀히 말해 옥천이 朴실장의 고향은 아니다. 1943년생인 朴실장은 서울 광화문통 1번지에서 자영업을 한 부친 박기현(1987년 작고)씨와 모친 이화자(2004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외동아들이 월남전에 참전하겠다고 할 때 어머니는 만류하지 않으셨습니까.
 
  『집에 알리지도 않고 월남전에 참전했어요. 걱정할까 봐 그랬죠. 월남에 간 후 얼마 있다가 집에 편지를 썼죠. 어머니께서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고 해요』
 
  ―경호원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알리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남자로서 한 번 해볼 만한 직업이다」고 했어요. 어머니께서도 동의하셨구요. 경호원 생활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없지 않았지만 부모님께서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셨어요. 사실 중간에 그만둘 처지도 못 되었구요』
  
  
朴鐘圭 실장과의 인연
 
  ―대통령 경호실 공채 1기시죠.
 
  『네, 1969년도 말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고 1970년부터 청와대에 근무를 했죠』
 
  ―朴鐘圭(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경호실 근무를 권유했다고 하던데 朴실장과는 사적인 인연이 있었습니까.
 
  『사적인 인연은 없어요. 월남에서 대위로 돌아와서 제가 진해에 있는 지휘참모대학에서 본부 중대장을 했어요. 그 당시 朴대통령께서 진해에 내려오시면 「해군통제부 사령부」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쉬셨어요. 그때가 1969년 4월로 기억되는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참석차 朴대통령이 오셨을 때 제가 병력을 데리고 외곽경비를 맡게 됐어요. 가서 브리핑도 해야 되고 하다 보니까 그때 朴鐘圭 실장을 처음 만났어요』
 
  ―그때 朴실장 마음에 들었나 보군요.
 
  『그건 잘 모르겠고, 軍에서 제대한 후 공부를 하려고 절에 들어갔는데 청와대 경호실에서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찾나」 하는 생각으로 갔더니 시험을 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때만 해도 경호실장은 무섭잖아요.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시험을 봤어요. 합격했다고 통보가 왔더라구요. 대학도 졸업했고, 장교생활도 했고, 무술도 제법 하고 그러니까 뽑았던 것 같아요』
 
  ―朴鐘圭 실장은 朴실장님이 무술도 하고 그러는 걸 알았나 보죠.
 
  『누구한테 들은 거죠. 그 당시 진해에서 외곽경비 하고, 브리핑 하고 그럴 때 뭔가 느낌이 있으셨는지 물어봤던 모양이에요. 밑에 사람들 시켜서 제가 아직 軍에 있는지 확인해 보다가 제대했다니까 수소문해서 연락이 온 거죠』
 
  ―공채 1기는 몇 명 뽑았습니까.
 
  『20명 정도 될 겁니다』
 
  ―제대 후 절에 가 계실 때도 무술 수련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때는 공부를 하려고 했어요. 생각이 두 가지였는데 「다시 한 번 고시에 도전을 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취직 공부를 할 것이냐」 하는 고민을 하다가 「일단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하자」, 해서 들어갔던 거죠』
 
  ―고시를 포기한 일을 지금 후회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남들 열심히 공부할 때 열심히 운동했기 때문에. 사실은 경호원이라는 특수한 직업을 가지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지나놓고 보니까 팔자라고 그럽니까, 운명이라고 그럽니까, 그런 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은퇴하고 나니까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기 인생행로가 결정돼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朴相範 前 경호실장이 태국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5월13일 다시 만났을 때 긴 여행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첫 만남 때도 그랬지만 朴실장은 노타이 차림이었다. 그에게는 그게 편한 것 같았고 기자에게도 편해 보였다.
 
  朴실장은 인터뷰 내내 시종 차분했다. 가끔 경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권총을 뽑아드는 자세를 취할 때를 빼고는 큰 움직임도 없었다. 술을 먹지 않기 위해 5년 전부터는 가급적 저녁 약속을 안 할 정도로 건강을 생각하지만 담배는 끊지 못했다.
 
  ―담배는 하루에 몇 갑 피우십니까.
 
  『평균 한 갑 피워요. 경호실에 있을 때는 항상 초조하니까 하루 두 갑을 피웠어요. 경호실을 떠나고 나서 줄였어요』
 
  ―운동은 지금도 매일 하십니까.
 
  『지금도 하루 평균 1시간 30분 동안 매일 해요. 헬스클럽 같은 데는 나가지 않고 집에다 운동기구를 갖춰 놓고 하고 있어요. 운동을 안 하면 몸이 이상해요. 기분 나쁘면 샌드백을 두들기기도 하구요(웃음). 보통 나이가 들면 골프 비거리가 줄어들게 마련인데 저는 지금도 비거리가 250~260야드 나가요. 어떤 때는 더 나가기도 하구요(웃음)』
 
  朴 前 실장과의 대화는 경호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픈 기억이시겠지만, 대통령 경호실에서 지금까지 실패한 경호 사례를 꼽으라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차분하던 朴실장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가 이내 특유의 자세로 돌아왔다.
 
  『1974년 문세광 사건이 그 첫째고, 둘째가 아웅산 사건, 세 번째가 10·26 사건이죠. 이 세 사건이 대통령 경호실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죠』
  
  
 文世光 사건 조사결과에 의혹은 없다
 
  ―文世光 사건은 최근 들어 경호요원이 陸여사를 권총으로 쐈다는 등 사건의 진상을 놓고 의혹이 많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그 당시 합동조사단장이 김기춘씨고 문공부 장관 했던 김영수씨가 담당 검사였는데, 그때 합동 조사단에서 몇 개월에 걸쳐서 조사했던 게 가장 정확한 거예요. 陸여사를 경호원이 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예요. 나한테도 몇 번씩 방송사 등에서 찾아왔는데 일단 그런 의혹을 전제로 해서 들여다보면 해결이 안 돼요』
 
  ―朴대통령에 대한 흠집내기라는 의도가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리기가 그렇습니다. 아무튼 제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조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분명하게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실탄의 흔적이 다 남아 있다. 실탄은 탄도가 정해져 있고 탄도의 방향, 근무자의 위치, 이런 게 나오면 정확하게 파악이 되는데 왜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다 수긍을 해요』
 
  ―그때 유명한 사진이 朴실장께서 朴대통령 연단 앞에서 총을 뽑아서 겨누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테러리스트가 앞에서 총을 쏘면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쏘면 맞을 수밖에 없죠. 평상시에 그런 훈련들을 많이 합니다. 사람은 생존본능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땅」 하고(총 쏘는 흉내를 내며) 총소리가 나면 엎드리게 돼 있죠. 그건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게 돼 있어요. 그 당시 단상에 앉아 있던 요인들이 전부 몸을 밑으로 숙였다고 그 이후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본능이에요. 다만 경호원들은 평상시에 그런 훈련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들끼리는 「총알받이」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경호원은 기본적으로 공격이 아니고 방어거든요. 그리고 1차 공격을 받은 다음에야 액션이 취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땅」 하고 발사가 되면 그때는 자기가 보호해야 될 被경호원을 위해서 자기 몸으로 아주 크게 타깃을 만들어 주는 그런 훈련을 하죠』
 
  ―결국 대통령 경호실의 훈련이라는 게 대통령을 위해서 대신 총을 맞는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네요.
 
  『그렇죠. 소위 얘기하는 근접경호를 담당하는 경호원이 할 일이 그겁니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훈련 과정을 통해서 그런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아, 내가 막아야지」 하고 생각한 후 움직인다? 천만에요. 0.75초 만에 총탄이 한 발씩 막 나가는데 생각하고 액션이 취해지면 이미 늦는 거죠.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죠』
 
  ―총을 뽑아서 발사할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몇 초입니까.
 
  『평균적으로 0.75초 정도죠』
 
  ―10·26 때 사망한 청와대 경호실 안재송 부처장은 0.7초 걸린다고 하던데요.
 
  『그분은 원래 사격 선수 출신이에요』
 
  ―朴실장님하고 비교해서 누가 더 빨랐습니까.
 
  『일반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격 선수들은 목표물을 보고 정해져 있는 시간 내에 빨리 뽑는 게 아니라 조준을 해서 명중을 시키는 거고, 경호원들이 총을 쏘는 것은 無조준 사격입니다. 조준을 할 시간이 없어요. 無조준 사격 연습을 많이 하죠. 빨리 제압을 해야 되니까. 그 차이가 있죠』
 
  10·26 당시 朴正熙 대통령을 수행해 중앙정보부 安家(안가)에 갔던 車智澈 실장 등 경호실 요원 6명 중 생존자는 朴相範 前 실장뿐이다.
  
  『나는 실패한 경호원이다』
 
  ―10·26 때 총을 허벅지에 빗맞고 살아나셨는데, 평소 朴실장님을 잘 따르던 中情(중정) 후배가 총을 스치게 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저는 모르죠. 나중에 다 조사를 했으니까. 조사관들 입을 통해서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 거기에서 근무하던 中情 요원들이 고생 많이 하죠. 저는 인간적으로 항상 대해 주고 그랬어요. 이런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경호실장 된 후에도 순경한테 반말해 본 적이 없어요. 직원들한테도 항상 그런 교육을 했고….
 
  계획을 세워서 업무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게 있으면 끝까지 파고들더라도 항상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을 존중해 주었다고 생각해요. 경호실에 오래 근무하면서 청소하시는 분한테도 반말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사건을 겪고 나면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겠죠.
 
  『어이구! 물론이죠. 사표도 제출하고, 악몽에도 시달렸어요』
 
  ―「동료들은 죽었고 나만 살았다」는 자괴감도 크셨겠습니다.
 
  『아, 그럼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그랬고…. 제게는 너무나 아픈 기억이기 때문에 누가 그 이야기를 꺼내면 하지 말라고 그래요. 그 이후에 저는 신임 직원들을 교육하고 그럴 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당신들이 볼 때는 내가 아주 성공한 경호원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난 실패한 경호원이다. 여러분들은 나같이 실패한 경호원은 되지 마라. 어찌됐든 영부인을 떠나게 했고, 내가 보호해야 할 대통령을 보호 못 했기 때문에 나는 실패한 경호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항상 기회 있을 때마다 했어요』
 
  ―車智澈 실장은 왜 그때 권총을 안 차고 있었던 겁니까.
 
  『그건 제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판단이죠. 무기를 휴대하지 않아도 될 그런 자리라고 판단했을 거고, 또 그런 사람들만 모였고, 그래서 그랬을 거예요』
 
  ―측근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危害(위해) 요인이 없다고 판단을 했던 거군요.
 
  『저는 항상 그 사건을 얘기할 때마다 특별히 경호실이나 경호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 이후에 교육을 많이 했어요.
 
  「경호역량이 미치지 않는 부분을 최소화시켜라. 그게 관건이다. 이 사람은 대통령 친척이니까, 이 사람은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이니까 예외다,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 그런 경호역량이 미치지 않는 부분은 최소화시켜야만 우리가 겪었던 그런 일을 겪지 않게 된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를 했어요』

 

15.jpg

 

경호실은 全대통령 미얀마 방문 반대
 
  ―1983년 10월에 발생한 아웅산 사건 때 경호실과 안기부는 미얀마에 북한 공작원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이유로 全斗煥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을 반대했는데, 외무부의 非동맹외교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에 밀려 방문을 하게 됐다면서요.
 
  『저는 그런 것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런 얘기를 듣긴 했어요. 당시 안기부나 경호실 쪽에서는 상황분석을 해봤 때, 미얀마에 여러 위험들이 내재돼 있는데 꼭 방문을 해야 하는가, 하고 반대를 했죠.
 
  결국 방문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는데 이미 한 달 전에 북한의 동건號(호)가 미얀마에 들어와 있었거든요. 아웅산 묘지에 폭탄을 설치하고 했던 공작원들이 동건號를 타고 들어왔죠』
 
  ―당시 경호실 수행과장으로서 全대통령 곁에 있었죠.
 
  『차를 같이 탄 것은 아니고 대통령이 탄 차의 바로 뒤차를 탔죠』
 
  ―불과 도착 몇 분 전에 그 폭파가 일어난 거죠.
 
  『사실은 영빈관에서 아웅산 묘소까지 10분이 안 걸려요. 약간 오르막이에요. 그 중간 오르막을 막 넘어서면 아웅산 묘지가 보여요. 우리가 막 넘어서는데 「꽝」 터지니까, 차 돌려서 대피했죠. 2~3분 차이였죠』
 
  ―생존한 수행원들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그 당시 우리는 대통령을 바로 우리나라로 모시려고 했는데 대통령께서 부상자들이 후송된 병원에 꼭 가셔야 한다는 거예요. 경호를 하는 입장에서는 큰일 났지 않습니까. 어떻게 또 제2의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말이죠.
 
  병원에 가서 환자들 보기 전에는 안 돌아가신다는 걸 모시고 비행기를 탔는데, 올 때 함께 타고 온 수행한 분들의 자리를 보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공보수석·의전수석·경호실장 딱 세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다 돌아가시고 자리는 텅 비어 있죠. 참 그때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저희 경호실 직원도 둘이 사망하고』
 
  ―그때도 돌아와서 사표를 쓰고 싶으셨겠네요.
 
  『그렇죠』
    
1994년 남북 頂上회담 앞두고 金日成 사망 예언
 
  朴相範 前 실장은 1994년 예정됐던 金泳三(김영삼) 前 대통령과 金日成(김일성)의 남북 頂上(정상)회담을 앞두고 金日成의 사망을 예언하기도 했다.
 
  ―남북 頂上회담을 앞두고 金日成이 사망하는 꿈을 꾸셨다면서요.
 
  『뭔가를 고민하고 집중하고 그러다 보니까 그랬는지는 몰라도 꿈이 아주 선명하더라구요. 金日成이 하얀 옷을 입고 관에 누운 채 실려 나오는 꿈이었어요. 새벽 4시쯤에 깜짝 놀라서 깨 가지고 집사람을 깨웠어요. 「야, 이거 꿈이 이상하다. 金日成이가 죽는 꿈을 꿨는데」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이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 만약에 경호실장인 당신이 그런 얘기를 하면 거기 가기 싫어서 그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평양에 가는 것으로 정리가 된 다음에야 이야기를 했죠. 頂上회담 한 열흘쯤 전에 마지막 인원조정 문제 때문에 관계관들이 모여서 식사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그 얘기를 했던 거죠』
 
  ―金日成이 답방하기로 돼 있었습니까.
 
  『외교 관례상 답방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金日成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사망할 경우도 생각했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은 환경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밤새 안녕하십니까」라는 말도 있잖아요. 金泳三 대통령에게도 그런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1994년 당시에는 한반도에 核위기가 고조됐을 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호문제는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텐데요.
 
  『미국이 北을 공격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 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시기였어요. 그런데도 金泳三 대통령께서는 「꼭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頂上회담을 연기해야 한다는 정보나, 대통령 주변의 만류는 없었습니까.
 
  『金泳三 대통령은 한 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강심장은 알아줄 만합니다. 자기에 대한 믿음이 강한 분이죠』
 
  ―경호원 입장에서 2000년 金大中(김대중) 前 대통령과 金正日의 남북 頂上회담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아주 성공한 사례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경호 차원에서 북한은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그런 곳에서 무사히 큰 행사가 끝났으니 성공한 거죠』
 
  ―1994년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 당시 남북 頂上회담을 준비했던 경험이 큰 도움을 준 것은 아닙니까.
 
  『당연합니다. 그 당시 실무 담당자들이 2000년에도 청와대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또 1994년에 실무회담을 하면서 남겨 뒀던 자료들이 경호실에 그대로 있어서 회담을 준비하기가 쉬웠을 겁니다』
  
  
「옥쇄작전」으로 죽음 각오
 
  ―2000년 頂上회담 당시 金大中 前 대통령이 金日成 시신 참배 여부를 놓고 말들이 많았는데요.
 
  『맞아요. 그 당시 그런 얘기가 있었지요. 대통령 경호실 퇴직 직원 모임인 「청심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우리끼리도 그런 얘기를 주고 받았지요. 그런데 알아본 바로는 金大中 대통령이 참배하지 않았답니다. 물론 「외교 관례상 안 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얘기도 없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은 바가 없습니다. 모르죠. 세월이 흘러 누가 진실을 얘기할지』
 
  ―2000년 頂上회담 당시 무기휴대 여부를 놓고 실무자끼리 논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1994년에는 어떠했습니까.
 
  『우리 경호원이 통신장비와 무기를 모두 휴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렇지만 무기를 휴대한다고 안심이 된 것은 아닙니다. 북한 사회의 특수성 때문이었죠. 온갖 특수한 상황을 다 고려해야 했어요』
 
  ―북한을 못 믿었다는 말씀입니까.
 
  『못 믿는다기보다 경호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어요. 최후의 시나리오도 생각했습니다. 양 頂上이 회담을 하는 장소에서 북측 경호원이 金日成에게 충성하겠다는 영웅심으로 우리 대통령을 향해 총격을 가할 경우를 빼놓을 수 없었어요. 정말이지 머릿속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고민이 복잡하게 얽혔어요』
 
  ―1994년 頂上회담 준비할 때 북측 경호 담당자와 직접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직접 만난 적은 없었어요. 頂上회담이 불발됐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측 경호실 실무담당자들은 북측 담당자들을 여러 차례 접촉했어요. 주로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하지만 경호준비를 총괄 지휘하면서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습니까.
 
  『경호하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딱 한 가지입니다. 안전지대가 없었다는 점이었어요. 평양에 수교국인 중국의 대사관이 있었지만 마땅한 지역을 찾을 수 없었어요.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뚜렷한 방법이 없었지요. 최악의 경우 「옥쇄작전」으로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또 하나 걱정이 된 경우는 金日成이 갑자기 병사할 경우였습니다. 그 당시 金日成의 나이가 80세가 넘었어요. 이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대비책을 마련하는 데 힘이 많이 들었어요』
  
  
 金泳三과 全斗煥은 보스형, 盧泰愚는 느긋, 朴正熙는 치밀
 
  ―대통령의 성품·취향에 따라 경호형태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까.
 
  『대통령의 개인 성품에 따라 경호하는 방법·기법 등에 변형을 줍니다. 다소 엄격한 경호를 하면 부담스러워하는 분이 있습니다. 崔圭夏(최규하) 대통령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분은 오랜 세월을 외교관으로 지냈기 때문에 경호받는 데 거부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金泳三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개인 경호를 받아서인지 경호에 부담을 가지지 않더군요. 朴正熙 대통령은 경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고 말을 하지 않으셨어요. 경호실이 알아서 하게 놔두셨지요. 경호 강도를 높이면 「아, 경호실이 사전에 위험한 정보를 입수했나 보다」고 생각하고는 경호에 잘 적응해 주셨어요』
 
  ―全斗煥 대통령 시절 경호실 수행과장, 경호처장 등을 하셨는데, 全 前 대통령은 어떠했습니까.
 
  『全斗煥 대통령은 새벽 취약시간에 현장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사전 계획 없이 「어디로 가자」고 하십니다. 새벽 1~2시에 소방서, 파출소, 시장을 마구 다니셨습니다. 그 당시 경호실은 새벽출동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힘들었겠군요.
 
  『3년 반 동안 수행과장을 했는데, 편안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요. 그때는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습니다. 당시 관사에서 생활을 했는데, 안방 머리맡에 비상벨이 있었어요. 청와대 본관에서 벨을 누르면 비상등이 켜지면서 「삑~삑~」 소리를 내었죠. 그러면 자다가 바로 일어나 겉옷과 권총만 챙기고 바로 뛰어나갔습니다』
 
  ―관사에서 자다가 호출을 받고 일어나서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3분이면 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만큼 철저히 준비한다는 얘기입니다』
 
  ―사전 스케줄 없이 대통령이 다니는 것은 경호 차원에서 어떻습니까.
 
  『다른 대통령들은 대체로 스케줄대로 움직였는데 全斗煥 대통령만은 예외였어요. 朴正熙 대통령도 밤에 다니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호 차원에서 볼 때 불시에 움직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대통령 動線(동선)이 완벽하게 비공개되는 셈이니까요』
 
  ―그동안 지켜본 여러 대통령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각자의 품성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요.
 
  『대통령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모두 건강했습니다. 그리고 놀랄 정도로 부지런했습니다. 사실 대통령 업무라는 게 대단한 격무입니다. 퇴임하고 나서 다들 농담으로 「청와대는 감옥 같은 곳」이라고 합디다. 수많은 오찬·만찬·파티에 개인적인 시간은 전혀 없지요. 그런 생활을 5년 동안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것을 보면서 건강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격이 가장 급한 대통령은 어느 분이었습니까.
 
  『全斗煥 대통령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화끈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각자의 스타일이 달랐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金泳三 대통령과 全斗煥 대통령은 강한 보스형입니다.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은 성격이 부드러우면서 느긋한 스타일이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치밀한 스타일이었습니다』
  
 
「청와대 안 들어 간다」며 주먹 날린 朴志晩
 
  ―朴 前 대통령의 장남 志晩(지만)씨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志晩씨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志晩씨의 매서운 주먹맛을 본 적이 있지요.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志晩씨는 아버지와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젊은 시절 심적 고통이 심했나봐요. 志晩씨가 육사를 다닐 때였어요. 외출이나 외박을 나와도 집이 청와대이다 보니 실컷 놀 수도 없었고, 아버지랑 얘기도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루는 명동에서 친구들이랑 실컷 놀았던 겁니다』
 
  ―놀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외박을 나오면 집에 있어야 하는데 명동에 있다 보니 朴대통령께서 호출을 명하신 겁니다. 그래서 경호실이 출동한 겁니다. 명동에서 志晩씨를 찾아 한참 동안 헤맸지요. 그러다가 명동성당과 영락교회 사이 도로가에서 志晩씨와 마주친 겁니다. 「갑시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고 했더니 「안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도로가에는 경호차량이 대기하고 있었고, 차 안 무전기에서는 朴 대통령이 경호실장에게 「빨리 데려오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무전기에 불이 난 겁니다. 志晩씨에게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죠. 志晩씨가 순순히 차에 타는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제 얼굴에 일격을 가하는 겁니다. 화가 났겠죠. 젊은 시절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다 보니 말입니다』
 
  ―朴 前 대통령께 志晩씨를 데려가니 뭐라고 하던가요.
 
  『朴대통령 특유의 목소리로 「박군 수고했네」라고 하더군요. 그런 것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아련한 추억처럼 그 때 그 장면이 떠오르네요. 젊은 시절 志晩씨의 그런 모습을 봐서인지 그를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뤄 살고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습니다』
 
  ―志晩씨가 청와대를 떠난 후 만난 적이 있습니까.
 
  『한 번 만난 적이 있네요. 제가 국가보훈처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志晩씨가 필로폰을 투여한 죄값으로 감호처분과 사회봉사활동 명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국가보훈처 산하 보훈병원에서 3개월간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만났습니다. 「힘들지만 열심히 살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더군요』
  
최고 권력자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최고 권력자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의 뒷모습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어요. 예외가 없습니다. 원래 인간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간다고들 하지만 대통령의 뒷모습은 볼 때마다 쓸쓸해 보였습니다』
 
  ―권력자 앞에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인간상도 많이 봤겠군요.
 
  『대통령직이라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가장 센 힘을 가진 자리이기도 합니다. 절대 권력자 앞에 선 사람들이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옆에서 보면 이상할 정도로 아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꿋꿋이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그렇습니까.
 
  『현재 살아 있는 분들이라 말하기가 좀 뭣합니다』
 
  ―임기가 끝날 무렵 대통령은 대개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일반인들과 같습니다. 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지요. 「다시 한 번 더 할 수만 있다면 더 잘 할 텐데」라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힘든 자리를 한 번 더 하고 싶을까요.
 
  『대통령의 작은 실수도 우리 국민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대통령도 인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본 대통령들은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을 한 분들입니다. 비가 많이 와도 걱정이고, 안 와도 걱정이며, 눈이 많이 와도 걱정이지요. 재미로 대통령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있다 보면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민들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자발적 고민을 하게 되죠. 그런 데 대한 책임감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경호실장의 권력은 깨끗하지 못한 권력
 
  지난 2월 하순께 중앙일간지의 한 칼럼니스트는 국정회의나 대통령의 참모회의에 경호 책임자가 참석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선진국에서는 그런 예가 없다는 것이다.
 
  ―경호실장으로 있을 때 청와대 회의에는 자주 참석하셨습니까.
 
  『참모회의라 할 수 있는 수석비서관 회의에는 참석했어요. 하지만 국무회의 등 경호와 관련이 없는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어요. 대신 수행과장을 보냈죠. 청와대 경내는 안전이 확보된 곳이니까요. 경호실장은 경호 업무 전체를 총괄하고 관련 업무를 지시하면 됩니다. 청와대 내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든 회의에 참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車智澈, 張世東(장세동), 安賢泰(안현태), 李賢雨(이현우) 등 전직 경호실장의 말로는 불행했습니다.
 
  『권력자와의 접근성과 정보에서 파생된, 깨끗하지 못한 권력이라고 할까요. 경호실장은 대통령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이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정보를 취하는지 잘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권력화되어 갑니다』
 
  ―朴실장은 역대 실장과 다른데, 역대 경호실장들의 불행을 반면교사로 삼은 겁니까.
 
  『반면교사로 삼은 측면도 있죠.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경호실장으로 발탁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한 게 있었습니다. 「경호실장도 결국 한 사람의 경호원일뿐이다」라는 생각이었죠.
 
  경호실장은 경호실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을 하지만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경호원인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일반 경호원들처럼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오후에는 후배들과 사격훈련을 하곤 했죠』
 
  ―그래도 청탁·로비 등이 수많이 들어올 텐데요.
 
  『부속실·비서실을 통해 많이 들어오죠. 하지만 경호실장을 하면서 평소 아는 기업인도 만나지 않았어요. 과거 선배 실장들의 마지막 모습을 봐 왔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면 어떻게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직을 떠날 때 깨끗이 떠나고 싶었습니다. 「조직을 떠난 후에는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자」라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전직 경호실장의 불행은 개인의 욕심 탓인가요, 권력의 생리 때문입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저는 권력의 생리와 구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봅니다. 권력이라는 마법에 한번 빠지게 되면 본인도 모르게 끌려들어갑니다.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그럴 때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안 섭니다』
  
역대 경호실장 인물평
 
  ―역대 경호실장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朴鐘圭 실장은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습니다. 張世東 실장은 완벽주의자였고, 安賢泰 실장은 굉장히 인간적이었습니다. 후임 李賢雨 실장도 인간적이었지요』
 
  ―車智澈 실장은요.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굉장히 정치적이었죠. 국회의원을 해서인지 아무튼 정치적이었습니다』
 
  ―車智澈 실장의 이미지가 나쁘게 알려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권력을 남용하면서 그렇게 변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車실장은 매주 토요일 30경비단 연병장에서 분열식을 주관했어요. 경호실은 물론 지원부서까지 모두 동원됐지요. 경호실장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때부터 평가가 좋지 않았습니다』
 
  ―개인 품성은 어땠습니까.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어요. 그리고 돈에 대해 정말 깨끗했지요. 朴대통령도 車실장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어요. 車실장이 사망한 후 그의 어머니가 홀로 양로원에서 생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다만 성장과정에서 쌓인 열등감이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車실장은 출생환경과 육사 출신이 아닌 데 대한 자격지심이 있었어요. 車실장이 어느 지위 이상으로 올라가다 보니 이상한 행동으로 표출된 겁니다』
 
  ―朴鐘圭 실장이 車智澈씨를 후임으로 추천했습니까.
 
  『혁명도 같이 했고, 車실장이 국회에 있을 때도 형님 동생 하며 지낸 걸로 압니다. 5·16 혁명 당시 해병대 중령(대대장)으로 동참했던 오정근씨도 후보로 검토되기도 했습니다』
 
  ―「피스톨 朴」으로 알려진 朴鐘圭 실장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朴正熙 대통령과 혁명동지여서인지 朴대통령에 대한 충성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갈 때는 옷에 달린 모든 단추는 다 채우고, 머리를 빗질한 후 집무실에 들어갔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해서인지 남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따로 불러다가 혼을 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국무위원들이 좀 힘들었을 겁니다』
  
張世東은 대통령 경호실史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인물
 
  ―張世東씨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경호실장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다만 시대가 변하면서 충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진 것뿐이죠. 완벽주의자인 張실장은 대통령 경호실史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인물입니다. 그는 10·26 사건 이후 와해된 경호실 조직을 재건한 분이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직을 만들어 갔습니까.
 
  『우선 인적 자원을 再정비했습니다. 10·26 사건으로 사망한 경호 인력을 보강하고, 조직구성도 바꿨습니다. 관계기관으로부터 대통령 경호에 필요한 정보도 체계적으로 관리했구요』
 
  ―張世東씨는 「心氣警護(심기경호)」를 강조했는데요.
 
  『잘못하면 나쁜 의미로 들릴 수 있는데,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는 데 불필요한 신경이 쓰이지 않도록 경호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張 실장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용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효과가 있었습니까.
 
  『실수를 줄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었어요. 한 번 볼 것을 두 번 보고 세 번 봤죠』
 
  ―문민정부 이후 경호실장의 지위는 약화되고, 비서실장의 힘이 세졌습니다.
 
  『경호실은 대통령의 경호를 맡는 곳입니다. 권력기관이 아닙니다. 그게 저의 신념이었기 때문에 제가 경호실장을 맡은 후 불필요한 요소는 다 차단해 버렸습니다』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데는 金泳三 前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문민정부 출범 당시 모든 분야에 문민화가 이뤄졌습니다. 첫 정부 조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호실장도 이전에는 모두가 軍 출신이었는데, 바꾸자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문 경호인을 발탁하는 과정에서 제가 선정된 것으로 압니다』
  
대통령의 아들
 
  ―金 前 대통령의 차남 賢哲(현철)씨와 갈등이 적지 않았다고 알려졌습니다. 金 대통령의 사설 경호원 출신들을 대통령 경호실 직원으로 특별 채용해 달라는 민주계 측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현철씨 측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면서요.
 
  『경호실 인원은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별도로 추가 인원을 채용하기 위해서는 법을 고쳐야 해요. 결국 한 사람을 외부에서 데려오기 위해서는 기존 인원을 내보내야 했습니다. 제대로 된 경호원을 만드는 데 최소 5년이 걸립니다. 자기 판단 下에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험과 훈련이 필요해요.
 
  그렇게 훈련된 사람을 함부로 내보내면 되겠습니까. 경호원 선발은 국가원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경호실의 존재 이유는 대통령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 최고의 임무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까.
 
  『경호요원이 제대로 경호를 하지 못해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누가 집니까. 人情(인정)이나 과거의 인연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경호실 직원이 되고 싶으면 시험을 통해 들어오는 방법밖에 없다고 賢哲씨 측에 전달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시험을 봤는데 실력이 부족해 떨어졌습니다』
 
  ―金賢哲씨의 전횡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보니 얘기 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1994년 12월 경호실장을 그만두기 직전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金泳三 대통령은 두 번의 大選(대선)을 치르면서 賢哲씨를 자신의 선거 참모뿐만 아니라 오른팔로 여기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賢哲씨의 전횡에 대한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박관용 비서실장도 수없이 그런 이야기를 보고한 걸로 압니다』
 
  ―金大中 前 대통령의 아들도 구속됐습니다. 대통령 아들의 구속이 반복됐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사자는 조심한다고 하겠지만, 권력의 속성상 유혹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요. 대통령 아들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통했던 겁니다. 전화 한 통화로 원하는 것들이 이뤄졌던 거죠. 그러면서 스스로 권력에 취해 가는 겁니다. 일종의 권력중독증에 걸리는 거죠』
 
  ―시스템상으로 통제할 방법은 없었을까요.
 
  『사실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하더라도 운용하는 자가 하기 나름입니다. 모든 일은 인간이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대통령의 아들은 모두 유학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 나왔던 겁니다. 盧武鉉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사회가 좀더 투명해지면 그런 일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정치에는 뜻이 없었습니까.
 
  『특별히 관심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1996년 당시 국회의원 출마를 제의받았는데 거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국회의원 출마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全斗煥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부산·경남지역 기관장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全대통령이 「朴처장은 국회로 보낼 생각이다」고 했어요. 그게 외부로 퍼지면서 끝없이 정치 얘기가 나왔죠. 하지만 엉뚱한 데 기웃거리지 않겠다고 되뇌었어요. 이후 공직을 완전히 그만둔 뒤에도 정치권에서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저는 「쉬고 싶다」고 했습니다』
 
  ―경호사고란 어떤 경우를 말합니까.
 
  『직접 危害(위해)는 가하지 않았지만 어떤 행사를 치를 때 대통령에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행하는 모든 경우가 경호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공격형 정신 질환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대통령을 공격해 올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불시에 행사장에 툭 튀어나올 경우가 경호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봐야겠군요.
 
  『경호란 총을 차고 대통령을 따라다닌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경호는 과학적이야 합니다. 가해자가 공격해 오는 순간을 포착해 머릿속으로 판단하고 대응행동을 하는 데 0.2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0.2초라는 시간 동안 가해자는 2m를 움직일 수 있어요. 그래서 危害 요소가 있는 일반인들과 같은 선상에 있어서는 절대 사고를 막지 못합니다. 놓치는 순간 사고가 발생하는 거죠』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자주 듭니까.
 
  『항상 집을 나설 때면 부모님께 「저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오늘 나가서 영원히 못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경호원을 생활해 왔어요』
  

北의 全斗煥 암살 계획
 
  ―全斗煥 前 대통령 시절 북측의 대통령 암살 계획이 많았다고 알려졌습니다.
 
  『아웅산 사건 전의 일이었습니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유명한 캐나다 국적의 韓人 저격범을 고용해서 대통령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다 적발된 경우가 있지요.
 
  全대통령이 1982년에 필리핀을 방문할 때였어요. 양국 頂上이 골프를 치기로 돼 있었습니다. 저격범은 이 사실을 알고 골프장을 사전에 답사까지 마쳤습니다. 다행히 인터폴의 협조로 저격범을 차단시킬 수 있었고, 암살계획은 미수에 그쳤습니다』
 
  ―후배 경호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까.
 
  『경호원은 뒤에도 눈이 달려 있어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五感(오감)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말이죠. 경호원은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직감적으로 행동을 취할 있어요. 그 수준에 도달해야 진정한 경호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뭔가 사고가 날 듯한 느낌이 들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납니다. 그것을 막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수준에 도달하는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훈련이죠. 훈련을 통해 직감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軍 출신 경호실장과 경찰 출신 경호실장은 어떤 장단점이 있습니까.
 
  『출신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경호원으로서의 전문성입니다. 이제 경호실장도 내부 경호원들 중에서 발탁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軍이나 경찰에서 경호를 해본 사람도 장점이 많아요. 다만 軍 출신은 경호를 작전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고, 경찰 출신은 경비 개념에 치우치는 경우가 다소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경호원이 될 생각입니까.
 
  朴실장은 이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글쎄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것이 결국 나라에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저는 경호실을 사랑합니다. 후배들의 역량을 믿습니다. 제가 현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발전된 기법으로 대통령을 경호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자료출처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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