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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여름.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의 기쁨을 국민에게 안겨준 국가대표팀의 선봉에는 허정무 감독이 있었다. 이제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돌아온 허정무 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은 문학 경기장. 문을 열어주는 허정무 감독은 빨간 명찰을 달고 있는 취재팀을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인터뷰 당시는 인천유나이티드가 허정무 감독 부임 이후 2승 2무의 상승세를 달리던 시점. 6연패에 시달리던 인천 유나이티드는 허정무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축구에서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군에서도 지휘관의 역할이 중요하자나요. 사자가 대장인 양떼와 양이 대장인 사자 떼가 싸우면 사자가 대장인 양떼들이 이긴다는 얘기가 있죠. 전쟁 역사를 봐도 지휘관의 판단 하나가 부대를 전멸시키기도 하고 승리를 가져오게도 하죠. 감독의 역할도 마찬가지예요. 감독이 무너지면 선수들이 무너지는 거고, 감독이 올바른 지시를 해도 선수가 긍정적으로 따라오지 않으면 결국 지게 되는 거죠.”

인천유나이티드의 지휘관인 허정무 감독은 팀을 지휘하는 리더로써 ‘소통’ 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실 과거에는 강한 이미지로 유명했던 허정무 감독이다. 하지만 월드컵 당시에도 팀을 강하게 만들 열쇠로 ‘소통’을 강조했던 그는 과감히 변화의 길을 걷고 있다. 

“무조건 밀어 붙이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더라고요. 선수들이 감독의 말과 뜻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면 99% 성공한 거예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그래. 맞아.’ 라면서 하려는 의욕이 생기지만,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어휴. 또 그 타령이야.’ 라고 생각하죠. 그건 이미 실패한 겁니다. 그 차이가 큰 것을 느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과감히 고치기로 했어요. 선수 입장에서 생각하고, 대화를 하고, 지적보단 칭찬을 해주고 그러자 선수들이 감독의 지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나를 따르라’ 보다는 ‘우리 함께 가자’ 그것이 팀을 승리로 이끄는 길인 것 같아요.” 


선수와의 소통에 성공한 허정무 감독은 이제 팬들과의 소통에도 직접 나서고 있다. 팬들과의 만남은 물론 직접 트위터를 운영하며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과감한 도전정신이 해병 정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그의 해병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축구계에는 해병대 출신이 엄청나게 많아요. 조중연 축구협회 회장을 비롯해서 이회택 부회장, 노흥섭 부회장, 김정남 부회장, 이갑진 고문, 김호 대전 시티즌 감독, 이용수 교수 등 셀 수 없을 정도죠. 지금은 축구단도 없어진 상태이고 시간이 흘러서 그렇지 과거 해병대 축구단은 정말 잘나가는 팀이었습니다.”

 

 

 

 


입대날짜인 1978년 6월 31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해병 357기 허정무 감독은 그 시절 이야기를 시작하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듯 했다.

“진해에서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어요. 훈련 당시 시합이 있어서 조금 일찍 끝내긴 했지만 일반 대원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죠. 당시가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할 무렵이었는데 축구 선수 출신이라고 교관이 한 밤 중에 월드컵 경기를 보여주는 특혜 아닌 특혜를 준 적이 있었죠.(웃음)”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허정무 감독은 헌병감실 소속으로 서울 대방동에 있는 축구단 막사에서 생활을 했다. 

“당시 헌병감실의 우영목 소령이 축구단 부감으로 있었을 당시예요. 대통령배 대회 당시 충의(육군) 팀과 붙었었죠. 효창운동장이었는데 비가 억수로 와서 완전 진흙탕에서 경기를 했죠. 당시 육군 팀이 선수가 더 좋았는데도 우리가 이겼고,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어요. 그러자 우영목 소령이 “야! 허정무! 너야말로 진짜 해병이다! 수륙양용! 진짜 해병이다!” 라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당시 허정무 선수가 주축이 된 해병대 축구팀은 1979년 대통령배축구대회와 군실업축구대회를 석권하며 한국 축구의 최강팀으로 우뚝서 1980년 마라하림컵 국제축구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하여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허정무 감독은 당시 1979년 대통령배 축구대회 최우수선수상, 1979년 한국실업축구연맹 선정 최우수선수, 1978년~79년 체육기자단 선정 베스트11에 선정되는 등 맹활약을 펼쳐 네덜란드 진출의 계기를 마련했다. 1979년에는 말레이지아 실업축구를 석권한 조르스테이트팀을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해군팀이 9:0 으로 대파하여 엉터리팀을 초청했다는 관중의 항의를 받는 소동도 있었다.

군대 시절 이야기를 시작하자 여느 예비역 해병들처럼 허정무 감독 역시 해병대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음이 느껴졌다. 잘 나가는 축구 스타였던 허정무 감독이 해병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해병 하면 멋있자나요. 남자다운 멋도 있고. 당시 해병대 축구단 박세혁 감독님이 해병대로 오라고 스카우트를 했죠. 복무 기간이 조금 짧기도 했지만 남자다운 해병대가 끌렸어요.”

육군과 공군, 그리고 해병대 축구단이 있던 그 시절 라이벌 관계도 상당했다고 한다. 차범근으로 대표되는 공군, 육군에는 조광래, 박성화, 이영무, 신연호, 박상일, 최종덕 등 쟁쟁한 멤버가 있었다. 

“하지만 육군과 공군. 두 팀 모두 우리한텐 못 이겼어요. 우리는 김강남, 김성남, 조영증, 박병철, 박영주, 정현복 등이 대표 급에 속하는 선수였다면 육군은 거의 다 대표급 선수였죠. 멤버만 본다면 육군이 우리보다 한 수 위였지만 우리랑 붙으면 거의 이기지 못했죠.”

그 어느 팀보다 강했다는 그는 승리의 원동력으로 해병대 정신을 얘기했다. 

“축구단도 해병대 정신만은 분명 있었던 것 같아요. 해병대 훈련을 받고, 막사 생활을 하고, 해병대 장교, 사병들과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해병대 정신이 만들어 지더라고요.”

허정무 감독의 유명세와 달리 인터넷 상에 그의 해병대 시절 이야기가 없어 인터뷰 전 반신반의했던 우리는 그의 입에서 해병대 정신이란 얘기가 나오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말 ‘해병’ 이었던 것이다. 외출·외박을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는 완전 해병으로 돌아간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칼 같이 옷을 다려 입고 나갔어요. 팔각모 쓰고 링을 차고, 주름이 바짝 선 옷을 입고 나가면 정말 강한 남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괜히 객기도 한 번 부려보고 싶은 마음도 들기도 했었지요. (웃음)”

해병대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의 눈빛에서 해병대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해병대의 인연은 어찌 보면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다. 

 

 

 

 

 

 


“제가 포항에서 5년간 감독을 했어요. 홈경기를 할 때면 벤치 맞은편 관중석에 1사단 장병들이 와서 응원을 해주곤 했죠. 지금 있는 인천도 해병대와 인연이 깊은 지역이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것도 해병대였고 이를 토대로 서울수복작전 때 중앙청에 제일 먼저 깃발을 꽂은 것도 해병대였으니까요. 지금의 2사단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해병대 캐릭터인 ‘해병이’가 진돗개라는 설명에 ‘진돗개’ 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허정무 감독은 그건 몰랐다며 껄껄 웃었다. 

“그래서인지 참 반갑고 애착이 많이 가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해병대 출신이라면 모르는 사람도 관심이 가고 금방 가까워질 수 있죠. 우리 구단만 해도 최승렬 단장도 해병대 출신이고 알고 보니 축구단의 기사도 해병대 출신이더라고요.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친구인데, 어느 날 “감독님 해병대 나왔어요?” 묻더군요. 그래서 몇 기냐고 물어봤더니 저보다 한 참 밑인 거예요. 그래서 농담으로 “뭐 임마! 당장 꿇어!” 이랬죠. (웃음)”

허정무 감독은 어디를 가든지 해병대 전우회는 절대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피를 흘리면서 나라를 지키는데 가장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해병들이라는 것이다. 해병대에 대한 좋은 기억들 덕분일까.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 선수가 군대에 입대할 당시 군대에 간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었다. 

“내가 아닌 우리가 있고, 우리 위에 또 국가가 있는 거죠. 우리와 국가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안 그런 것도 사실이죠.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거를 알아야 하는데, 군 생활 동안 나의 뿌리인 나라와 민족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나’ 위주의 생활을 하다가 ‘우리’라는 틀 속에서 생활을 하는 것은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죠. 군 생활을 고생만 하는 시간이라고만 생각을 하는데 인간이 살아가는데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굉장히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가 해병대에서 군 생활을 하며 얻은 것들은 그의 선수생활, 그리고 감독직을 수행하는 오늘 날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이 다 만류하던 국가대표 감독직을 수락한 것도 어찌 보면 해병대 정신 때문이 아니었나 하고 회상한다. 

“월드컵 감독직을 수락하면서 축구 인생 모두를 걸고 승부를 해보겠다고 했었어요. 2000년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맺힌 게 많아서 가족들은 반대도 심하게 했었죠. 하지만 해병 정신처럼 ‘한 번 해보자’ 라는 오기도 생기고 맺힌 한을 좀 풀어봐야겠다는 마음에 감독직을 수락했죠.”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 성공으로 그는 전부라고는 볼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명예회복은 한 것 같다고 자평했다. 당시 유쾌한 도전을 내걸었던 그의 앞으로의 도전은 무엇일까.

“시민구단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여건에 있습니다. 이 시민구단들이 무너지면 다른 K리그 구단들도 위축될 수밖에 없죠. 앞으로의 도전은 시민구단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첫 번째는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거죠. 전쟁도 예전에는 양으로 밀어붙였다면 이제는 장비 싸움이자나요. 장비를 현대화하는데 관건은 재정이고요. 축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이 튼실해야 좋은 선수를 꾸준히 키울 수 있는 거죠. 두 번째는 자립을 바탕으로 경기력을 높이는 겁니다. 수원이나 서울같은 큰 구단들과 대등하게 겨루면서 수도권 더비도 형성하고요. 이렇게 된다면 2012년에는 우승도 한 번 노려볼 계획입니다.”

 

 

 

 

 

 
새로이 유쾌한 도전을 선언한 허정무 감독. 어쩌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최고의 자리에 있던 그가 인천 유나이티드라는 시민 구단의 감독이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다보니 그의 선택이 자연스레 이해가 됐다. 해병 정신.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안 되면 될 때까지 도전하는 그 정신과 가장 어울리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처음 걱정과 달리 그 누구보다 열혈 해병이었던 허정무 감독. 그의 유쾌한 도전이 해피엔딩이 되길 기원하며, 인터뷰를 마치는 질문을 던졌다. ‘라디오 스타’ 의 공식질문처럼 “허정무 감독에게 해병대란?” 이라는 짤막한 질문에 허정무 감독은 크게 웃으며 잠깐 고민을 하더니 대답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될까. 해병대란……. 내 삶의 어떤 정신이라고 봐야 되나요.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빼놓을 수 없는 정신이라고 얘기해야 될 것 같아요.” 

허정무 감독. 78년부터 80년까지의 그의 이력에는 ‘해병대 축구단’ 이라는 두 단어 외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2년의 시간 동안 그가 얻은 것은 평생의 그의 삶을 관통하는 정신으로 자리 잡아 있었다. 해병이라는 단어 하나를 들을 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느껴진다는 그는 진정 영원한 해병이었다. 


 

 

 

 

 

To. 해병대 장병 여러분...

저는 해병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어디를 가서도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합니다. 우리나라를 지키는데 가장 선봉에 섰던 가장 강하고 멋진 해병대가 미래에도 우리 대한민국 안보의 선봉에 서는 충혼이 살아 있는 해병대로 남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장병들도 더욱 건강하고 강건한 해병이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From : 허정무

                                                                                                       사진 / 글 : 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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