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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와 미 해병대원과의 첫 만남.

 

내가 개인적으로 미 해병대 장사병들과 처음 만났던 일들과 서로 교분이나 의기투합을 했던 일들을 상기해 보면 나의 경우 꽤 여러 미 해병들과 접촉을 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사실 나는 월남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각 보병중대에 두 명의 미 해병대 앵그리코맨이 파견 되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1968년 1월 28일 우리가 월남의 다낭 항에 도착 했을 때는 우리 청룡부대가 추라이지역에서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대대와 중대가 아직 완강한 진지를 구축하지도 못했던 때였고 청룡부대 본부도 해변 가에서 임시 천막으로 이사 짐을 정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다 벌써 호이안 지역에서의 여러 중대들이 적과의 조우가 잦아 전운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처음 월남에 오는 장병들을 위한 1 주일간에 걸친 적응 교육은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또 1월 30일부터는 적의 구정 공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M-16 소총을 손에 한 번 쥐어보지도 못한 채 급히 각 부대로 배치가 되는 일로 하여 미 해병대 앵그리코 맨이 각 중대에 파견이 되어 있는지 그리고 미 해병대 LVT(수륙 양용차)가 지원이 되는 지에 대해서는 전연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1968년 1월 31일로 기억 된다. 내가 맨 처음 만난 미 해병대 대원은 두 대의 LVT(수륙 양용차) 대원들이었다. 나는 이미 청룡부대 인사 장교로부터 5대대 27중대 1소대장으로 임명한다는 전언 통신문을 받았고 오후 4시경 두 대의 미 해병대 LVT가 내가 대기하고 있는 근무중대(보급 중대)에 도착할 예정이니 5대대 26중대와 27중대에 보급할 C-레이션을 실은 후 먼저 26중대에 보급을 한 다음 나머지 C-레이션과 함께 27중대로 가서 소대장으로 부임을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26 중대와 27중대의 현재 위치는 좌표로 받았고 지도는 근무 중대로부터 한 장을 빌려 확인을 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소속이 없었음으로 비무장이라 그곳 보급 장교에게 사정을 얘기하고는 권총을 한 정 빌려 허리에다 찼다.


LVT(수륙 양용차)는 예정 시간보다 오히려 10분쯤 빨리 근무 중대에 도착했다. 물론 한 대의 LVT 마다 27중대 대원이 두 명씩 타고는 있었지마는 우선 나는 LVT 운전병 한 사람을 만나 내가 앞으로 27중대까지 지휘를 할 장교며 27중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할 장교라 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워낙 LVT 소리가 커서 서로의 말이 잘 들리지 않자 이번에는 리더인듯한 LVT 대원이 시동을 껐다. 또 바로 옆에 위치한 포병대에서 쏘는 105미리 포 소리가 굉음을 울리긴 했으나 간간히 쏘는 포 소리는 우리의 대화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27중대에서 온 LVT였기 때문에 앞으로 27중대를 찾아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은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고 호이안 외곽 경비행장에 야영을 하는 26중대에 일단 C-레이션을 내리고 가까운 길을 택해 이번에는 다른 길로 27 중대의 야영지까지 가야했음으로 지도를 보고 새 길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호이안 시는 낮에 아군과 적군들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있었다. 적들에게 거의 점령을 당했던 호이안 시가 그래도 거의 아군의 손에 재탈환이 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LVT가 근무 중대까지 오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LVT에 탑승한 27중대 대원들이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지도를 보고 새로운 지름길을 택해 26중대에서 27중대까지 가야하는 일이 남아 있는데다 26중대에서 C-레이션을 모두 내리고 나니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 잠시 매우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지도상으로는 숲을 가로질러 간다면 26중대의 야영지에서 27중대의 야영지까지 3키로도 채 안 되는 거리였지만 호이안 시가전에서 쫓긴 많은 적들이 그 숲속으로 후퇴했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에 두 대의 LVT가 이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LVT의 미 해병대 대원들은 이미 자기들의 일이 끝난 것으로 알고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다 나와 대학 동창생인 26중대의 부중대장도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을 해 지금 내가 부임을 하지 않으면 소대장과 분대장들을 잃은 대원들을 누가 지휘를 하겠느냐는 말을 남기고는 LVT 대원들이 쉬고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먼저 누가 지휘자인가를 물었다. 상의 유니폼을 벗고 런닝 셔쓰만 입고 있던 한 대원이 자기라고 나섰다. 나는 알다시피 27중대의 여러 지휘자들이 부상을 당하고 메드 백으로 후송이 된 것을 알지 않느냐고 반문을 하면서 지금 내가 가지 않으면 지휘할 사람도 없고 또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알지 않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리고 비록 밤이지만 두 대의 LVT가 튠업을 해가며 강한 라이트를 비추고 앞으로 돌진하면 적들이 쉽게 덤비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레이션을 실었지마는 LVT는 원래 병력을 싣기 때문에 적들을 오히려 제압하면서 갈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고 만약 기습을 당하더라도 계속 목적지로 달려야 한다는 말도 했다. 내 말을 들은 지휘자는 옆에서 역시 듣고 있던 대원들을 힐끗 쳐다보며 서로 뜻이 통했는지 가자는 제스처를 쓰고는 먼저 지도부터 찬찬히 살폈다.


나는 우리 해병대원 네 명에게 역시 여기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 두 대에 두 사람씩 나누어 타되 나는 역시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선두 LVT에서 지휘를 하겠노라는 말을 하고는 LVT의 상갑판 위에 난짝 엎드린 자세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결국 사지를 향해 돌진하는 LVT 2대의 위용은 대단했다. 물론 장애물이 너무 많은 숲속이라 엔진의 튠업 소리며 멀리까지 비추는 밝은 라이트는 무슨 대 부대의 작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거의 30분 정도나 지났을까? 멀리 보이는 나무 사이에 우리 해병대의 위장복이 얼른 눈에 띠는 것 같아 이제는 살았구나 싶은 마음으로 안도의 숨과 함께 한 편으로는 적들을 속인 것에 대한 승리감에 젖었

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당시의 그 미 LVT 해병대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날이 샐 무렵에는 하필이면 내가 새로 인계를 맡은 27중대의 1소대 정면으로부터 적들의 총알이 수도 없이 날아들었다. 잠시 정면의 내 소대 1개 분대만 응사를 하고는 모두 총알을 아꼈다. 그것은 이미 월남의 젖줄인 1번 도로가 적들의 본격적인 공세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기 때문에 다낭으로부터 들어 와야 할 포탄이나 총탄 그리고 식량까지도 원활하게 지원이 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적들의 사격은 계속 되지 않았다.


내가 속한 27중대는 어제 호이안 시의 시가전에 들어가던 중 잠시 정지해 적정을 살피다 적들로부터 박격포의 공격을 받아 내가 지휘자가 된 1소대의 소대장을 비롯 분대장들까지 모두 다섯 명이 부상을 당해 메드 백 헬리콥터로 후송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아침이 되자 우리가 공동묘지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참호를 파고는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C-레이션으로 아침을 먹은 우리 중대는 잠시 대대로부터의 명령을 받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어제 부상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메드백이 오지 않아 대기하고 있는 대원들이 서너 명 있었다.


앵그리코 맨(항공.함포 유도 통신병)은 계속 메드백을 무전기를 통해 부르고 있었으나 워낙 미 해병대도 전황이 좋지 않은데다 부상자들이 많아 그런지 아예 올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두 앵그리코맨 중 무전기를 잡고 애를 쓰던 대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키가 자그마하고 안경을 쓴 대원이었으나 눈빛만은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나는 내가 어제 밤에 도착한 1소대장이라는 말만 간단히 얘기했고 그는 영어가 통하니 자주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처음 만나게 된 미 해병대의 첫 앵그리코맨이었다.

 

2. 디엔반에서 만난 도로 정찰대


구정 공세가 시작 된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래도 1번 도로는 아직도 적들이 지배하고 있어 모든 물자들이 낙하산으로 보급이 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던 중 광남성 중에 요지인 디엔반 군청만 적들이 점령을 완전히 못했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세를 할 것이라 는 정보가 있어 청룡부대 본부로부터 우리 중대에 명령이 하달 되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소대 대원 40여명 중 20명을 차출 해 결사대를 만들고 중대 기지를 떠나 디엔반 군청의 외곽 방어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물론 밤이면 교전이 치열했으나 적들은 많은 병력으로 기습이나 공격은 하지 않았다. 약 1주일이 지나자 1번 도로가 개통이 되었다.  다낭으로부터 출발한 탄약을 실은 미 해병대 대형트럭들이 1번 도로를 통과 디엠반 네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뒤 바로 호이안 지역 청룡부대로 향하는 538번 도로를 통과했다. 우리는 승리감에 젖어 서로 손을 흔들며 눈물을 글썽이었다.


다음날 우리 중대 진지의 중대장으로부터 직접 무전으로 나에게 작전 지시가 왔다. 이것은 청룡부대 본부의 작전 명령이 5대대 본부를 통해 우리 중대까지 하달 된 것이니 명령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가 먼저였다.


즉 다낭으로부터 출발 해 1번 도로를 정찰하는 미 해병대 정찰조를 1번 도로와 538번 도로가 만나는 분기점에서 오전 08시에 만나 계속 1번 도로로 남진 해 약 6키로 떨어진 지점의 청룡 2대대본부로 들어가는 분기점까지 정찰을 한 후 다시 되돌아 우리가 있는 디엔반 군청까지 되돌아오라는 것이며 이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임무가 끝나야 모든 군용 차량들이 안전하게 1번 도로를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우리 결사대의 병력 20명 중 10명을 인솔하고 예정대로 디엠반 군청 앞 538번 도로와의 분기점에서 약속대로 다낭으로부터 출발한 미 해병대 트럭 두 대를 만나 탑승했다.


물론 출발 전 두 대의 트럭에는 각 각 운전병을 포함한 3명씩의 미 해병대 대원들이 탑승 해 있는 것이 보였고 나는 지금부터는 내가 지휘를 하겠다는 말을 한 뒤 도로 상의 지뢰와 부비 트랩 그리고 양 길가로부터의 적의 습격에 대비하라는 말과 함께 상황이 벌어지면 트럭에 함께 타고 있는 지휘 책임자에게 즉시 보고를 하는 한 편 기습에 대해서는 보고 없이 바로 즉각 응사를 하라는 명령을 했다.


그리고 나는 선도차의 운전석 옆에 탑승을 하는 한 편 미 해병대 운전병에게는 너무 늦으면 시간 내에 모두 정찰을 마칠 수 없으니 5마일 보다는 조금 빨리 앞으로 전진을 하자고 했다.
계속 앞 방향의 도로를 천천히 응시하며 나아가는 것도 지루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내 옆에 있는 미 해병대 운전병은 흑인 중사였다.


먼저 고향을 물으니 미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 미국 미시건주의 엔 아버에 있는 이스턴 미시간 대학에 내 형님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말을 했더니 자기 남동생이 지금 그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남루한 내 신발을 눈여겨 보았는지 내 신발의 사이즈를 물어 대충의 사이즈로만 얘기해 줄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서로 사용하는 단위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꼭 맞지 않더라도 우리는 눈은 움직이는 도로 위에 계속 머물면서도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지루함을 많이 없앨 수가 있었다.

 


3. 미 해병대원들의 먹거리 얘기


구정공세 전 워낙 많은 베트콩들과 월맹 정규군들이 우리 지역으로 몰려 왔다가 이제는 그 지역을 쉽게 빠져 나가지 못해 우리와는 주간에도 자주 접전이 벌어졌고 밤에는 각 중대의 각 소대들이 매복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내 뿐만 아니라 모든 대원들이 지쳐 있었다.


그리고 으레 중대 병력이 움직이면 두 앵그리코 맨(항공 함포 유도 통신병) 모두 함께 작전에 나갔다. 그리고 원래 앵그리코맨들의 정 위치는 지휘관인 중대장의 부근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했는데도 모두 내 옆에서 위치를 하며 기동을 했고 내 전령은 자기 위치에 가라고 신경질을 내기도 해 내가 그냥 두라는 말로 잘 타이르기도 했다.


사실 내 옆에는 내 통신병의 안테나가 있고 거기에다 또 앵그리코 맨들의 안테나가 두 개씩이나 있어 적 스나이퍼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내 자신이 사냥감이 되어 버리는 결과가 올 수 있었다.


내가 부하 20명을 인솔 해 디엠반 군청을 사수하느라 파견을 나갔다가 돌아오니 채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두 앵그리코맨이 바뀌었다. 한 대원은 흑인이었고 다른 한 대원은 키가 훤출하게 큰 말 없는 대원이었다.


1968년 4월로 기억 된다. 미국에서 마틴루터 킹 목사가 죽었다는 것이 부대 내에서도 소문이 퍼졌다. 내가 흑인 엥그리코맨에게 그러냐고 하니까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키가 큰 앵그리코맨은 어느 날 나에게 군대에서 보급품으로 주는 룩스나 다이얼과는 다른 비누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주면서 깨알 같이 쓴 글자를 가리켜 그곳을 보았더니 거기에는 뉴욕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는 귀한 것이라는 보여주기 위해 그랬던 것 같았다.


이번에는 빨리 앵그리코맨이 바뀌었다. 불과 1달 정도나 지났을 까 했을 때 먼저 두텁게 보이는 안경을 낀 앵그리커맨이 교대를 하더니 한 달 뒤에는 고향이 메인주라고 하는 미남 Pete Plummer가 왔다. 안경을 낀 앵그리코 맨은 작전에 나가지 않을 때는 시간만나면 소설 책을 읽기에 바빴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아 가까이 가 보았더니 안경 낀 앵그리코맨이 평소 자기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얘기를 했다. 감자, 토마토 쥬스. 양파 어쩌구 저쩌구 말을 하면 한 가지씩 얘기가 나올 때마다 피터는 “오호호~ 우 후후~” 하고는 못견디겠다는 제스쳐를 썼다. 실로 앵그리코 맨들은 C-레이션에만 주로 식사를 의지 했고 그래도 우리는 작전을 나가서만 c-레이션을 먹을 뿐 중대 내에서는 늘 상 월남정부에서 주는 쌀로 밥을 짓고 또 한국에서 보내주는 김치하며 K-레이션으로 식사를 할 수 있어 음식에는 별로 부담이 없었다.


우리 27중대는 지원 전투 중대의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곳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더 지원 병력이 필요하면 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두 대의 미 해병대 LVT가 대기 상태에 있었다.


4월의 어느 날로 기억 된다. LVT를 지휘하는 미 해병대 소위가 오늘 저녁은 청룡부대 내에 있는 미 해군 해안 공병 대대에서 큰 파티가 벌어지는데 그곳에 가서 실컷 스테이크와 맥주를 마시고 오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가거든 우리 중대 장교들이 먹을 스테이크를 많이 가져 오라는 부탁을 했고 그는 그러겠다는 대답을 했다. 바로 그 파티 장소는 우리 27 중대로부터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밖에는 되지 않아 그가 걸어서 파티 장소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장교들끼리 벙커 밖에서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 은근히 기다려졌다. 우리 중대의 진지는 해안에서 별로 멀지 않은 모래 사구로 된 5고지에 있어 모래 바람이 시원한 편이었으나 때로는 모래 먼지가 바람에 날라 다녀 귀찮기도 했다.

드디어 어둠 속에서 그가 나타났다. 기우뚱 거리며 한 발 한 발 우리가 있는 경사진 고지를 향해 내딛는 그의 발걸음이 벌써 맥주를 많이 먹은 모양이었는데 오른 손에는 무엇인가 종이에 싼 물건이 들려 있어 스테이크가 드디어 도착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가 스테이크를 싼 종이는 기름이 묻어 누른색으로 변해 있었고 다섯장의 입맛을 당기게 했던 두툼한 스테이크는 씹자 말자 모래가 씹혀 먹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미리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여러 겹의 종이로 잘 싸고 조그마한 박스에라도 넣어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 또 눈이 작고 마른 LVT 맨은 얼굴에 흉터가 많아 보였다. 한 번은 우리 소대만 LVT 한 대를 끌고 아침 일찍 정찰을 나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모두 점심 때 쯤에 돌아오고 있는 길이었는데 그만 LVT가 고장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그들의 옆에서 아마 빠리에서 미국측과 월맹측이 휴전회담을 하려고 하는 모양이라는 뉴스를 전했더니 흉터 많은 대원이 미소를 보이며 늘 상 피우는 쿨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 내가 보기엔 존슨 대통령은 꼭 코끼리를 닮았다고 했더니 갑자기 자기 동료 LVT 맨을 돌아보며 “이봐 루테난트 쿠는 공화당이야” 하고는 소리를 쳐 나는 웃었다.


나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대원들 모두에게 점심을 먹어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으레 흉터 많은 LVT 대원도 C-레이션을 먹을 줄 알았더니 그 대원은 다른 LVT 대원과는 상관없이 토치램프에 불을 피우고는 작은 양파 하나를 까서 면도칼로 조심스레 자르더니 후라이 팬에 기름도 두르지 않고 잠시 볶은 후 다시 조그마한 양송이 깡통을 열어 모두 붓고는 같이 섞어 후추 가루를 약간 뿌린 후 모두 점심으로 먹어치웠다. 나는 자주 먹는 C-레이션 보다는 가끔은 그것이 훨씬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4. 교전에 직접 도움을 주는 미 해병대원들


어느 날 내가 소속 된 27중대가 수색 작전을 하다가 숲속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총알이 우리 1소대 방향으로 날라 와 내가 진격 명령을 내리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 뒤를 따르던 앵그리코 맨이 아무래도 26중대 같다는 말을 해 그러면 신호탄을 얼른 올려 보라고 했더니 잠시 후 앵그리코 맨이 올린 신호탄을 보고 상대방에서도 사격을 멈추어 결국 적이 아니라 26 중대병력인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적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적들은 그 포위망을 뚫기 위해 안감 힘을 쓰고 있었다. 어둠을 틈타 어떤 방향이 자기들이 뚫고 나갈 용이한 곳인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공격을 해보고 있었다.


마침내 자정쯤에는 불시에 우리 중대 전방에 마다리 포를 날리고 사격을 가해 왔다. 마다리로 싼 사제 포탄은 멀리 갈 수 없음으로 적들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신호도 된다.


말하자면 한 밤중 적의 마다리 포가 불시에 날라 와 터지고 총알이 난사 되고 있는데도 미 해병대 LVT 의 기관총 사수는 즉각 노출된 LVT의 상갑판 위로 살금살금 기어올라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는 응사를 시작하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상황이 모두 끝난 후 내가 미 해병대 LVT 사수에게 왜 잠시 피했다가 상황 판단을 한 뒤 상갑판 위에 올라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다른 여러 설명이 없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기관총을 손바닥으로 쳐 보이며 “This is my job!" 이라고만 했다.

 

5. 미 해병대 보병들의 모습

 

추라이 지역에서와는 달리 호이안 지역으로 북상한 청룡부대는 미 해병대 아메리칼 사단과의 전술 지역을 바로 붙게 만들어 놓았다. 그럼으로 미 해병대가 작전을 하면 곧잘 청룡부대가 블라킹을 해 청룡부대의 전술 지역으로 도주하는 적들을 차단 섬멸하는 하는 작전을 하곤 했다.


특히 미 해병대와 바로 전술 지역이 맞닿아 있는 지역이 내가 속한 5대대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매우 자주 일어나곤 했다. 적의 구정 공세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로 기억 된다. 아침 일찍 5대대 27중대가 미 해병대 전술지역과 바로 경계가 되는 지역에 블라킹을 나갔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27중대를 갑자기 점심시간이 오기 전 그곳으로부터 철수를 시켜 귀대를 시켰다.


우리는 철수를 하면서 마른 대나무 숲이 전개 되는 갓길을 걷다 깜짝 놀랐다. 내 전령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바로 옆에서 미 해병대 대원들이 숨소리 하나 없이 낮은 자세로 횡대로 열을 지어 대나무 숲으로 진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남의 대나무는 그 가시가 너무 길며 날카로운데다 바싹 말라있어 옷이 곧잘 찢기는데다 살이 닿으면 상처가 날 정도였다. 그러한 지역을 조용히 마치 사냥을 하는 소리 없는 표범처럼 적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으니 과히 세계의 최 강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6. 미 해병대 앵그리코 맨들과의 정담


1968년 6월과 7월, 5대대는 용궁 작전과 말굽 작전에서 크게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7중대는 6월 용궁 작전이 끝나자 바로 적이 주둔했던 큰 고목나무 아래를 포함 해 새로운 중대 기지를 만들어 이동을 했고 전에 쓰던 5대대 본부와 청룡부대 본부와 가까운 5고지의 방석(기지)은 25중대에게 인계를 했다. 27중대의 새 방석은 그 넓이와 근무 중대 앞으로 빠지는 도로하며 또 고목나무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포함하면 2개 중대의 병력이 충분히 주둔할 수가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 면적이 넓어 방어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도 같았으나 사실은 다낭을 겨냥하는 적의 로켓을 사정거리 밖으로 쫓아내기 밀어 위해 엄청난 주위의 면적을 불도저로 밀어 내 사계 청소를 했고 또 미 해병대 공병들이 철조망을 쳐 놓았기 때문에 방어를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또 미 해병대에서는 미리 제작한 약 10미터가 넘는 관망대를 헬리콥터로 운반 해 주었고 또 중대장과 부중대장인 내가 쓸 통나무집을 다소 안전한 장소에 두 채나 지어 주었다.


내 통나무집은 나 혼자 쓰기에는 넓은 편이라 중대원에게 줄 C-레이션을 항상 보관하고 있었고 또 외부에서 방문하는 손님이 있을 경우에는 야전의 이동 침대를 펴 잠을 자도록 했다.

이때 함께 있었던 두 명의 앵그리코 맨은 모두가 약 4개월 전 그러니까 구정공세 직 후부터 계속 함께 있는 앵그리코 맨들이었다.


두터운 안경을 끼고 틈만 나면 소설을 읽는 대원과 용궁 작전에서 손을 다쳐 병원에 실려 갔다 다시 돌아 온 Pete Plummer가 바로 그들이었다.


나는 마른 생선포를 좋아했다. 집에서는 내 편지를 받고 대구포와 새우 양념포를 부쳐 주었다. 나는 평소에도 저녁이 되면 맥주와 C-레이션의 과일을 끄집어내 Pete를 곧잘 불러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수가 잦았다. 집에서 부친 대구포가 왔을 때는 너무 짜서 그러지 않았지만 새우포가 왔을 때는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즐기기도 했다.
한 날은 안경 낀 대원이 자기 집에서 어머니가 부쳤다고 조그만 나무 상자를 하나 들고 들어 왔다.


뚜껑을 여니 얇은 종이로 덮여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아도 매우 고급의 음식 같이 보였다. 알고보니 꽤 넓적하고 긴 저키를 열을 지어 담아 놓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저키라는 말은 들어 보아도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흔히 지금 우리가 사서 먹는 저키 보다는 짜지 않고 오히려 싱거운 맛이었는데도 후추로 양념을 해서 그런지 나중의 맛은 약간은 매운 맛이 감돌았다.


나는 한 두 개만 먹고 만다는 것이 자꾸 손이 가서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008년부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Pete의 사진으로 그를 찾기 시작했다.

뒤 늦게 찾기 시작한 것은 마침 월남전과 한국 vietvet.co.kr 이라는 월남전 참전 육군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불꽃처럼”(나의 해병대 일기)의 내 논픽션 스토리를 연재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 영문으로 된 사이트가 있고

주로 월남전에 참전을 해 우리 청룡부대에서 활약했던 앵그리코 대원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27중대에 있었던 앵그리코 맨 Pete의 이름은 알았어도 성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사진과 미국의 매인 주 출신이라는 것으로만 찾기 시작했는데 어느날 어떤 앵그리코 맨 출신이 아마 자기가 알고 있는 전우가 맞을 것이라고 얘기를 하면서 Pete는 미 CIA의 에이전트였고 휴가를 가도 군용기가 아니라 아메리칸 에어라인으로 다녔고 결국은 알아보니 약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너무 실망이 컸다. 마치 동생처럼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나름대로 마음 속에 담고 있었는데....


2010년 1월에 한 통의 이메일이 당시 자신의 사진과 함께 나에게 왔다.

도대체 누구신데 내 사진이 여러 군데 돌아다니고 나를 찾느냐는 것이었다. 벌써 세월이 40년이 더 흘러서일까?

나는 다시 그가 나에게 준 그의 독사진과 해변에서 27증대 장교들과 같이 찍은 두 장의 사진과 또 말굽 작전에서

전과를 거두고 나와 단 둘이서 찍은 사진을 이메일로 부쳐주며 옛 얘기를 써 주었다.


그는 이메일의 내용 중

자기는 2대대 25.26.27 중대에서 돌아가며 근무를 했다는 말에 나는 역시 옛 추억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25.26.27 중대들은 2대대가 아니라 모두 5대대였다는 사실도 상기시켜 주면서 내가 살아 온 얘기들을 써 보냈더니 그도 28년 간 매인 주에 있는 제지 공장의 관리 엔지니어로 재직을 했고 지금은 퇴직 전 잠시 교도소의 관리 엔지니어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곧 다고 정년퇴직을 할 것이라는 내용과 벌써 손자가 10명이나 된다는 말까지 써 보냈다.
내가 나이가 너무 들어서 그럴까? 노인이 되면 과거에 집착한다는 말처럼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아마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기억력이 더 뛰어나서 그런 것일 테지...
나는 죽을 때까지 그런 자부심으로만 앞으로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 끝 ***
 

3. 3. 2010. 운몽 /구문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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