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해병대제2사단 상병이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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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설고 물 설은 땅 포항.
내가 선택한 젊음의 소금밭이자 도전과 패기의 종착역. 열흘 간 단 잠 같은 첫 진급휴가를 마치고 귀대(歸隊) 하는 이 열차 안, 긴 침묵의 시간은 분명 그 무엇보다 까다로운 순간이자 내 마음속 작은 부산스러움일테지. 귀영 길, 없는 돈 자식새끼 고기라도 한 점 더 먹여 보내고 싶은 것이 어미의 마음이거늘 무엇이 그리 어수선하여 늘 볼통거리기 일쑤였는지. 오늘 같은 날 어머니께 인색하였다.

 

초록(草綠)이 좋다던 여자여. 해지면 불 밝혀 게 잡던 손이여운다.

이 여자 운다.
내가 보여 일렁이는가. 애자지정(愛子之情) 아니다.
그저 눈엽에 부시다 하겠지 아니다.

이 여자 운다. 여자라 운다.
저 멀리 억센 풀, 달래란 걸 알기에 가슴으로 운다.
나도 그리고 어머니도.
“이보게 젊은이 혹시 군인이오?”
어느새 비어있던 옆 자리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귀대하는 길이지?”
“아 네…”
매가리 없는 소리에 할머니께선 말없이 웃으시며 내 손에 직접 깐
고구마를 쥐어 주셨다.
“씩씩한 청년이구만 추운데서 고생이 많을 텐데”
“아닙니다.”
“하이고! 키도 크고 얼굴도 미남이고 이렇게 듬직한 아들래미 둔 어머니는 참 좋으시겠네 그려”
제 자식인 듯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따듯한 관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콜록 콜록!”
그렇게 고구마에 목도 마음도 메여왔다.
‘호걸이 되어 만 천하에 너의 큰 뜻을 이루고. 그것을 새기어 훗날 너의 자식을 낳아라.

그리고 그때 다시 어미의 품으로 돌아 오거라.‘
할머니가 내리시자 내 쓸쓸한 귀영(歸營) 길은 제법 따듯한 온기를 머금었다.

마치 어렸을 적 어머니가 차려주신 ‘호박 된장국’을 먹은
뒤 찾아오는 평온함과 같은 것이라.
불량식품으로 껄끄러워진 속을 어루만져주던 그 작지만 큰 손길이
떠올랐다. 두렵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다. 어머니의 깊은 손이었기에 잠들 수 있었고, 꿈꿀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할머니께도 아들이 있었다.

늦가을.

추위가 슬슬 기승을 부릴 때.

마치 오늘과 같은 날. 나와 같이 귀영 길에 올랐을 철없던 아들을 떠올리고 계셨다.

짧게 자른 뻣뻣한 머리칼에 맞지도 않는 큰 군
복을 입고는 쭈뼛하게 서 있던 모습을. 그 ‘무엇’인가를 말하지 못한
채 고민하던 그 불안한 표정까지. 할머니께선 여전히 그날의 아들을
기억하고 계셨다. 아니 그리워하셨다.
‘난 내 자식을 믿었다우. 세상천지 다 빌어먹을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해도 내 눈엔 누구보다 늠름한 놈이었지.’

그 뒤로 아들은 다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못된 아
들은 조국을 위해, 어머니를 위해 ‘신화를 남긴’ 그날의 ‘월남(越南)’으
로 향했던 것이다. 가난함이 빠듯한 삶에 맞물려 따듯한 밥 한 끼 차
려주지 못하고 보냈던 게 한이 된다던 할머니.
‘그게 한이 된다오. 쌀은 없어도 고구마는 장사를 했으니 이거라도 삶
아 줄 테니 먹고 가라고 했는데….’
어머니
‘시간 없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더라고…. 그게 끝이었지. 그땐 그랬어.

보리밥하나 못 먹이는 게 어찌나 죄스럽던지 목이 메 부르지도 못하겠더라고.’
울지 마세요.
‘그 때 다리라도 붙들고 이 고구마 하나 못 먹여 보낸 것이 아직도 내
마음에 못이 되었다네.….’
못난 아들. 용서하세요.
긴 한숨에 눈을 감았다. 기억은 과거로 스며지고 과거는 곧 후회로 날아든다.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챙겨주신 흰 봉투가 떠올랐다. 넉넉한 살림살
이가 아닌 걸 알면서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주머니 속에 구겨 넣
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가까운 스쳐짐만 고르던 내 시선의 차가운 숨결도 이제는 먼 산들에 차분히 어울린다.

푸르른 하늘.

문득 어렸을 적 어머니 손잡고 뒷동산 쑥 캐러갔을 때가 떠올랐다.

소소한 풀내음.

부모의 품이 선물해준 옛 추억에 젖는 일이야말로 이렇게 평 온한 것이다.

마음이 한가로워 한가득 쌓여있던 방귀가 소리 없이 스르르 새어 나온다.

시원하다. 창문을 조금 열어 바람을 맞아본다.

막혀있던 ‘무엇’인가 고구마 냄새와 함께 사라져 간다.

지갑 속에서 꼬깃한 종이를 한 장 꺼낸다.

훈련소 들어가던 길. 어머니가 나에게 쥐어준 편지.
‘사랑하는 내 아들아 언제나 어린 철부지 내 새끼로만 내 곁에 있을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 나라의 부름을 받아 씩씩한 군인이 되었구나.
인내는 배우되 숨겨 아파하지 말거라. 용맹함을 기르되 독해 쓸쓸해지지 말거라.

전우는 깊이 사귀되 적을 두지 말거라. 전투에 이기는
법을 익히되 전사로 용서 받지 말거라. 어미를 버리되 조국을 버리지 말거라.

꼭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 되어 돌아오너라.
언제나 너를 믿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멋진 아들에게’

<해병대지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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