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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식, 제 아내보다 해병대를 더 사랑했습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번뜩이는 눈빛, 특이한 박수, 팔각형의 모자에 빨간 명찰…. 바로 대한민국 해병대원의 모습인데요. 누구나 갈 수있지만 해병대의 빨간 명찰은 아무나 달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강철같은 체력과 정신력, 자부심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귀신 잡는 해병대', '신화를 남긴 해병대’로 불리는 대한민국 해병대는 육·해·공군보다 훨씬 소수인데도 그 차지하는 위상은 실로 대단합니다. 반세기가 넘는 역사 속에서 빛나는 무용(武勇)을 떨쳐 '투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정예집단’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해병대에는 신화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제 22대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그는 총알이 빗발치는 베트남전에서 최전선을 누볐고 사령관이 돼서는 '앞서가는 최강 해병대론’을 부르짖으며 해병대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간직하라’고 말하는 전도봉 전 해병대 사령관. 국군의 날을 맞아서‘진정한 군인정신, 나라사랑의 길은 무엇인 지’10월 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봤습니다

 

◇ 해병대는 강한 자긍심과 긍지를 가져

 

▶ 대한민국 군인을 65만 정도로 했을때, 해병대는 한4% 정도 됩니까?

 

한 2만 7천여명으로 봐야죠.

 

▶ 그럼 예비역 하신 분들까지 합하면 얼마나 되나요?

 

우리 해병대를 거쳐가는 분들이 1년에 1만 2천명 정도로 된다고 보면,58년의 역사이니까 70만명 정도 되겠죠. 그런데 우리 해병대는 특이하게도 가족들도 다 해병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족까지 합치면 200만이 넘는다고 봐야죠.

 

▶ 가수 김흥국 씨만 봐도 그렇고 해병대 나오신 분들은 제대 후에도 소속감이 참 유별난데, 그런 자긍심은 어떤 이유일까요?

 

한 번 해병대를 거쳐가면 누구나 한 번 최고의 군인, 최고의 인간이 되어 보았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남아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 김흥국씨도 그런 면에서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Few, The Proud 그대 이름은 해병대’그야말로 소수정예의 자긍심인데요, 그것 이외에도 자긍심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우리가 보통 쓰는 슬로건들이 굉장히 많죠. 예를 들면‘누구나 해병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좋은 길, 맑은 날씨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즐겨하는 군인들이다’ 힘든 곳을 더 좋아하는 군인들로 표현되죠

 

▶ 22대 사령관이셨는데요,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신건가요?

 

제법되었죠. 1999년 6월부터 1998년 4월까지 김영삼정부 시절에 해병대 사령관을 했습니다.

 

▶ 예편은 언제 하신건가요?

 

1998년 4월에 했습니다

 

▶'신화적인 인물이다' 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 말이 과장되고 부담스러우신가요, 아니면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시나요?

 

제가 하도 해병대 생활이 기이하고 특이한 경력을 가져서 많은 부하들이 '우리 사령관은 참 신화적인 사람이다.’라는 표현을 했죠. 그러나 저의 그 내면 세계는 정말 너무 힘들고 어렵고 많은 고난과 슬픔과 기쁨이 다점철된 하나의 인생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죽어야 할 곳에서 살아남고 하다보니까 우리 대원들은 신화적인 사람으로 불러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해병대 조직에서 제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아주 특이하게 살았던 역사 때문에 참 그렇게 승화해서 표현하는 거죠. 사실은 제가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했고, 바치고 싶은 것을 바쳤을 뿐이지 제 자신을 특이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 해병대가 특이한 것은 팔각모, 빨간 명찰 등 여타 다른 군인과는 다른것이 특징인데요. 물론 뜻이 있는 것이겠죠?

 

팔각모를 우리 선배들이 만들 때 아주 좋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화랑도의 세속 오계와 3가지 금기사항을 합해서 팔각으로 만들어 그 모서리마다 화랑도의 정신을 담아주었습니다. 국가에 충성하라, 부모에 효도하라,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마라, 벗에게 믿음으로 대하라,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 라는 것이 세속5계이죠. 또, 3가지 금기사항은 욕심을 버려라, 허식, 허영을 삼가라는 것으로서, 이런 금기사항과 계율들이 우리 팔각모를 만들었습니다. 빨간 명찰은 우리 선배들이 항상 평시에 ‘땀을 많이 흘리면 피를 적게 흘린다.’고 해서 빨간것은 ‘피’, 노란 것은 ‘정열’ 로 봤죠. 항상 땀과 피를 동시에 생각하는 군인으로 저희들이 상징되어졌습니다

 

 

◇ 대학시절 수감으로 육군 ROTC 퇴출, 해병대 사관후보생 자원 입대

 

▶ 해병대가 창설된 것이 1949년, 진해에서였죠? 그 때 380명 밖에 안되었다고 하던데요

 

그 때 6.25 전쟁이 나기 전이니까요. 그 때 해군 참모총장님께서'우리해군에도 일본의 육전대나 미국의 해병대처럼 땅과 바다에서 동시에 싸울 수 있는 해병대가 있어야겠다.’해서 원래는 해군에서 380명의 적은 인원을 뽑아다가 해병대를 창설한 겁니다. 창설은 아주 빈약하게 했죠

 

▶ 장비도 아주 허술했고, 맨발로 훈련을 받기도 했다던데, 그 말이 맞습니까?

 

예,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 해군도 힘들었는데 우리는 더 하죠. 아직 우리나라가 막 해방돼서 군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던 때라 창설당시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 그럼 전도봉 사령관께서도 그 당시 해군 소속이셨나요?

 

해군장교가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부분이 해병대로 넘어오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저처럼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 사관후보생으로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병대는 1년에 한 250명의 장교가 필요한데, 그중 거의 다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사 출신만으로는 부족하니까요

 

저는 연세대학교 다니다가 왔는데, 대학때 육군 ROTC 4기로 육군 장교가 되고 싶었는데, 그 때 한창 6.3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그 데모를 자꾸 방해하는 소위 깡패 집단이 신촌역 앞에 있었는데,그 깡패들을 소탕하는 곳에 제가 있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한달 동안갇혀있었죠. 그 바람에 육군 ROTC에서 퇴출되고, 군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졸업하고 나서 해병대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습니다

 

 

▶ 그 시절에 감옥에 갔다하면“사람 다 되었네”하던 시절 아닙니까?

 

그 때는 군사혁명정부 시절이니까 전부 군법회의였고, 잡혀가면 거의 반 죽을 때였죠

 

▶ 그러면 해병대는 어떻게 가시게 된 것인지요? 특별한 동기가 있으셨나요?

 

그 때 군대는 필수적으로 갔다 와야 하는데, 제가 어차피 졸업을 했으니까 사병으로 군대생활을 해야 하는가, 장교로 가야 하느냐 할 때였는데요. 병사로 가도 2년 6개월 근무해야 하고, 장교로 가면 해군은 4년인데, 해병대만 유독 3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간이 짧으니까 이왕이면 해병대 가서 군복무를 하겠다고 해병대를 선택했죠. 

그런데 저의 어머니가 많이 반대했습니다. 그 때는 어디 해병대를 군대로 생각했습니까? 어머니 말로 "야, 이놈아, 거기는 군대도 아니라카더라. 개병대’라 카더라, 근데 네가 거길 왜 갈라카노?” 라고 하셨죠

 

▶ 그 때도 ‘개병대’라는 말이 있었나요? 그 말은 굉장히 비하하고 낮게 보는 표현인데, 그 때 왜 그렇게 불렀나요?

 

그 때 5.16 혁명이 일어났고, 선배들은 6.25 전쟁을 치렀는데, 전쟁을 치른 군인들은 돌아왔을 때 상처도 입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하니까 이상한 행동들을 많이 하잖아요. 저 역시 월남전쟁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똑같은 경험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선배들이 그 당시에 보여주었던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전쟁후유증이 국민들에게 개병대로 비춰진 것으로 저는 봅니다

 

▶ 그 때 창설 초기의 훈련은 어땠었나요?

 

지금 그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상상을 못하는데요. 우리 대원들이나 하사관들 모두 힘든 훈련이죠. 그런데 그들이 볼 때 장교 훈련을 보면 입을 벌리고 말을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만큼 엄하고 많이 힘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병사들이 장교들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는 기품이 훈련속에서 생겨난 겁니다

 

▶ 그럼 낙오되는 분들도 많았겠는데요

 

어떤 기수들은 절반이 낙오하기도 합니다. 저희 동기생 중에도 12명이 낙오를 했는데, 임관을 못하고 실패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그렇다고 해서 다른 군보다 지원이 많다거나 환경이 좋은 것은아니었나요?

 

환경이 좋은 것은 없는데, 단 하나 복무기간이 3년으로 짧다는 그 메리트 때문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등 일류 대학 출신들이 많이 갔었죠 아주 좋은 젊은이들이 해병대에 많이 갔습니다

 

◇ 공군부대 사건으로 군 떠났다가 1년 뒤 다시 소위로 임관

 

▶ 당시 부산의 유명한 조폭 ‘황우’와 결투를 하셨다는 얘기도 전설적으로 들리던데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나요?(웃음) 정말 숨겨진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 때 해병대 소위 임관되고 나서 철이 없고 겁도 없을 때니까 그 분 한테 덤벼들었죠. 그 분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제가 어디 되겠습니까? 그 분이 부산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분이었죠. 제가 뭣도 모르고 보자고 했죠. 저는 지금도 제가 이긴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이긴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분은 참 훌륭한 분이었어요. 제가 지금도 잊지못하고 항상 기억합니다

 

▶ 어떤 상황이었나요?

 

말씀드리기 곤란한 부분도 있습니다. 제가 "항복할래,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래?”했더니, 그 분이“자기가 졌다. 그만 두자.”해서 제가 받아들였는데, 뒤에 알고 보니까 제가 이긴 것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 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 몰랐어요

 

▶ 조폭이라면 그 당시 경찰이 관여하는 상황 아니었나요?

 

경찰들이 완전히 큰 형님으로 모시고 계셨죠. 심지어 우리 관할하는 헌병대장도 그 분을 큰 형님으로 모시고,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 그런데 어떻게 그 분은 전 사령관을 보자마자 “그만 하자.”고했을까요?

 

‘기(氣)싸움’에서 제가 이긴 것 같아요. 그만큼 장교훈련이 아주 특이한 훈련인 것 같아요. 벌써 생김새부터 다르죠. 눈빛부터 다르죠. 한 6개월 이상 훈련을 받고 나면 사람이 아주 다른 사람이 되잖아요. 그런 ‘기(氣)’에서 이긴 것 같아요

 

▶ 해병대 하면 강한 단결력, 동기애로부터 출발하는데요. 훈련과정에서 그렇게 끈끈해지는 건가요? 단결력이나 동기애는 다른 군에서도 다 강조하는 것인데, 해병대가 더 특별한 이유는 뭘까요?

 

바로 우리 전술교육의 싸우는 방법이에요. 싸우는 방법이 쉽게 말하면, 항공기나 함정에 탑승해서 적진에 들어가는 전술 아닙니까? 우리 땅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적 속으로 들어가는 전술이니까 살아남는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서로 뭉쳐야 하는 것,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우수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야 살아남죠.

소위 해병대가‘무에서 유를 창조하자’는 것은 우리가 적진에 들어가서 살아남자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전투력과 단결력이 상대적으로 우세하죠. 이것은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하나의 아주 최소한의 수단입니다

 

▶ 공군부대를 쳐들어간 사건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사령관께도 여러 가지 후유증을 남긴 사건이기도 하던데요

 

그 당시에 많은 분들이 깜짝 놀랐죠

 

▶ 그러니까 해병 대원들이 버스를 탔다가 공군 부대원들과 사소한 말싸움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자존심 대결의 상황까지 간 것 같아요?

 

바로 잘 보셨네요. 제가 훈련받고 소위로 임관 되었을 때는 해병대장교가 천하무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훈련도 받았고요. 그런데 천하무적이 또 하나 있더라고요. 공군의 빨간 마후라 전투기 조종사요. 제가 그들을 그 때 보고 우리 아닌 다른 천하 최고가 있구나 그때 처음느꼈죠.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친구들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시비 끝에 발단이 되어서 훈련받는 저희 기초반 장교 전체가 공군학교에 있는 빨간 마후라 전투기 조종사 전체하고 붙었으니까요. 굉장히 큰 사건이었죠

 

▶ 그 싸움의 발단은 무엇이었습니까?

 

버스가 부산에서 출발하면 첫 출발지부터 해병대가 타고 공군 전투기조종사들은 중간에서 타니까, 마지막 버스는 만원이었죠. 그래서 문을 열고 타자고 하는 것을 해병대 장교들이 안 열어준 거죠. 그래서 뒷문으로 타려고 하는데 안 열어주니까 앞문으로 가면서 해병대 장교들한테 맘에 걸리는 욕을 좀 했죠. 그러니까 앞문으로 탄 장교들을 해병대장교들이 손을 좀 봤죠. 비행학교 내리면서 공군 장교들이 욕을 막 하면서 내렸죠. 그래서 해병대 장교들이 쫓아 내려가서 잡아다가 싸웠는데요. 그것이 발단이 돼서 공군장교 전체가 그 버스를 에워쌌고, 그안에 타고있던 해병대 장교들이 거의 초죽음 되도록 얻어맞았죠

 

 

▶ 전 사령관님도 그 버스 안에 계셨나요?

 

저도 버스 속에 있었습니다. 버스 속이고 민간인들도 많아서 우리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죠. 그들이 버스 유리창을 부시고, 밀어부치고 하니까 참 힘들었죠. 그래서 초기에 우리가 많이 다쳤습니다. 그래서 해병대 장교를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분개해서 공군비행학교로 쳐들어 간거죠. 그래서 문제가 복잡하게 된 겁니다

 

▶ 쳐들어갈 때는 맨손으로 가셨습니까?

 

맨손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무장을 하면 비겁하고, 공군 장교들 정도는 맨손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맨손으로 갔습니다.

가서 상황은 저희가 다 평정하고 사과까지 받아내려고 했는데 공군비행장 전체 장병들이 다 저희를 포위해서 싸움이 더 커졌죠. 우리는 한 100여명이었고, 공군기지에는 사병들과 장교 전체가 싸움을 벌였으니까요. 장교들은 기본적으로 지키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것은 안하는데... 그러나 병사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돌도 던지고, 쇠스랑도 가져오고, 낫도 가져오고, 칼도 가져오니까요.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차원이었어요

 

▶ 그래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공군과는 나중에 자매결연도 맺고 화해가 되었지만, 전 사령관님은 옷을 벗는 상황이 되셨어요?

 

누군가는 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저희 동기생 중에서 기소되어 군법회의에서 "차라리 제가 옷을 벗고 가겠다" 고 제가 법정에 지원을 했죠. “대신에 저희 전체 동기생들과 제가 모셨던 상관들 다 그대로 살려준다면 저 혼자 옷을 벗고 해병대를 떠나겠다" 해서 제가 옷을 벗고 해병대를 떠났었습니다. 그때 전두환 대통령 때 법무장관을 하던 이양우 법무감이 저희 해병대 법무감이었거든요. 그 분이 단한가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전 소위는 내가 군대는 필한것으로 처리하겠다. 대신에 옷을 벗자" 해서 제가 동의하고 옷을 벗었습니다

 

▶ 그 때 심정은 어떠셨을까요?

 

누군가 한 사람은 희생을 해야 했는데, 저희 동기생 중에 마지막에3명이 남았었거든요. 근데 한 장교는 이미 결혼을 했고, 다른 한 장교는 어렵게 임관을 했는데 그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은 가기가 참 어려웠어요. 그래서 차라리 그렇다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여건은 제가 제일 나은 것 같았어요, '해병대 떠나서 사회에 가서 새 출발하겠다.

생각하고 옷을 벗자.’마음을 먹고 제가 떠나게 되었죠

 

◇ 월남전에서 살아남은 것은 정말 기적 같아

 

▶ 그런데 그것이 “필사즉생(必死卽生)”이 되었죠?

 

지금도 제가 가장 신뢰하는 격언입니다.'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옷을 벗었는데 육군에 가라는 영장을 받았습니다. 해병대 장교로 있다가 어떻게 다시 육군으로 갑니까? 그래서 논산 훈련소에서 있다가 다시 또 오게 되었죠

 

▶ 그 때 상황이 그렇게 막 할 수 있었나요?

 

근데 그것이 법적으로는 맞아요. 제가 소위로 임관하고 근무한 기간이 2개월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등병 군번으로 해서 군을 필하는 제도가 미치지 못했어요. 군 생활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군 생활이 제적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제적되니까 다시 군대를 가야돼서 논산훈련소로 가게 된 겁니다

 

▶ 그 이후에는 상황이 어떻게 변했나요?

 

그래서 제가 이양우 법무감을 찾아갔죠. 제 군대 문제는 해결된다고 했는데 다시 육군으로 논산훈련소에 가는 것은 힘들다 라고 했죠. 그래서 그 분 도움으로 제가 국방부에 소청 심사를 하고, 1년 뒤에 해병대 소위로 다시 임관했습니다

 

▶ 그러면 후배 기수들이 볼때 껄끄럽고 그런 분위기는 없었나요?

 

껄끄러운 것은 없었는데 전부 저를 두려워했죠. 제가 가는 곳마다  조그만 변화와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제가 해병대에 들어오니까 저의 동기생들은 전부 진급을 하여 중위 아닙니까?

 

근데 제가 소위계급장을 달고 다시 왔는데, 그 당시에는 후배들이 제 동기생처럼 계급장을 하나 더 높이 달았었어요. 중위도 아닌 친구들이 하나 더 높이 달았는데 제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가니까 이것이 문제가 된거예요

 

제가 무서우니까 다시 소위 계급장으로 내려 와야 하잖아요? 그래서 중위 계급장 달고 있던 그 친구들이 다시 소위로 내려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하들 보기 얼마나 민망해요?  우리 소대장님이 중위였는데 전도봉 소위가 오니까 나는 중위 계급장 달 수 없다, 나는 소위다, 너희는 달고 싶으면 달아라 하니까 후배들이 못 달더라고요. 그래서

저처럼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죠.

 

▶ 그러시다가 베트남전에 가신 것은 일종의 터닝 포인트 같은 생각도 들던데요?

 

국방부에서 소위 계급장을 달아줄 때 그 때 위원분들이 하신 말씀이 있었거든요. “저 친구는 전쟁터에 가면 소대장을 잘 할 친구다.” 라고 하셔서, 제가 “맞습니다. 보내주시면 소대장을 아주 목숨 걸고 잘 하겠습니다.” 했더니, 저보고 소위 임관을 다시 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약속을 지켜야죠. 그 당시 청룡부대 소대장들이 굉장히 부족할 때인데 제가 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데리고 있던 모든 상관들은 제가 굉장히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일거수 일투족을 매일 상급 지휘관한테 보고해야 하잖아요. ‘저 놈이 큰 일을 저지르고 온 놈이니까 또 무슨 큰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해서 항상 동태를 지휘관들이 감시하고 보고하는 체제였어요. 그러니 까 저의 상급지휘관들이 굉장히 힘들었죠

 

▶ 그럼 베트남에 가셔서 최전방에서 실제로 전투를 하신 거구요

 

저는 소대장 갔을 때가 1968년 구정공세 시작할 때 갔으니까요. 그때가 가장 월남전 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제가 수없이 많은 전투에 참가하고 많은 적들도 만나고 심지어 저는 월맹 정규군 CP에 들어가기도 하고, 월맹군 연대 CP 입구에서 제가 적한테 포위되기도하고,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 같아요

 

▶ 포위까지 되었는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다들 총 한 방 맞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저도 지금생각해도 어떻게 그 기적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제 부하들도 한 명도 다치지 않았고요

 

▶ 정말 기적이군요. 부하들을 잃거나 그런 일도 없으셨구요?

 

죽은 부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소대장 하면서 가장 처음으로 부상 당한 친구가 신영균 일병이었는데, 영화배우 신영균씨와 이름이같아요. 그 친구는 손목에 뼈와 뼈 사이로 실탄이 지나갔어요. 근데  이 친구가 죽는 소리를 해요. 그래서 제가“야, 임마, 내가 만져보니까 뼈 사이로 총알이 지나갔는데 얼마나 다행이냐? 너는 살았다" 했죠.

그때는 치명적이지 않을 정도로 총 맞아서 후송 가는 것이 꿈 아닙니까?

그 외에는 이리봐도 저리 봐도 살아날 길이 없거든요. 그 친구가 얼마나 부러운데요. "살아서 나가니까 소리 지르지마.”라면서 후송을 보냈죠. 그렇게 부상을 당해서 후송을 보낸 친구는 있지만 죽은 부하는 한명도 없습니다

 

▶ 그것도 기적이 아닌가 싶네요. 그런 것이 혹시 신앙생활과 더 깊게 연결된 계기는 아니었나요?

 

제가 사실은 연안부두에서 청룡부대 파월할 때 기드온 협회에서 성경책을 나누어 주었어요. 그래서 제가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 성경책을 주머니에 넣고 가면 하나님이 나를 살려 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제가 그 성경책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난 것도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봐요

 

◇ “해병대는 해병대 사령관이 지휘하는 것이 맞는 것이죠.”

 

▶ 해병대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까지 하시면서 '지옥에서 온 사자다' '잘못 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하는 지휘관', '피도 눈물도 없는 군인이다' 라고 부하들이 평가를 했는데요. 부하들의 눈빛만 봐도 그심리상태를 다 아셨다고 하니까 이것이 전설을 지나 신화적인 사령관이라는 표현이 되었나보죠?

 

제 부하들이 저를 그렇게 본 것을 저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오늘 죽을 놈인지도 알았으니까요. 소대장 할때도 오늘 위험이 있을까를 미리 짐작할 수 있었고, 멀리 있는 부하들이 뭐하는지 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부하를 가깝게 지내고 했는데요. 제가 부하들에게 그렇게 보였던 것은 해병대의 기본적인 전술교리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었죠. 사실 우리가 다른 군대와 다른 것이 육군은 지킬 영토가 주어진 군대이고, 해군은 바다가 주어졌고, 공군은 하늘이 주어진 군대인데, 해병대는 지킬 바다, 땅, 하늘도 없는 군대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들보다 더 나아야 존재하는 군대이기 때문에 우리 부하에게 항상 그 수준을 요구하니까 저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아요

 

▶ 군 생활 하시면서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분이셨나요?

눈물 흘린 적은 없으신가요?

 

제가 예수님을 알기 전 까지 사실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냉혹한 사람이었는데, 제가 어느 날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부터는 제가 눈물이 너무 많은 군인이 되어 버렸죠. 저를 알고 지나온 날을 더듬어 보면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 지금도 눈자위가 붉어지셨어요. 분위기를 좀 바꾸겠습니다.‘개똥벌레’ 라는 노래를 불렀다가 그야말로 개똥처럼 되었다는 얘기도있던데요

 

제가 지금도 '개똥벌레' 그러면 깜짝깜짝 놀래요. 제가 그 때 주일날이어서 교회 갔다가 집에 왔는데, 사령관님이 집으로 갑자기 전화를하셔서“전 장군, 내일 일찍 계룡대 내려가서 全軍이 하는 노래자랑에 해병대 대표로 참가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는 노래도 잘못하고, 노래 잘 하는 이장군, 김 장군 보내세요. 저는 안 됩니다. 

거기가면 저는 망신만 시킵니다.”하며 거절을 했는데, 밤 9시 넘어서또 연락이 왔어요. "다른 장군들은 연락이 안되니까 꼭 참석하라. 명령이다.” 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깜짝 놀라서 둘째 아들과 같이 연습을 하다가 잘 부를수있는 곡이 나훈아 씨의 ‘머나먼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계룡대에 가서 보니까, 당시에 홍순창 PD라는 분이 그것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전체를 보니까 해병대는 어디도 끼어 있지 않더라고요. 

물어보니까 “해병대가 끼어들 자리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불렀지?’ 하면서 다른 장군들 있는 곳으로가 보니까 각 군 장교들이 무슨 노래 준비했냐고 물어봐서 ‘머나먼 고향’ 준비 했다고 했죠

 

그랬더니 해군 제독 한 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곡은 벌써 신청 다해놨다고 하시면서 저더러 포기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무리 봐도 해병대가 끼어들 곳이 없는데 안 하겠다고 물러났죠. 그래서 자리로 오는데 그 때 이상벽 씨가 사회를 보셨는데 오프닝 하자마자 해병대인 저부터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피할 수도 없고 해서 무대까지 가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개똥벌레’를 하겠다고 했어요

둘째 아들이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옳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어떻게 하고 내려왔는지 저는 전혀 기억을 못했습니다. 얼마나 긴장하고 놀랬는지요. 그래서 내려 와서 보니까 육해공 장군도 다 가버리고 없더라고요. 어디 장군을 불러다가 저렇게 바로 시키는 법이 있느냐, 졸개들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게 하고 하냐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저 혼자 남은 거예요

 

'내가 못할 짓을 했나, 이거 큰일 났구나' 싶어서 그 날부터 이불 둘러쓰고 하도 겁이 나서 일주일 동안 TV를 안 봤습니다. ‘해병대 장군이 하필이면 ‘개똥벌레’를 부르느냐, 밑에 부하들하고 체통없이 춤추고 무슨 짓이냐‘ 하고 해서 저는 완전히 비빔밥이 되었습니다

 

▶ 그 노래의 가사는 참 좋은 의미인데, 그럼 가곡이나 다른 것을 불러야 된다고 생각했던 건가요?

 

장군이라면 그런 점잖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전 그때 사실은 왜 밑에 부하들과 어울려서 같이 춤추고, 개똥벌레’노래 부르는 것이 왜 나쁘냐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괜찮은데, 다른 모든 장군들은 다 아니더라고요

 

▶ 그러고 보면 전 장군님은 파격, 개혁, 혁신의 마인드를 갖고 계셨던 것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해병대의 독립을 위한 투쟁도 하셨다는 기록도 있는데요. 중간에 해병대가 해체된 적까지 있었습니까?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완전히 해체를 했죠. 그래서 해군에 통합되고 해병대는 25년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독립보다는 해군 속에 있더라도 해군과 해병은 역사와 전통, 싸우는 방법, 관습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잖아요. 그럼 서로 다른 것을 해군총장이 지휘하는 것보다는 해병대 사령관이 해병대를 지휘하게 해줘야죠. 그것이 사실 맞는거죠. 그걸 제가 요구했던 것입니다. 해군참모총장이 수군의 전문가라고 한다면, 저는 해병대의 전문가 아니냐 해병대의 전문가에게 해병대를 맡기는 것이 맞다라고 해서 제가 독립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 그런 것이 하극상으로 비춰졌던 건가요?

 

군에서는 지휘권이 가장 큰 문제이니까 아래 있는 지휘관이 함부로 요구하는 것은 좀 고약한 요구였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해병대를 지휘하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은 역시 해병대는 해병대답게 해병대사령관이 지휘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해군 속에 해병대가 있더라도 서로 다른데, 특히 해군은 큰 바다로 나가면 그 해군참모총장이 부담

해야 될 지휘의 폭이 엄청나고 과도하고 다양하게 되는데, 해병대는 해병대 사령관이 지휘하는 것이 맞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지금은 독립적인 면이 어떻게 되어 있나요?

 

여러분들도 지금 다들 느끼시잖아요? 지금 대한민국에는 육.해.공군만 있고 해병대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해병대는 엄연히 존재하잖아요. 해병대가 자기 맡은 일을 바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군대로 양성할 수 있도록 지휘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병대가 지금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많은 기능이 사령관에게 이양되지않았습니까? 사령관이 할 수 있도록 법률도 고쳐지고 했는데 저는 그보다 더 완벽하게 사령관이 해병대를 지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소신입니다

 

 

▶ 그래서 ‘최강 해병대론’이 바로 그 말씀이신가요?

 

제가 처음 '최강 해병대론' 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낼 때 많은 사람들이 해병대를 알고, 해병대를 거쳐간 많은 대원들이 해병대를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 그들은 모릅니다. 우리 내면속에 있는 우리의 정신세계, 우리의 역사와 전통속에 숨겨진 얘기들을 다 담고 있고, 그 핵심가치가 저희 깃발에 쓰여져 있습니다,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라는

그 가치가 굉장히 귀중한 가치입니다. 그걸 이해하는 우리의 헌신과 자부심은 거기에 맞춰야죠. 그래서 제가 ‘앞서가는 최강 해병대’ 만들 때도 “여러분들이 그 핵심 가치를 지켜 갈 때만이 우리가 최고의 군인이 될 수 있고, 최고의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3군에 앞장서 가는 신뢰받는 해병대가 될 수 있다.” 라고 했죠. 그리고 해병대가 국민들한테 사랑받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잖아요? 왜 사랑받아야 하는가? 사랑 받아야 강해지고, 강해져야 싸워도 이길 수 있죠. 사랑받는 해병대, 그것이 최강 해병대의 기본입니다

 

▶ 그래서 ‘Once marine always marine.’ 라는 말도 남아있는거겠죠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 라는 말은, 말은 쉽죠. 그러나 한 번 거쳐 갔다고 해서 영원히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면속에 끊임없는 변화와 노력을 해야 소위 ‘영원한 해병(always marine)’ 이 되는 거죠. 저는 항상 강조합니다. 해병대 지원을 하면 가정에도 국가에도 유용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변화된 하나의 인간을 해병대에서 내보내는 것이 할 일이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해병대의 가장 큰 싸움이라고 봅니다

 

◇ 해병대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존재하는 군대

 

▶ 전 사령관님은 가정에서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부끄럽네요. 사실 제가 현역에 있을 때는 제 자식, 제 아내보다 해병대를 더 사랑했거든요. 그걸로 제 설명을 대신하고 싶네요. 저는 해병대를 너무 사랑했어요

 

▶ 사모님이 어떻게 바가지는 안 긁으셨어요?

 

저는 바가지 긁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고요, '남편이 간첩으로 오래 살면, 마누라도 간첩으로 산다' 라는 말처럼 해병대로 오래 살다보니 제 아내도 해병대가 되어서 한 번도 그런 것은 못느껴 봤습니다

솔직히 미치면 같이 미치고, 사랑하면 같이 사랑하고 한 사람이 되는 거죠. 지금도 아내가 가끔 저에게 "당신은 나보다 해병대를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 아드님들도 해병 가족이셨다고요?

 

저는 원하지 않았는데 저의 아들들도 다 저 모르게 자기들이 지원해서 해병대 생활하고 마쳤습니다

 

▶ 요즘 개인부터 스포츠 단체,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해병대 캠프의 인기가 대단하거든요

 

제가 사령관 할 때 그 캠프를 처음 만들었죠. 그 때 제 생각이 맞았던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해병대가 가진 가치와 자부심, 긍지를 공유하는 것이죠. 체험함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기가 있고 계속 이어지는 거죠

 

▶ 해병대 박수도 혹시 전 사령관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요?

 

제가 MBC 우정의 무대가 한참 할 때 주철환 PD께서 저희 부대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박수 치는 동작을 여러 가지로 화면에 비춰봤는데 다 맞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박수를 하다가 높이 올렸다 다시 아래로 치는 것은 우리의 전술 교리와 맞습니다, "최고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와 평범속에 묻어라' 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전술 교리죠. 그래서 사병들한테 박수 손동작을 높이 올렸다가 다시 내리면서 그 구령으로 했는데 그것이 히트를 쳤어요. 너무 보기 좋고 잘 맞더라고요. 그래서 해병대 박수로 그 때부터 자리매김을 했을 겁니다

 

▶ 해병대에 바라시는 말씀이나 국민들에게 나누고 싶은 말씀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우선 제가 해병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역시 육.해.공군과는 다른 군대입니다. 오직 국민 속에서 사랑 받아야 존재할 수 있는 군대입니다. 그래서 국민 속에 사랑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이 사랑받는 것인지 너무 쉽잖아요? 쉬운 것부터 하라고 말하고 싶고요. 국민들에게는 이 말씀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그 유명한 거장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마지막 최후를 마치기 전에, 그를 찾아갔던 기자가 "당신이 살면서 가장 무엇이 필요하다고 여기느냐?”고 묻자, 그 거장이 한참 생각하다가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 없다. 그 대신에 내 곁에 비록 부상을 당했을지라도 단 한 사람의 해병대원이 내 옆에 있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라고 말했죠. 그 표현처럼 정말 내가 위태하고 불안하고 힘들 때 누구를 둘 것인가 할 그 때 여러분들이 해병대를 불러 준다면 그 때는 해병대가 언제든지 여러분 곁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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