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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1995년 5월호에 기재 - 이은미

「영원한 현역」 70만명의 독특한 사회생활 죽을 때까지 뭉친다, 왜? 「해병이니까」
해병들도 잘 모르겠다는 해병정신, 신앙처럼 빠져들게 하는 해병정신을 부르짖으며 70만 해병 예비역들이 모여 전우회를 조직하고 지역마다 기동봉사대를 발족해 사회봉사에 앞장서고 있다.
혹독한 훈련과 무자비한 기합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연대의식으로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을 부르짖는 그들,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끈끈함을 주는가
이근미 자유기고가 (gosus@dreamwiz.com)

<해병은 목소리가 크다>


해병 예비역의 특징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목소리가 크다는 걸 우선 들고 싶다.
취재 중에 만난 해병 출신들은 한결같이 목소리가 컸으며 그것도 나이가 많을수록, 그러니까 기수가 빠를수록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몇 사람과 동시에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대한민국의 40대 이상 남성이라면 틀림없이 어깨가 축 처져 있게 마련이건만. 그들은 확실히 달랐다. 무엇이 그들을 활기 넘치게 하는 것일까.

해병들은 그 근원을 해병정신이라고 말했다. 제대하고도 여전히 모이는 힘, 남들 다 잘 때 순찰을 돌고, 어디서 해병 출신이 불이익을 당하면 달려가서 편들어 주고,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 높여 『필승』을 외치며, 택시 자가용 할 것 없이 해병대 심볼 마크를 달고 다니고....
해병 출신이라는 티를 팍팍 내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무조건 『해병이니까』라고 간명하게 대답했다.
해병참모부가 정의한 해병정신은 단결정신, 애민(愛民)정신, 인내정신,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병들은 자신들도 해병정신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얘기한다. 

 

 

3월 29일, 영화진흥공사 시사회장에는 해병 예비역들이 「해병 묵시록」이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차있었다. 6·25 때 북한의 화학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해병대가 투입되고 목표를 달성한 해병들이 장렬히 산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시사회가 끝나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영화의 촌평을 시작했다. 옆에서 들어보니 해병대의 용감무쌍함이 덜 표현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 그때는 팔각모가 아니었으며 해병이 아닌 수병이라고 불렀다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지적을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감독인 이병주씨가 달려와 신세대 해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을 했지만 그들은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계속 노병(老兵)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자 갑자기 이병주 감독이 『저도 해병입니다』라고 얘기했고 그때부터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지기 시작했다.

「몇기냐」는 얘기에서부터 「영화 만드느라 고생 많았다」느니 「선배님, 후배」하는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병 몇기입니다』 이 한마디에 해병대 출신들은 언제 어디서건 기수에 따라 순식간에 서열이 매겨지면서 분위가 평정된다.
이후에도 이런 광경을 몇 번 목격했는데 그 이유는 해병은 예비역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므로 모두가 현역이라는 것이다.
<『해병이니까』> 해병대 정훈참모인 박영덕 해군 중령은 『시사회장에 역대 사령관이 여섯 명이나 참석한 것은 해병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얘기했다. 『한 마디로 해병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해병이라는 하나만 가지고 빠져 들어갑니다. 오늘같이 단순한 시사회를 위해 밖에서 해병대 복장을 입고 교통정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저토록 미치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극성스럽습니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해병대 이름을 단 행사가 있을 때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오는 이들을 볼 때마다 불가사의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군사관학교 원양훈련단이 해외에 나갈 때면 어디든지 해병대가 나와서 환영을 해줍니다』 원양훈련단이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해병전우회의 환영 플래카드라고 한다.

 
해외 해병 예비역들은 해병대원만 따로 데리고 가서 시내 구경도 시켜주고 환영식도 성대히 열어주며 용돈까지 두둑이 줘서 복귀시킨다.
『당시 해병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해병 출신 직원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더니 제 짐을 찾는 것에서부터 용달차를 부르는 일까지 일사천리로 해결해주지 뭡니까.
해병복장을 입고 거리에 나가면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극성스러울 정도로 결집력이 강한 이유를 타군(他軍) 출신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현역보다 오히려 예비역이 더한 것 같습니다. 신앙적 차원이라고나 할까요』
그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 해병들은 역시 한마디로 일축한다.
『해병이니까』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창설되었다. 여순사건으로 인하여 군·경을 비롯한 2천명의 관민(官民)이 살해되자 강한 군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시 손원일(孫元一) 해군참모총장을 위시한 해군 수뇌부는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는 해군에 육전대(陸戰隊)나 해전대(海戰隊)와 같은 특수한 전투부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해병대의 창설을 검토하게 되었다. 해군 1기로 입대하여 해병 창단 멤버가 된 고광수(高光壽) 예비역 해병 준장(68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들려준다. 『해군 13기 중에서 차출하여 해병대를 조직했지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으니 만큼 모두들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바다로부터 상륙하여 적지에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필승의 신념이 없이는 그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부터 해병정신이라는 것이 출발하였지요』

해병대 예비역 장교모임인 청룡회 간사 변기룡(邊起龍·48·해병간부 40기·예비역 대위)는 이렇게 설명한다. 『전시에 선봉에 서서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는 임무를 가진 부대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기질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공군 조종사가 비행 기술이 없으면 소용이 없듯이 해병대에 그런 기질이 없으면 임무를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해병이 가져야 할 것이 부대원 간의 강한 응집력입니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향할 때 전 부대원의 단결에 허점이 생기면 몰살하게 됩니다. 배가 뒤집히기도 하고 적의 표적이 되어 집중포화를 받을 수도 있지요. 이런 부대의 특성이 외부의 힘에 강력하고 당당하게 대항하고 또 강한 응집력을 갖게 하는 기질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거기서 해병정신을 찾을 수 있지요』

 

 

<해병은 만들어진다>


타군보다 출발이 늦었고 가장 강한 부대여야 한다는 명제 때문에 훈련은 그만큼 혹독할 수밖에 없었고 그 강한 훈련 속에서 해병정신이 우러나왔다는 것이다.
특히 창설초기에 비가 새는 숙소에서 산나물과 해산물을 채취하여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는 등 갖은 고생을 했는데 이때 단결력과 인내심이 길러졌고 그러한 정신이 해병정신으로 승화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해병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선배들의 혁혁한 전승(戰勝)기록이다.
6·25가 발발하기 전에 있었던 지리산과 한라산 공비토벌, 인천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짜빈동 전투 등 해병대의 전승기록은 무수히 많다.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무적해병(無敵海兵)의 용맹성을 떨친 선배들의 신화를 통해 해병정신을 저절로 배양했다고 말하는 해병도 많았다.

해병대는 유독 구호가 많다.
국민학생이라도 다 아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고전적인 구호에서부터 「귀신 잡는 해병」「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무적해병」「신화를 창조하는 해병」등. 그 중에서도 해병의 긍지가 잘 드러나는 문구는 바로 「누구나 다 해병이 될 수 있다면 결코 나는 해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구호이다.
해병대라면 누구나 이러한 구호와 팔각모, 세무 워커 그리고 빨간 명찰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피와 땀을 상징한다는 빨간 바탕의 노란 글씨에 대한 애정이 몹시 강하다.
해병들은 강한 자만이 빨간 명찰을 달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든 빨간 명찰을 달면 해병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월간 팔각모」발행인 김기수(金基洙·35세·해병 461기)는 혹독한 훈련의 한 예로 완전무장 구보를 들었다.
50분 뛰고 10분 쉬게 되어 있는 훈련의 경우 해병은 50분간 단지 전진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분쯤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DI(조교)들이 공연한 트집을 잡아 되돌아가서 다시 달리게 한다. 처음에는 달려온 거리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되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달린다.
되돌아온 만큼 아까보다 더 속력을 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달리고 있는데 중간쯤 왔을 때 다시 트집을 잡아 아까 되돌아간 자리까지 돌아가게 한다.
약이 오르지만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간다. 온몸에 비지땀이 흐르고 헉헉대면서 드디어 목적지가 100m 앞으로 다가왔을 때 다시 되돌아가게 만든다.

『그때는 정말 악밖에 안 남아요. 제 동료 중에 한 명이 도저히 못 달리겠다며 드러누웠어요. 물론 실컷 두들겨 맞았죠. 우리는 모두 다시 후퇴를 하였다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약 두 배의 거리를 50분 안에 주파해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두 산삼을 먹은 것은 아닙니다. 악과 정신력이 초능력을 만들어 낸 것이죠. 이러한 독특한 훈련방식을 통해 해병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기수 빳다로 맺어진 전우애>

그는 해병 DI들이 미(美) 해병대에 가서 과학적인 훈련을 받고 돌아와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효율적인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혹독한 훈련을 치르고 나면 자신도 모르는 자신감이 생기고, 그 자신감을 발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힘까지 갖추게 된다고 김기수씨는 말한다.
해병이라면 정규훈련의 혹독함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우는 부분은 바로 정규훈련이 아닌 기합이다. 해병들이 즐겨 회고하는 일이 바로 「기수 빳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기에서 30기가 있다면, 1기가 2기에서 30기까지 때리고 나면 2기가 3기에서 30기까지, 4기는 5기에서 30기까지 내리 빳다를 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30기는 29대를 맞게 된다.

한 기수에 한 명이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마지막 기수는 그야말로 곤죽이 되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한번 맞은 기수는 악이 올라 더 세게 때리기 때문에 맨 마지막 기수의 엉덩이는 제대로 남아나지 못한다. 보통 저녁 9시에 시작하면 새벽 3시는 되어야 이 기수 빳다가 끝난다고 한다.
해병이라면 이 기수 빳다를 피해갈 수가 없다. 해병 130기인 홍사덕(洪思德) 의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이「기수 빳다」 때문에 보름 동안 엎드려서 잠을 잤던 일과 사령부 의장대에서 총돌리기 훈련 때 양쪽 어금니의 절반이 부서지는 아구창 돌리기 기합을 받았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 힘든 기합을 받을 때 내무반 내에 실탄이 장전된 총이 있어도 결코 군기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해병들의 또 하나의 자랑이다.
『분하면 저 총으로 쏴라』 상관이 이렇게 말해도 혹독한 기합을 치러낼지언정 결코 하극상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가 잘못을 하면 연대책임을 지고 부대원이 몽땅 같이 두들겨 맞는 것도 해병의 전통이다.
그리고 문제를 일으킨 그 사병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사나이 의리라고 말한다.
기합 얘기라면 해병대들은 지긋지긋하기는커녕 좀더 혹독한 기합을 받았노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조세연(趙世衍·50세·해병 180기)씨는 기합에 대한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원산폭격 받으면서 잔다면 이해가 가겠어요. 그것도 철모 위에 돌멩이를 얹고 그 위에 머리를 박고도 그대로 자는 겁니다. 낮에 훈련받느라 녹초가 된 상태에서 밤에 기합을 받으니 원산폭격 정도는 기합도 아니죠. 앞사람이 뒷사람 어깨에 다리를 얹어 길게 늘어서는 한강철교, 팔과 다리를 들고 눕는 나이롱 취침,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이빨이 부러지는 총 물고 서 있기 등 갖가지 기합이 있지만 불만을 말한다든지 이겨내지 못하는 해병은 없습니다. 그 혹독한 기합이 이상하게도 우리를 끈끈하게 맺어 주는 겁니다』

오무부(吳武夫·58세·사병 62기)씨 역시 화려한 기합 역사를 들려주었다.
『언 땅이 녹을 때까지 광목 팬티만 입고 기고 나면 온몸에 피딱지가 엉겨 붙습니다. 영하 20도의 추위에서 팬티만 입고 단독무장을 하고 달릴 때면 온몸에 감각이 없어지지요. 더더군다나 광목 팬티 앞이 터져 있어 더 추웠어요. 간호사들과 빵장사 아주머니들에게 야한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한여름에 맨몸으로 철교 위에 눕기, 땡볕 아래서 빨래하기를 끝내고 나서 너무 목이 말라 호박잎 줄기로 시궁창 물을 빨아먹기도 했다고 한다.

식기에 녹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기합을 받으므로 모래로 깨끗이 닦느라고 무척 고생을 했던 것도 즐거운 추억거리라고 회고했다.

<폭약을 지고 뛰어들겠다>

해병들은 누구나 팬티만 입고 겨울 바다에 들어간 일이며 진해 천자봉을 수없이 오르내린 일 등 힘들었던 훈련과 기합이 강인한 정신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오히려 흐뭇해 한다.
사회에 나와서도 그 정신력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 때 그런 훈련과 기합을 받은 것이 다행스럽다는 것이다.
내가 맞은 만큼 때리면서 연대의식이 생겼고 그것이 자신들을 끈끈하게 엮어준다는,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대부분의 해병들은 신나게 얘기한다.
해병들이 또 하나 단결의식을 갖게 된 것은 해병수난사라고 입을 모은다.
누군가 해병대를 「한(恨)의 군대」라고도 표현했다.
1949년 해병대가 창설될 때 대통령령 88호에 의해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고 명기했다.
해병대의 가장 큰 바람은 해병대를 육(陸)·해(海)·공군(空軍)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군대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해군의 예하부대로 출발을 하였고, 해군의 지원이 없이는 상륙을 할 수 없다는 특수성 때문에 해군에 속해 있다는 것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들이 가장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바로 유신 직후인 73년 10월에 국방 예산의 효율적 운영이라는 명분에 밀려 해군 산하로 흡수 통합되면서 해군참모총장 예하 제 2차장의 지휘를 받게 된 일이다.
6·25와 월남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강한 부대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던 해병부대로서는 사령부가 해체된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해병대 출신 인사들은 특유의 결집력과 전우애로 똘똘 뭉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병대 사령부의 부활을 주장해왔고,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조직적으로 로비를 벌인 끝에, 해체 14년만인 87년 11월 1일 재창설되기에 이르렀다.

미처 법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17년만인 1990년 7월에서야 비로소 법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되었지만 해병들은 언제 또 해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또한 5·16 쿠데타에서 맨 앞에 서서 한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일, 전두환(全斗煥) 前 대통령이 해병의 공수훈련을 없앤 일을 지금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해병들은 다시 해체된다면 이번에는 결코 참지 않겠다고 말했다.
만약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폭약을 지고 국방부로 돌진하겠다는 과격한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해병이 해체되던 73년에 북한에도 육전대가 생겼는데 힘의 균형을 깨지 않으려면 막강한 해병대가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고 모두들 소리 높여 강조한다.

<작은 부대, 적은 예산>

해병이라면 누구나 역대 사령관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고 있는데 그 사령관 중에 4성장군이 세 사람뿐이라는 것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7·8·9대 사령관인 강기천, 정광호, 이병문 대장 외에 다른 사령관이 중장 출신이라는 것이 해병들의 또다른 불만이다.
중장이 사령관을 맡게 되어 있으므로 해병대에서 더 이상 대장이 배출될 일이 없다는 것을 해병들은 애석하게 생각한다.
해병들은 美 해병대가 미국 내에서 얼마나 큰 예우를 받는가에 대해 자주 들먹이는데, 해군 장관 아래 해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이 동격인 4성 장군이라는 것이 그들의 부러움이다.
해군의 예하부대인 관계로 예산이 부족하다는 것과 해병대의 주요 직제에 해군이 파견나와 있다는 것도 큰 불만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정훈을 해군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불만이다.
이러한 불만사항들이 해병대로 하여금 더욱 단결하게 하며, 부족한 사항을 특유의 결집력으로 돌파해 나가는 가운데서 해병정신이 더욱 우러나온다고 그들은 말한다.
해병대가 단결하게 된 원인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소수부대라는 점을 들고 있다.
해병대가 창설되었을 당시 인원은 겨우 3백80명이었다.
시설과 보급, 장비가 형편없는 가운데 전 장병이 동고동락하면서 유별난 단결의식이 생겼다고 해병전우회 홍보국장 김영학(金永學·해간 16기)는 말한다.

『당시에는 한 달에 한 번 그 달에 태어난 장병의 생일을 축하하며 사령관 이하 전 장병이 동석하여 음식을 나누어 먹을 만큼 가족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때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초반의 가족적 분위기가 전통화되었습니다. 올해 83세인 초대 신현준(申鉉俊) 사령관님이 사병 출신에게 몇 기수 누구냐고 묻고 현직 사령관님이 병장 출신과 인사하는 것이 바로 해병대 분위기입니다』

49년 7월 해병 2기로 입대한 이종호씨(65세)는 당시 해병대의 단결력이 유난히 뜨거웠다고 전한다. 『해병대 예산이 없어서 3기를 뽑지 못했어요. 그랬으니 소수의 해병대가 지리산으로 제주도로 토벌을 다니면서 단결력이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죠. 해군에서 예산을 얻어다 쓰다보니 늘 가난했던 것도 단결하게 된 배경 중의 하나였죠. 6·25 때는 압록강이 보이는 곳까지 북진하여 겨우 감자와 양파만 먹고 전투하면서 전우애를 다졌습니다. 사령관 이하 전 대원이 모두 한가족이라는 생각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지요』

당시의 배고픔과 혹독한 훈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도 훈련보다 더욱 힘든 것은 기합이었다는데 맞지 않고 자는 날은 불안할 정도였다고 한다.
자기 전에 반드시 몇 대 맞고 잤으며 안 맞은 날은 자다가 깨서 다시 맞았다고 한다.
『그렇게 기합을 호되게 받아도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이 있어서 반발하는 경우가 없었어요. 만약에 후배 중에 누가 무단외박을 하거나 무단외출을 하면 선배들 손에서 끝내지 그것을 문제화하지 않았어요. 내가 두들겨 패서 끝내지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 건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해병대 전통입니다. 그런 연대의식이 해병만의 끈끈한 정을 만들어 냈죠』
해병대가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것은 선후배 질서가 엄정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타군에서 일어난 신세대 군인들의 하극상을 보면서 해병대만큼은 결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확신했다.

<가장 무서운 상관은 「일수님」>

해병대는 15일마다 입대해 기수를 매기는데 그 1기수 빠른 선배를 새로 들어온 신병이 「일수님」이라고 부르면 깍듯이 모신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상관은 바로 그 일수님이라는 것이다.
해병대는, 분대장은 소대장에게 소대장은 중대장에게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충성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단장이 아닌 바로 위의 일수님에게 충성하여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를 준수하는 상경하애(上敬下愛)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종호씨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술을 먹고 있는데 현역 해병과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취해서 다투고 있었어요. 가만히 들어보니 두쪽 다 해병인데 잘 모르고 다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차렷! 나 해병 2기다」 했더니 모두들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더군요. 그 바람에 맥주 두 짝만 날아갔죠』

해병회보 사무실을 찾아가려고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내려 길을 묻자 한 미화원이 자신도 해병이라며 사무실을 친절히 일러주었는데, 한참 후에 궁금하였던지 사무실로 찾아왔다. 사무실에 모여 있던 해병 출신들이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그를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자신을 「해병 87기인 천기건」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모두들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갑게 맞이했다.

『제가 이렇게 삽니다』 천기건씨가 자신의 직업을 의식해서인지 쑥스럽다는 듯이 얘기하자 군산석재 사장인 조세연씨가 『선배님 같은 분이 없으면 누가 이 나라를 깨끗하게 하겠느냐』며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라』고 말했다.
오무부씨가 자신은 62기라고 소개하자 천기건씨가 갑자기 부동자세로 경례를 하기도 했다.
김기수씨는 자신이 현역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휴가 나왔을 때 알지도 못하는 분이 갑자기 달려와 자신도 해병 출신이라며 담배를 사주고 용돈을 주셨어요. 그래서 주소를 알려주면 돈을 보내드리겠다고 하자 나중에 사회에 나오면 후배들에게 갚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때 참 감격했어요. 언젠가 전철을 타고 가는데 맞은 편에 현역 해병이 앉아 있었어요. 그 해병이 더위를 참지 못했던지 윗옷을 풀어 헤치더군요. 해병기습특공이라고 쓰인 티셔츠가 보일 정도였어요. 시민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생각에서 주의를 주려는데 저쪽에 앉은 신사분이 그 해병에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차려 열중쉬어」하고 구령을 붙였어요. 그러자 그 해병이 일어나서 그 자리에서 구령에 따라 하더니 주의를 듣고 옷을 다시 입더군요』

<벗으면 모두 한 형제>

현역 해병들은 군복을 입고 거리를 다니다 보면 어디서든 선배를 만날 수 있다.
서울 용산역 부근 청룡마크사 앞에서 740기 현역 해병 해병 상병들을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내일이 귀대일이라 신촌에서 놀다가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낯모르는 선배들이 지금도 용돈을 주는지 확인해 보았더니 바로 그 날 낮에 길 가던 선배가 5만원을 주었다고 말했다.
『어떤 친구는 휴가기간 동안 용돈을 무려 50만원이나 얻었어요. 길가다 보면 선배들이 고생 많다며 담배도 사주고 용돈을 주십니다. 그런 일은 해병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거예요. 우연히 해병 선배의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 선배들이 차비를 받지 않아요』

해병복지사업본부 강경서 단장(姜景瑞·해병 163기)은 지난 설날 서울역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현역 해병이 모자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육군 헌병에게 들킨 장면을 목격했던 것.
그는 『머리 아프면 민주 군인이 모자를 안 쓸 수도 있지 그것 가지고 뭘 그러냐』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쳐 후배 해병이 그 자리를 모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안되지만 질책을 당하는 후배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해병대는 옷을 입으면 수직개념으로 상하관계가 철저하지만 옷을 벗으면 수평개념이 되어 모두가 한 형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역 생활을 하면서 맺어진 끈끈한 동지애가 아주 좋은 토양이 되어 언제까지는 우리를 함께 묶어 놓는 것이지요. 내가 입대한 때가 65년 3월인데 당시 해병대 평균연령이 18.8세였어요. 당시 육군은 평균연령이 22.6세였는데 나이도 해병정신을 만드는 데 큰 일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저것 따질 나이가 아니라는 얘기죠. 18세라면 그저 나 하나만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가족이니 부모님이니 생각할 만큼 머리가 복잡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 만큼 더 자기 일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는 거죠』

해병대의 이런 유별난 연대의식이 예전에는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켜 해병대를 「개병대」라고 부르게 하기도 했다.
대전 역전에서 해병대와 육군간의 시비가 잦아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고광수씨는 헌병감 시절의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육군 헌병감이 친구였는데 육군을 때린 해병을 잡으면 함께 때린 해병의 이름을 절대로 대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의리 때문에 이름을 안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정말로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지요. 해병은 누가 맞으면 무조건 가세합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어도 해병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가세해서 싸우는 것이죠. 그러니 함께 때린 해병의 이름을 알아도 안 댔겠지만 몰랐으니 당연히 댈 수 없었던 거죠』

<바퀴벌레 다음으로 싫은 해병?>

해병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해병 출신 누가 맞는다면 달려가 가세한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해병 출신이라면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뿐더러 기동순찰대가 순찰을 할 때 악명 높은 조직 폭력배들도 해병만큼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명의 해병 출신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음식점에서 목청을 높여 타군을 예로 들어가며 얘기를 하였다.
타군 출신들이 덤벼들면 어쩌느냐고 우려를 표명하자 모두들 「누가 해병대를 건드리느냐,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해병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군용열차가 있을 때는 휴가 가는 해병들이 말썽을 많이 일으켰다.
해병들이 섞여 있는 군용칸에는 반드시 사건이 벌어졌다.
모자를 들고 다니면서 육군들에게 돈을 걷고 그것도 모자라서 육군들은 다 쫓아내고 해병 몇 명이 한 칸을 몽땅 차지하고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일이 잦아지자 4대 김성은(金聖恩) 사령관이 타군에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렸다.
하지만 군용열차에서의 횡포는 그 후에도 해병대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었다.
용산에서 만난 현역 해병들은 요즘은 군용열차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상륙 후 빨리 옷을 마르게 하기 위해 바지가 다리에 붙지 말라고 바지 안에 링을 찹니다. 첫 휴가 나왔을 때 링을 철컥거리며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니까 육군이 여러 명 서 있다가 양쪽으로 쫙 갈라서는 거예요. 그게 신이 나서 첫 휴가 때는 괜히 폼잡고 다녔죠. 하지만 두 번째 휴가 때쯤이면 그런 객기 어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지금 육군에게 공연히 시비 거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그는 그런 악명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여자들에게는 여전히 인기가 없다고 서운해했다.

『오늘 신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자 둘이서 우리를 보더니 갑자기 「어머 해병대야」 하면서 막 도망가지 뭡니까.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퀴벌레고 그 다음이 해병대라고 하더군요. 알고보면 우리도 부드러운 남자인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기만 해도 피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럴 때는 정말 기분이 좋지 않노라고 덧붙였다.
예전의 악명 때문에 여전히 해병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개병대」인데 「개병대」라는 말에 대해 해병들은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서울을 제일 먼저 열었다는 개병대(開兵隊)라는 뜻과 개처럼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라는 설명이었다.
美 해병대의 마스코트인 아메리카 피플즈 테리아라는 개는 싸움터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공격하고 죽을 때 절대로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 용맹스럽고 신비로운 개라고 한다.

한번 물었다 하면 주인의 명령이 없이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놓지 않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그 개처럼 해병대도 조국의 개가 되어 온몸을 불사르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여권 들고 외국으로 달아나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 해병 예비역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당장 전쟁터로 달려갈 겁니다』
충성스런 개병대인 자신들은 코리아 피플즈 테리아가 될지언정 비겁하게 조국을 버리고 도망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해병대에 입대하는 부류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로 해병대의 고된 훈련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고자 하는 그룹이다.
두 번째로는 막연한 동경에서 지원하는 경우이다. 그러니까 해병대의 신화, 해병대의 전통이 멋있어 보여서 지원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소심한 성격을 개조시키라는 주변의 권고를 통해서 입대하는 경우이다.
그 외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해병대 출신의 자녀들이 입대하는 부류와 마지막으로 징집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지원 입대하는 해병들은 「나가자 해병」이라고 부르고 징집에 의해서 해병대로 가게 되는 경우는 「가보자 해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요즘은 「가보자 해병」이 되기는 힘들다.
보통 40대 1의 경쟁을 뚫고 해병에 입대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2월의 경쟁률은 70대 1이었다. 12, 1, 2월에 날씨관계로 지원하는 해병이 없을 때 징집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우선 신체검사에 합격해야 하는데 첫째 눈이 나쁘면 해상침투를 할 수 없으므로 현역 해병 가운데 단 한 명도 안경 낀 사람이 없다.
해병대들은 체력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에도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해병이 이렇게 인기 있는 이유는 군대생활을 통해 자신을 단련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나가자 해병!」>

용산에서 만난 세 병사는 모두 자신들을 「나가자 해병」이라고 소개했는데 대학에 다니다가 군대에 가게 된 그들은 지금까지 고생 없이 자랐고 앞으로도 고생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 일부러 고생해 보려고 해병대를 지원했노라고 말했다.

또 해병기동대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기동대를 통해 봉사하려고 해병을 지원했다고 덧붙였다.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 때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무조건 좋은 것처럼 해병이 그냥 좋아서 지원했습니다. 한순간에 끌렸습니다』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심지어 국적을 바꾸거나 멀쩡한 다리연골 절개 수술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판국에 그들의 그런 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듬직해 보였다.
『해병정신은 세뇌되는 것 같습니다. 해병대에 들어가기 전에 4일간의 가입소 기간이 있습니다. 그때 신체검사를 다시 하고 해병정신을 주입 받습니다.
「나는 가장 강하고 멋진 해병이 되겠습니다」하고 수없이 외칩니다.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끝없이 외치다 보면 정말로 가장 강하고 멋진 해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가입소 기간 동안 멋진 해병이 되겠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무적해병, 귀신 잡는 해병, 신화를 창조하는 해병 등 무수한 구호를 외치면서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쉬지 않고 해병을 외치는데 복무 기간보다 단지 나흘간 동안 해병을 더 많이 부르짖게 된다고.

해병 예비역들도 이 가입소 기간을 세뇌교육 기간이라고 얘기했는데 수없이 해병을 외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해병이 되어 있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입소 기간과 6주간 훈련, 그리고 다시 후반기 4주 훈련을 받으면 그 누구라도 강인한 해병정신을 단단히 주입받게 된다고 얘기한다.
그 기간 동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극한의 훈련」을 거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대답이다.
美 해병대를 「제조창」이라고 부른다는데 해병대는 제조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해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제조창이라는 말이 아주 실감난다고 말했다.
『공수, 유격, 암벽, 헬기 훈련 등을 마치고 나자 내가 정말 훈련을 해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부심과 뿌듯함이 몰려오더군요. 포항에서 훈련을 받고 각자 배치를 받아 떠나올 때 그 동안의 긴장이 풀리면서 모두들 연병장에서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혹독한 훈련을 거치고 드디어 해병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전처럼 심한 기합은 없지만 해병만의 끈끈한 동지애를 기르기 위한 「빵빠레」라는 훈련이 있다고 들려주었다.
11월에 팬티만 입고 옥상에 누워 바닷바람을 받을 때 상당히 추웠지만 모두들 그렇게 누워서 빵빠레 동지애를 기르면서 해병정신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신세대 해병들은 그 모든 훈련을 선배들을 생각하면서 이겨냈노라고 얘기했다.
뿐만 아니라 해병 수난사와 함께 지금도 가장 가난한 군대라는 사실을 그들도 곱씹고 있었다.
『긴장하기 때문에 사고는 별로 없습니다. 「가보자 해병」들도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어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도 빨간 명찰만 달면 해병이 될 수 있다는 말처럼 훈련을 하다 보면 누구나 견딜 수 있게 됩니다』
신세대 해병들은 군대 와서 몸무게가 10kg이나 늘 정도로 강인해졌다는 데 몸뿐만 아니라 정신력까지 강해져 마치 슈퍼맨이 된 듯한 느낌이라고 전한다.

<대를 이어 해병하자>

해병 출신들은 자녀가 해병대에 지원하여 해병 가족을 이루는 것을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해병 예비역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해병대에 지원하는데 아버지가 권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해병대에 지원한다는 것이다.
취재 중에 만난 해병 예비역의 자녀들은 대부분 해병대였다.
자녀가 평발 이어서 해병대에 가지 못했다며 몹시 서운해하는 해병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나이가 되려면 해병대에 가야 하고 해병혼을 배워야 사회 생활하기가 수월하다는 답변이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월남전 참전 해병을 만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해병으로서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몹쓸 병을 얻었지만 자녀는 반드시 해병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월남전에 참전한 해병이라면 대부분 한 사람당 100명 정도의 적을 섬멸하였을 겁니다. 돌격부대로 항상 앞장서서 정글 속으로 뛰어들어가 기지를 마련했습니다. 부하가 한 사람 전사하면 상관들이 두들겨 맞으면서 전투를 했습니다. 포위되어서 며칠간 굶으면서 전투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전투를 하였던 그들은 지금 그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지만, 그들은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데 분통을 터뜨릴 뿐 자신들이 해병으로서 전장에서 싸운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광수씨의 경우는 5부자 해병으로 해병대 내에서 유명한 해병가족이다.

『내가 특별히 해병에 지원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자진해서 가더군요. 둘은 장교로 둘은 사병으로 제대해서 모두들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해병대 출신이라면 패륜사건 같은 걸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상관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이 해병정신인데 해병 선배인 아버지를 해칠 리가 없죠』
홍사덕 의원의 아들도 해병 702기로 현재 연평도에서 복무 중이다. 해병정신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투지」라고 정의한 홍의원은 어려운 일을 해병정신으로 돌파했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전한다.

홍의원은 의장대 출신으로 지금도 해병대 사령부 의장대 출신 동우회 모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해외동포 해병들은 자녀를 입대시킬 수 없자 지난해부터 1사단에 자녀들을 입소시켜 2주일 동안 해병과 똑같은 훈련을 받게 하고 있다.

이 일을 기획한 美 동부지역 해병전우회 한신일 회장은 지난해 30명이 훈련을 받았는데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올해 7월에는 100명을 입소시키기 위해 지금 열심히 준비중이다.
올해는 훈련을 3주로 늘려 한국의 발전상도 돌아보게 할 예정이다.

『해병들과 똑같이 훈련을 받았어요. 제식훈련 집중동작 산악훈련 수색교육을 받고 해군 함정도 탐방했죠. 첫날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니까 먹지 않더니 다음날부터는 배가 고프니까 아무 거나 가리지 않고 먹더군요. 교포들의 가장 큰 걱정이 바로 자녀교육입니다. 짧은 기간이나마 해병에 입대시키고 나니 마음이 놓입니다. 미국에서 자유스럽게 살던 애들이 강한 훈련을 통해 강인해지고 또 해병정신을 통해 조국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국내 172개, 해외 32개 지회>

한 회장은 제 2기 교포 2세 해병 훈련을 위해 내한했는데 교포들이 생각보다 그리 넉넉한 것이 아니어서 경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일러주었다.
특히 이 행사에는 반드시 해병의 자녀가 아닌 일반교포의 자녀들도 포함된다고 한다.
현재 해병대 해외지부는 미국 25개, 캐나다 3개, 브라질 1대, 아르헨티나 1개, 호주 1개, 파라과이 1개 등 총 32개 지회가 결성되어 있다.

『해외 해병 출신들은 외롭고 힘들어 모군(母軍)를 더 깊이 생각하죠. 어쩌면 본국의 전우회보다 더 똘똘 뭉쳐 있을 겁니다. 미국의 경우 대여섯 시간이나 달려가서 서로 교류하기도 합니다. LA폭동이 났을 때 그 지역 해병전우들이 교민들을 직접 도왔고 가지 못한 다른 주의 해병들은 모금해서 동포들에게 전달했습니다』

한인(韓人)커뮤니티 범죄예방, 한인 행사시 질서유지, 지역 순찰, 사고시 신속히 신고하여 경찰 업무 협조 등의 목적으로 창설되었는데 각 지회마다 기동대를 조직해 범죄예방에 나서다보니 미국 경찰들에게 해병기동대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더욱이 219년의 역사를 가진 美 해병대가 미국 내에서 선망의 대상이다 보니 한국해병대 출신들도 덩달아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美 해병들이 재미(在美) 한국해병 전우회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어 요청하지 않아도 그들의 신문에 한국해병전우회 소식도 싣고 교류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고 한다.
또 범죄자들로부터 피해를 당할 때를 대비해 보험에 들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제의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기동대 차량은 없지만 기동대원들은 자신의 차에 해병대 마크를 붙이고 다니면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광복절에는 모든 한인들이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홍보활동을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7월 27일, 워싱턴의 케네디기념관 앞에서 한국전쟁 기념탑 및 공원 개막식이 열린다. 美 해병대에서 한국 해병이 오겠다면 미국 해병이 길거리에서 자더라도 자신들의 숙소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강경서씨가 전한다.
전세계 24개국에 해병대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미국과 태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자랑하고 있다.

전세계 해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긍지가 높으며 모두가 형제 해병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87년에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되자 88년 4월 8일에는 해병 예비역 조직체인 해병 전우회가 발족되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172개 지회와 광역시 및 도 단위에 7개의 연합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이 중 102개 지회에서는 기동봉사대를 운영하고 있다.
70만 해병 예비역 중 절반인 약 35만이 어떤 형태로든 해병전우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한다.
해병정신 중에 애민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해병 기동 봉사대원들은 주로 야간 방범활동, 민생치안 사범 단속 협조, 교통정리 지원, 산악 및 해상구조 활동, 환경보호 및 감시체제 활동을 주업무로 하고 있다.

<해병 가족도 해병>

87년 경기도 안산시의 해병 전우들이 치안부재 현상이 일어나자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범활동을 벌인 것이 발족의 계기가 되었다.
강남해병전우회 기동대장 안만영(安萬永·56세·해병 157기)는 기동대의 역할에 대해 이와 같이 설명한다.
『범죄예방 차원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사법권이 없기 때문에 선도차원에서 일을 하지만 경광등을 단 기동순찰대 차량이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면 범죄가 줄어들 건 분명한 사실이죠. 가끔 주민들이 고맙다며 드링크나 라면을 들고 올 때면 보람을 느낍니다』
서울 강남전우회 회원은 약 280명 정도인데 이들은 주 4회 교대로 교통정리와 야간순찰을 한다.
교통정리는 오전 7시부터 9시, 야간순찰은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하게 된다.
취약지구인 양재천 주변 순찰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주로 20대들이 술에 취해 말썽을 많이 일으킨다고 한다.
술 취한 사람들을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 주기도 한다.
『부인들이 도와주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밤마다 간식을 준비해 줍니다. 해병 가족들도 해병이 다 되었지요』
안만영씨는 해병 행사 때면 온가족이 해병 복장을 입고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일러준다.

강인한 성격의 해병들이지만 부인들에게는 부드럽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인지 부부문제로 고민하는 해병은 별로 없다고 전한다.
기동봉사대 외에도 친목단체로 90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는데 직능별로 공병, 보급, 헌병, 보병, 재무, 택시 기사회, 기독선교회 등이 있으며 직장별로는 창원공단 천자봉 연합회, 안산 기안산업 해병전우회, 울산 현대해병 전우회, 9·28 친목회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해병전우들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 기동봉사대는 주로 자영업을 하는 40~50대 중년들이 참여를 하고 20~30대는 직장 내에 조직되어 있는 기동봉사대에서 활동한다.
또한 각 대학마다 해병전우회 모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면을 걸고 사는 사람들>

지금도 조직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지난 4월1일 아산만 기아자동차 해병 봉사단 발대식이 있었다.
행사 때마다 해병들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는 등 활동을 하자 회사측에서 정식으로 발족식을 하라고 권유를 했던 것이다.

이날 발대식에 전국의 해병전우회 위원장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는데 해병대 행사가 있을 때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이 해병만의 전통이다.
『해병 위장복을 입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우리 해병들은 몹시 좋아합니다. 그 옷을 입고 싶어서 행사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예요. 누가 경비를 주는 것은 물론 아니죠. 어디서 해병 행사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모두들 자비를 들여 달려가서 축하를 하는 겁니다. 해병기동대 차량도 모두들 회원들이 스스로 갹출을 하여 마련한 것이지 누가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해병이 좋아서 함께 모여 일하는 것뿐입니다』

김기수씨는 아무런 이권도 어떤 특혜도 없는 일이지만 모두들 즐겁게 참여한다고 덧붙인다.
해병기동전우회가 단순히 마을 순찰만 도는 것은 아니다.
위급할 때는 발벗고 나서서 재난을 막아낸다. 문민정부 들어서서 네 번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았는데 아시아나 항공사고시 인명구조(목포 해병전우회), 폭우시 인명구조봉사(영월 해병전우회), 위도 해난사고시 봉사(군사 해병전우회), 엑스포 행사시 봉사(대전서구 해병전우회) 활동 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을 유화선(劉和善·54세·해간 32기)씨는 설명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역이건 예비역이건 「나는 해병」이라는 일종의 자기 최면을 걸고 사는 것이 해병입니다.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증명해 보고 그 한계를 넘어섰을 때 「죽자」고 하면 죽을 수도 있는 게 해병정신이죠. 대통령 표창을 받은 영월 해병전우회의 일입니다. 폭우가 내려 사람이 섬에 갇혔어요. 상황이 위급했는데 악천후 때문에 헬기로도 구조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예비역들인 해병 인명구조 요원 세 명이 보트를 타고 가서 사투 끝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했어요. 잠시 후 그 작은 섬은 물에 잠겼어요. 이건 구조 기술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해병」이라는 자기 최면, 자부심, 명예를 늘 지니고 있다가 용기가 필요한 그 순간에 적용하는 기질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실제로 어떤 해병은 자녀의 생활기록부 종교란에 해병대라고 써넣었다고 하는데 해병대를 신앙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고 해병들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해병기동봉사대 못지 않게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단체가 바로 해병 예비역들로 조직된 청룡 환경연합회와 한국 환경경영 연합회이다.

청룡환경 연합회는 정식 등록단체로서 환경평가 때 공식 초청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한국 환경경영 연합회는 22개 지부를 두고 활발히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애경사가 있을 때면 해병들의 단결력은 또한번 빛을 발한다. 특히 상(喪)을 당한 해병전우는 손쉽게 장례를 치를 수 있다. 해병전우가 사망했을 경우 해병 정복을 입고 와서 마치 군대장처럼 운구에서부터 장지 뒷마무리까지 절도있게 처리해 준다.
가끔 해병들의 끈끈한 의리를 보고 기동대 차량을 제공할테니 명예해병으로 가입시켜 달라는 청탁(?)을 해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예전에 해병대의 육성과 발전에 이바지한 인사들에게 명예해병증을 수여한 적은 있다.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 고려대 김성식 박사, 여류작가 이명온 여사, 문산농고 이경재 교장, 종군 작가 김중희씨 등이 그분들이다.

해병의 발전을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해병들도 많다.
해병대 하교 160기인 최돈수 씨는 302면에 달하는 「해병사」를 혼자서 발간해 내는 저력을 보였으며, 해병정훈동지회 회장 정채호(鄭采浩)씨는 해병에 관한 책을 10권 이상 출간한 바 있다.
또 변기룡씨는 1년6개월간 작업한 끝에 49년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지금까지 해병대 장교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인적사항을 총망라한 「해병장교가족」이라는 책을 펴냈다.

<너무 설치는 거 아닙니까?>

개인이 이런 무모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해병의 특유의 돌파력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병들은 입을 모은다.

46년간 배출된 70만 해병 예비역들이 사회 요소요소에 활동하고 있다.
홍사덕·박찬종·장석화·박구일·허재홍의원 등 현역 국회의원과 정창화 3선 의원을 비롯한 전직 국회위원 다수와 김성은 전 국방장관, 김기춘 전 법무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을 다수 배출한 바 있다.
언론인으로는 현소환 연합통신사 사장, 안병훈 조선일보사 전무, 윤혁기 서울방송 사장 등이 있으며 김용철 전 대법원장, 선남식 전 고법판사, 김문희 현 헌법재판소 판사를 비롯해 많은 해병대 출신 법조인들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체육계에서도 해병 예비역들의 활발한 활동이 펼쳐지고 있는데 김정남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 94월드컵 국가대표 김호 감독과 허정무 코치, 한양대 축구부 감독인 이회택씨 등이 모두 해병대 출신이다.
경제계 인사로는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엄종일 건영 대표이사 등이 해병대 출신이다.
소설가로는 김용성·오유권·정건영·천금성씨 등이 눈에 띄고 패션 디자이너 이동수씨도 해병대 출신이다.
원영무 인하대학교 전 총장, 이필원 KIST 시스템공학실장, 차문섭 단국대학교 대학원장, 서울대 김진세 교수, 중앙대 최정호 교수 등 학계에 해병대 출신이 유독 많다.

신영균 예총 회장, 장수봉 PD, 작곡가 정풍송씨, 코미디언 구봉서·임희춘씨, 탤런트 임채무씨 등도 해병대 출신이다.
특히 해병대 출신 가수들이 많은데 최희준·남백송·박일호·오기택·남진·박경원·윤항기·진송남·김흥국씨 등이다.
박양원 전 경희의료원장, 장익열 전 한강성심병원장, 민병철 현대 중앙병원장 등 의료인 중에도 해병대 출신이 많다.
취재 중에 타군 출신들에게 해병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더니 너무 설친다, 너무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친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다, 할 일도 없다 등 대체로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해병이니까」라고 해병과 똑같은 답변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변기룡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각 지역에 있는 해병전우회 특히 기동봉사대의 활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국민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러 해병 출신임을 내세워 폼만 잡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순수한 마음에서 기동봉사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확실히 보기 드문 일>

또다른 해병예비역들은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겠느냐, 설쳐서 잘못된 것 있느냐, 많은 사람이 움직이다 보면 잡음이 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정도로 응수했다.
홍사덕 의원은 유난스러운 단합으로 간혹 배타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는 하나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타군에 비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되어 자랑스럽습니다. 간혹 지나치게 극우적인 행태를 보인 적은 있으나 우리 사회에는 그런 부분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해병전우회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모든 해병의 자발적인 도움이 있었을 뿐이라고 얘기했다.

해병전우회는 어떤 정치색도 띠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순수 친목, 봉사단체이므로 정치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해병회보서 1년6개월간 수많은 해병을 만난 여기자 김경남(金炅南)씨는 해병대원들과 생활하다 보니 자신도 해병이 다 되었다고 한다.
언어습관도 많이 달라져 자신도 모르게 「새발의 피」가 아니라 「새발의 미스무시(무좀)」라고 말할 정도라며 웃는다.
『특수문화에 관심이 많아 입사했어요. 특수문화의 좋은 점을 일반문화화 시키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해요. 해병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면 단결력을 들고 싶어요. 기수 하나로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이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직업도 다양하고 성격도 틀리지만 이들은 해병이라는 이름 하나 아래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아요. 신기할 정도입니다. 기수에 따라 서열이 매겨질 뿐 다른 조건은 다 무시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지금까지 취재한 사람 중에서 서울 종로5가에서 문구사를 운영하는 사람과 안산에서 구두닦기를 하는 해병 예비역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문구사를 하는 사람은 종업원으로 취직하여 자수성가한 분인데 갑자기 불이 나서 알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노력해 다시 사업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보고 그 정신이 놀라웠다고 전한다. 「자기 자신을 끌어 올리는 정신」 안산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사람은 서울 강변 포장마차 주변에서 활개치던 폭력배였는데 자기 주먹을 알아 줄 것 같아 해병대에 입대하였다가 적응을 잘 하지 못해 군대생활 내내 거의 영창에서 보내다 제대하였다.

제대 후에도 방황하다가 자신이 사회악이라는 자각을 한 후 전우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선후배들을 통해 그제야 해병의 참뜻을 깨닫게 된 그는 구두닦이를 시작하여 새 삶을 살면서 지금은 가출 청소년 7명을 돌보고 있다고 한다.
『해병대들은 해병대 작대기 하나를 논 서마지기하고도 안 바꾼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녀는 해병정신을 「자기 자신을 끌어올리는 정신」인 것 같다고 정의했다. 중앙대학교 국문과 김선풍 교수(金善豊·해병 121기)는 해병들의 모임을 단순한 무리의식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의무감이 아니라 목적의식을 갖고 군대에 가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고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대 후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역정신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독교 문화가 자본주의를 살찌게 했듯이 해병들의 건전한 리더십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풍요로운 사회가 되면서 사회정의가 흔들릴 때 의로운 일에 뛰어드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요』
이익이 따르지 않는 일, 의무조항이 아닌 일. 그런 일을 해병예비역들은 하고 있었다.
그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가며 살아가야 하는 요즘 세상에서 확실히 보기 드문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욕을 돋우며 서로서로 칭찬해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해병이 좋아서 해병에 미쳐서 해병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그들은 무작정 그렇게 하고 있다. ●

 

◆ 월간조선 1995년 5월호 자유기고가 이근미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내가 월간조선 1995년 5월호에 기고한 '의리집단 해병대 연구'는 그야말로 군대에 대해 무식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기사였다. 기사 제목은 '죽을 때까지 뭉친다, 왜 해병이니까'였다. 전문에 있는 '해병들도 잘 모르겠다는 해병정신...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끈끈함을 주는가'라는 문구를 오랜만에 보니 웃음이 나온다.

해병들도 잘 모르겠다는 해병정신을 군대라고는 육해공군 밖에 없는 줄 알았던 내가 취재에 나섰으니...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진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월간조선은 두 명의 남자에게 해병대 연구를 맡겼다가 원고가 신통찮게 나오자 "여자에게 한 번 맡겨보자"면 나에게 맡긴 것이다. 두 명의 필자는 모두 해병대 출신이었으며, 한 사람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작가였다. 일단 두 명의 손을 거친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았는데, 한마디로 뜬구름 잡는 얘기 뿐이었다. 해병대는 귀신을 잡을 정도로 용감하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는데, 대부분 몇십년 전에 있었던 얘기여서 현실감이 없었다.

요즘 같으면 품이 많이 들고 귀찮은 원고가 떨어지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거절하기도 하지만 당시만 해도 월간조선에 기고한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참인지라, 떨어지는 원고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그런데다 그때는 '내가 안한다고 하면 능력없는 걸로 여기겠지?'라는 이상한 자격지심이 마음 한 켠에 있었다. 그래서 해병대가 어떤 집단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취재에 들어갔다. 요즘처럼 컴퓨터에 검색어만 넣으면 해병대 관련 자료가 따끈따끈하게 올라오던 때가 아니었다. 신문사 자료실에 가서 노랗게 변색된 신문철을 뒤져서 인터뷰 대상을 찾고, 이리저리 수소문 하고 다녀야 했다.

자료를 찾아봤지만 신통한 게 없었다. 그럴 때는 무조건 관련 인사를 많이 만나야 한다. 해병전우회 본부를 비롯하여 각종 단체의 사람들을 만나고, 외곽에서 개인적으로 해병대 관련 일을 하는 이들을 두루두루 만났다. 각종 관련 자료를 샅샅이 들추고 화제의 해병들을 만나 재미있는 얘기도 들었다. 취재를 하다보면 취재원이 줄줄이 연결되면서 마치 얽힌 실타래가 풀려나가듯 잘 풀릴 때가 있다. 해병대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데다, 자신의 일보다 해병전우회 일에 더 열심인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협조가 무척 잘 되었다. 특색있는 사람들은 힘닿는데까지 만나거나 전화인터뷰를 했다.

취재를 하다보면 어느 선부터 비슷한 얘기가 반복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나올 얘기가 없다는 의미이다. 내 취재의 목적은 '해병정신을 갖게 된 원인'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나올 게 없다고 생각되는 선에서 취재를 중단했다. 나중에 기사가 나왔을 때 왜 사령관 등 높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있었는데, 그 분들을 만날 이유도 없이 내가 원하던 답이 다 나왔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원은 용산역 앞에 있는 해병복지사업단에 다녀오다가 만난 세 명의 해병 현역 병사들이다. 당시 어스름 저녁이었는데 휴가나온 세 명의 병사들이 해병대 용품을 파는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물건을 사고 나온 그들에게 다가가 "저,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 병사는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왜 그러십니까?"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이러이러한 일로 당신들과 대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말입니다. 대화를 하면 말입니다.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밝은 데로 가서 얘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말입니다'라는 어미가 몹시 생소하면서 재미있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오해를 받는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밝은데로 가자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대로변의 찻집으로 들어갔다.
"대체 무슨 오해를 받는다는 거죠?"
"그게 말입니다. 거기가 말입니다. 창녀촌과 가까워서 말입니다. 남들이 말입니다. 오해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참나~ 용산 지리도 잘 몰랐고, 그 동네에 창녀촌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쨌든 밝은 찻집에서 세 병사는 예비역 해병들이 들려주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해병정신을 줄줄이 얘기해주었다.

내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제대한 후에도 뭉치게 하는 해병정신은 이런 이유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었다.
-해군에서 차출하여 조직된 해병대는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뭉칠 수밖에 없었다.
-전시에 선봉에 서서 새로운 곳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에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정신을 갖게 되었고, 그게 해병정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타군보다 출발이 늦어 가장 강한 부대여야 한다는 명제 아래 훈련을 혹독하게 했고, 강한 훈련 속에서 해병정신이 생겼다.
-창설초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뭉치게 한 단결력과 인내심이 해병정신으로 승화되어 이어지고 있다.
-어려운 여건 가운데 이룩한 전승기록이 무적해병의 용맹성과 신화를 만들었다.
-해병 DI(조교)들이 美해병대에서 과학적인 훈련을 받고 와서 철저한 계산에 의해 효율적인 훈련을 시키고 있다. 혹독한 훈련을 치르고 나면 자신감이 생긴다.
-혹독한 기합도 해병정신을 기른다.
-한 때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된 적이 있어 더욱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380명으로 출발한 소수부대라는 점과 자금이 부족해 3기를 뽑지 못했던 처절함이 해병대를 더욱 뭉치게 했다.
-엄정한 선후배 기수가 해병정신을 기른다.
-징집에 의한 '가보자 해병'이 아닌 지원 입대하는 '나가자 해병'이 많기 때문이다.
-해병대가 체력적으로 우세하다는 자부심도 해병정신으로 이어진다.
-훈련받는 동안 '나는 강하고 멋진 해병이 되겠습니다'라고 수없이 외치다보면 저절로 해병정신이 생긴다.
-대를 이어 해병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해병정신이 승계되는 것이다.
-제대 후 해병전우회에 가입하여 사회 봉사를 하기 때문에 해병정신을 이어갈 수 있다.
-의무감이 아니라 목적의식을 갖고 군대에 다녀오기 때문에 해병정신이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다.

대충 이런 결론이 나왔는데, 취재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용산역 앞에서 만난 세 명의 해병도 지원 입대한 '나가자 해병'이었다. 제대 후 해병전우회에 가입해 사회 봉사를 하려고 지원했다는 얘기에 가슴이 뭉클했다. 예비역 해병이 현역 해병을 보면 용돈을 준다는 얘기가 있어 세 명의 해병에게 선배들로부터 용돈을 받았는지 물어봤다. 놀랍게도 세 명의 해병은 그날 낮에 함께 외출나왔다가 선배들로부터 용돈을 무려 50만원이나 받았다고 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나는 취재가 끝날 때쯤 나도 모르게 해병에 매료되고 말았고, 우리나라에 이런 군인들이 있다는 게 너무도 든든했다. 나의 아버지와 두 동생이 다 육군 출신이건만, 그때부터 나는 해병대의 팬이 되었다.

내가 쓴 기사는 바로 그 달의 월간조선 TOP 기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신문광고에 '해병대 연구'라고 박스까지 쳐서 나갔으니, 전국 해병대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1995년에 나는 핸드폰 대신 삐삐를 갖고 다녔고, 집에는 자동응답 전화기가 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한달 내내 내 전화기는 해병전우회원들은 감사 인사를 전하느라 바빴다.
"00해병전우회 000입니다. 기사 잘읽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전에 많은 취재를 했지만, 자신이 속한 단체를 취재해줘서 고맙다고 전화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해병대는 거의 매일 내 자동응답기에 감사의 메시지를 남겼다.

어느 날 낮에 집에 있는데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달 해병대 기사 잘읽었습니다. 참 자세하고 재미있게 잘 쓰셨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 누구신가요?"
"저는 이상무라고 합니다."
켁!! 깜딱!!
"저... 그럼 이상무 사령관님?"
"맞습니다. 기사 참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영광입니다. 이렇게 전화까지 주시고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해병대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별 세 개의 해병대 최고 수장이 직접 전화를 하시다니, 감동!!! 참고로 해병대 출신은 누구나 역대 사령관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있다.
그 다음날이었다. 또다시 묵직한 음성의 남성이 감사전화를 했다.
"저 뉘시온지..."
"포항의 000입니다"
지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포항에서 가장 높은 분이 전화를 주신 것이다.

한 달이 지나 다음 달 잡지가 나오자 감사 전화가 좀 뜸해졌다. 몇 달 뒤에 뒤늦게 기사를 읽고 전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해병대 출신 기자들이 잊지 않고 기사 잘 읽었다는 전화를 주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그토록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원동력은 뭘까? 해병대라면 분명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해병이니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다. 내가 속한 집단을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감사전화를 할 수 있을까? 별로 그럴 거 같지 않다. 두달 후 나는 우리나라 모회사가 경상수지 흑자 1조원을 기록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회사가 어떻게 그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는지에 관한 분석 기사를 썼다. 원고지 150매 분량으로 해병대 기사와 비슷한 양이었다. 그 기사도 상당히 중량감이 있었고, 신문광고에도 실렸다. 나는 흥미롭게 그 회사직원들이 전화를 할지 안할지 지켜보았다. 결론은 그 회사 직원은커녕 홍보실 직원조차 감사하다는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대신 KBS 영상사업단 전직원이 사장의 지시로 그 기사를 복사하여 읽었다고 한다. 영상사업단 PD가 나에게 알려준 사실이다.

13년 동안 여러 집단에 대한 분석기사를 썼지만 해병대만큼 큰 반응을 보인 경우는 없었다. 한통의 전화도 없거나, 홍보실 직원이 전화하는 일이 가끔 있을 뿐이다.
(간혹 그 단체의 최고 위치에 있는 분이 전화를 하기도 하는데, 그 얘기는 다음 기회에...)

참으로 흥미로은 결과였다. 자기가 매달 월급을 받고 있는, 곧 생존의 끈을 쥐고 있는 회사에 대한 기사는 감사 전화 한통 없는데, 해병대는 누가 돈 한푼 주는 것도 아닌데 전화통에 불이 났으니... 아무 대가없이 봉사하는 이들, 자신들도 모른다는 해병정신으로 뭉친 이들, 그들이 바로 해병대이다.

대개의 취재원들은 "기사거리를 제공했으니 기자가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어디 소속된 기자가 아니라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취재원들의 관리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가 쓴 기사를 읽고 나에게 감사의 전화를 하는 사람은 전체의 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기사가 나간 뒤 감사 전화를 할 의무는 당연히 없다.

나는 기사가 나온 뒤에 책을 챙겨서 보내주거나, 전화를 하는 친절한 필자가 아니니, 대개 관계는 거기서 끝나게 마련이다. 내가 전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행여 기사가 나간 뒤 공치사를 듣고 싶어하거나, 뭔가 요구하는 것으로 비칠까봐서이다. 더 솔직한 이유는 기사를 넘긴 뒤 또다른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넘긴 기사는 며칠 안가 잊혀지게 된다.

어쨌거나 해병대는 자신이 취재원이 아니었는데도, 단지 '우리 해병대'를 취재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사하다며 한달 내내 전화를 했다. 당시 나는 일부러 해병대 마크를 단 택시를 골라타곤 했는데, 기사에게 "월간조선에 난 해병대 기사 봤어요? 정말 대단하던데요"하고 넌지시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반 정도는 읽었다며, 신이 나서 해병대 자랑을 했다. 지금까지도 내가 쓴 해병대 기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병대 기사를 쓸 때 내 기사를 인용하겠다며 전화를 하는 기자들도 있고, 그 기사 언제 나갔느냐고 묻는 기자들도 있었다. 하여간 신나게 취재했고, 감사인사 실컷 듣고, 멋진 추억을 갖게 되어 흐뭇하다.

당시 해병대 정훈참모께서 감사하다며 조갑제 편집장과 담당기자였던 김동현 차장, 그리고 필자인 나를 해병대본부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서해안 어디쯤이라는데, 우리가 오면 해병대 시설도 구경시켜주고, 왕새우구이도 사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가기로 한 날 이상무 사령관에게 갑자기 스케줄이 생겨 못 가고 말았다. 그렇게 해병대 방문은 흐지부지 되었고, 그 정도에서 해병대 기사 건은 마무리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듬해 설날 며칠 전, 정훈 참모가 몇 달만에 전화를 했다. 그때 해병대로 초대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조그만 선물을 하고 싶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미 해병대 기사 건을 까맣게 잊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선물은 무슨 선물이냐, 됐다"고 했더니, 그럴 수는 없다며 며칠날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오징어 두 축과 해병대 마크가 새겨진 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그 선물을 받아서 돌아올 때 정말 마음이 흐뭇했다. 게다가 오징어라니, 얼마나 소박하고 멋진가.

소동은 국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다. 당시 나와 절친했던 기자가 국내생활이 지루했던지 돌연 호주 시드니로 날아갔다. 얼마 후 그쪽 한인신문에 취직이 되었다더니 어느 날 내게 전화를 하여 나를 마구 비난하는 것이었다.
"해병대 기사를 뭐 그렇게 잘 써줬냐? 전부 칭찬밖에 없네. 기사라는 건 말야. 비판도 해야지, 그것도 기사라고 썼냐?"
대뜸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해병대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는 글쎄... 문맥 사이사이를 잘 봐. 알게 모르게 비판한 게 있지. 취재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스스로를 비판한 대목도 있잖아. 그나저나 웬 시비냐? 기사는 어디서 봤어?"
그러자 친구 기자 왈,
"지금 난리가 났다. 이쪽 해병전우회에서 우리 신문의 지면을 사서 월간조선 기사를 전재하겠대. 그래서 대체 어떤 놈이 해병대 기사를 썼나하고 봤더니, 세상에 군대 '군'자도 모르는 이근미가? 나참 기가 막혀서..."
계속 비아냥이었다. 친구는 대체 어떤 기사길래 전재하겠다는 건지 궁금하여 기사를 살펴보다가, 내 이름을 보고 반가워 전화했다는 것이었다. 육군출신인 그 기자는 "하여간 못말리는 해병대여~"라며 껄껄 웃었다.

지금도 잊지 못할 해병대 취재. 가끔 해병대 TV 다큐멘터리를 할 때면 만사 제쳐놓고 열심히 본다. 요즘도 해병전우회 마크가 달린 택시를 보면 반갑게 달려가서 탄다.
"누구나 다 해병이 될 수 있다면 결코 나는 해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강한 자부심. 해병정신으로 무장하고, 묵묵히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해병전우회원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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