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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jpg 몇 해 전 어떤 TV 방송에 여순사건 당시 해군에서 함포를 쏘아 양민 1000여 명을 학살했다는 내용이 방송됐다. 너무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는 즉시 해병대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당시 우리 함정에는 함포가 아니라 대전차포밖에 장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항의하도록 요청했다.

전차를 공격하는 37㎜ 포는 명중돼도 목표물을 관통만 할뿐 폭발이 일어나지 않아 인명살상 효과가 없는 포다. 그런 포로 어떻게 1000명을 학살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런 황당한 얘기가 방송에 나갔는지 이해가 안 간다.

작전이 끝난 뒤 공격무기가 빈약해 작전에 차질이 있었다는 내 전투보고서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직속상관 신현준 정대사령관에게 올린 종합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적시했다.

1. 방어무기가 불충분하여 근접교전에 불리하였음.

2. 공격무기가 빈약하여 적을 철저하게 제압하기가 어려웠음.

3. 통신연락 시 총사령부와 기지함정의 주파수가 동일하여 상호 통신에 지장이 있었음.

4. 해군은 해상작전이 주목적이지만, 이번과 같은 사태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해병대 창설이 절실히 요청됨.

이 보고서를 받은 신현준 중령이 해병대 창설을 정식으로 건의했고 그 전에 손원일 총참모장이 임석한 자리에서 작전 결과를 보고하면서 내가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그대로다.

결과론이지만, 나는 여순사건이 우리 군의 사상 무장을 강화하고 군내 좌익세력을 척결하는 숙군(肅軍)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군내에는 좌익분자들이 우글우글했다.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육군에서는 대대 병력이 통째로 월북하는 사건이 잇달았고 해군에도 남로당 비밀요원이 많아 함정 납북사건이 빈발했다. 내가 지휘하는 함정이 납북 직전에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만일 그런 조치 없이 6·25가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그 많은 좌익분자가 군내에 남아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런 사회분위기를 대표하는 사건이 여순사건이다.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찾아온 광복 직후 공산주의 세력은 ‘국군준비대’를 결성했다. 장차 인민공화국 정규군으로 전환시킬 준비였다. 좌우익 각 진영에 우후죽순처럼 군사단체가 생겨나 혼란이 심해지자 미 군정청은 이들 단체를 해체시켰다. 이를 계기로 남로당은 국방경비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조직원을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48년 4월 3일 발생한 제주도 소요사태가 그해 가을까지도 진정되지 않아 여수에 주둔했던 육군14연대에서 1개 대대가 소요진압 증원 병력으로 차출됐다. 10월 19일 여수항에서 보급품과 장비 선적작업이 끝나고 저녁 7시 출동회식이 시작되자 14연대에 침투했던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가 부대 내 좌익세포 40여 명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먼저 무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한 뒤 비상나팔을 불어 출동병력을 연병장에 모아놓고 “지금 경찰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타도하자”고 선동을 시작했다. 반란군 지휘부는 이에 반대하는 하사관들을 사살하고 전원을 무장시킨 뒤 “장교들을 모조리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수는 이날 밤 안에 반란군 수중에 떨어졌고 다음날은 순천·광양·보성·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들불처럼 반란이 번져 나갔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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