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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금포는 북한 땅 황해도 서쪽 끝에서 황해로 길게 돌출한 작은 어항이다. 1949년 8월 이곳에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전용보트가 납북돼, 이를 찾아오기 위한 작전이 있었다. 공산진영이 이 작전을 내세워 6·25가 ‘북침’이라고 주장해 온 정치적 연유로 이 사건은 한동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처럼 여겨져 왔다.

또 이 사건과 내 친구 함명수 제독(제7대 해군참모총장 역임)이 깊은 관계가 있어 말을 아껴왔지만 이제는 입을 열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초기 대한민국과 해군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언제까지나 덮어둘 수는 없다. 나도 이 사건의 중요한 관계자다.

미 군사고문단장 전용 보트 납북

정부수립 1주년을 맞은 49년 여름, 해군은 멋진 관함식(觀艦式)으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행사 닷새 앞인 8월 10일 불길한 사건이 터졌다.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G-Boat)가 하룻밤 사이에 행방불명된 것이다. 인천경비부에 관리책임이 있는 이 보트가 없어진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미 국방성에서 보내준 이 보트를 로버트 장군은 늘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랑하면서 “대통령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빌려드리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낚시를 좋아하는 이대통령은 꼭 한번 이 배를 타보고 싶어 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해군이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천경비부는 산하 제1정대 함정들을 이용해 연평도·덕적도·백령도 등등 배가 닿을 수 있는 서해 항구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버트 장군이 즉시 이대통령에게 알려 해군에 비상이 걸렸다. 손원일 총참모장이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로 불려갔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육군과 해군 총참모장들이 김일성만 도와주니 말이야. 동해에서는 태극기 단 함정이 올라가고, 서해에서는 성조기 단 보트가 올라가고…. 이래서 되겠는가?”이대통령은 앉으라는 말도 없이 역정을 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손제독은 사표낼 각오를 굳혔다.

손제독을 보좌해 경무대에 갔던 해군본부 정보감 함명수 소령은 더 자책감을 느꼈다.경무대를 나오면서 함소령은 보복작전을 제안했다. 자신이 직접 특공대를 지휘해 보트를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손제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즉각 작전계획 입안이 착수됐다.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의 활동으로 보트가 황해도 몽금포 항에 계류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트를 빼앗아오는 방법은 야음을 틈탄 기습작전뿐이라는 결론이 났다. 함소령이 20여 명의 정보대원을 지휘해 극비작전을 감행하고, 충무공함 등 이용운 중령 예하 인천 제1정대 함정 6척이 엄호하기로 결정됐다.

보트 회수 위한 극비작전 감행

나는 302정 책임자로서 이 작전에 참여했다. 정부수립 1주년 경축 관함식이 아직 끝나지 않은 49년 8월 16일 새벽 2시, 작전부대는 인천항을 떠났다.적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백령도 남쪽과 몽금포 서쪽을 멀찌감치 돌아 17일 미명 작전 현장에 도착했다. 작전 목적은 보트를 찾아내 끌어오는 것이고, 그게 안 되면 폭파시키기로 돼 있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 6시, 정대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아직 잠이 덜 깬 몽금포 항구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를 목격한 적진에서 집중사격이 시작됐다. 육지 초소와 부두에 정박했던 적 함정들이 일제히 외항 쪽으로 총열을 맞췄다.

함소령은 적탄을 헤치고 부두에 접근하더니 5척의 보트에 대원들을 분승시켜 항 내로 돌입했다. 모두가 함께 엄호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 따라 들어가는 함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친구 안전이 걱정돼 무작정 항 내로 302정을 몰고 들어갔다.

특공대가 분승한 보트들이 기세 좋게 몽금포항 내로 접근해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바싹 뒤따라가면서 좌현과 우현에 장착된 중기관총을 쏘아 그들을 엄호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보트들이 막 상륙하려는 순간 5척 가운데 4척이 기관고장을 일으킨 듯, 움직임이 정지됐다. 저러다 전원 몰살이다. 순간적으로 이런 위기감에 휩싸였다. 총격전은 더욱 가열됐다. 그 사이 함명수 소령 보트가 상륙을 감행하다가 멈칫했다. 선수에서 대원들의 상륙을 독려하던 함소령이 적탄을 맞은 것이다.

절체절명 위기 속 예상밖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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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버려 두면 친구는 적진에서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형국이었다. 나는 총열이 터져라 하고 맹렬히 중기관총을 쏘아대면서 함소령이 쓰러진 보트로 달려갔다.그는 양쪽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보트 위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보트로 뛰어내려 친구를 구출해 충무공함에 태우고 복수하듯 기관총대를 휘둘렀다.

뒤따라 온 동료 함정들과 함께 몽금포항을 뒤집어 놓았다. 우리 정대의 화력이 우월한 덕분이었다.북한 경비정 4척이 침몰됐다. 기세가 오른 302정은 인접한 적선에 돌입해 육탄전으로 적을 제압하고 적 경비정 제18호를 나포하는 데 성공했다. 인민군 해군 군관을 포함한 포로 5명을 생포하는 전과도 올렸다. 그러나 로버트 고문단장 보트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 사이 진남포항으로 옮겨져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가 있었던 것이다.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출돼 충무공함에 오른 함소령은 운이 좋았다. 군의관이 타고 있어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함소령은 직전 충무공함 함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혈액형을 아는 승조원들이 헌혈을 해 줘 후송 중 계속 수혈을 받을 수 있었다.

조사 결과 드러난 보트 납북경위는 소설보다 드라마틱했다. 보트를 몰고 올라간 범인은 해군 인천 경비부 소속 안성갑 하사였다. 범행 며칠 전 보트 정장으로 임명된 그에게는 짝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다. 하필이면 남로당 공작원의 여동생에게 눈이 먼 그는 “로버트 장군 보트를 몰고 월북하면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일을 저질렀다.

재미를 본 북한은 그에게 더 큰 일을 요구했다. 한국 해군 함정을 끌고 오라는 지령을 받고 그는 1950년 봄 서울에 잠입했다. 어리석게도 재범을 위해 지하활동을 하다가 서울역에서 해군 특무대에 붙잡혀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예상 밖의 전과를 거둔 몽금포 작전은 분명 성공이었지만, 사태는 엉뚱하게 번져갔다. 미국이 한국군의 ‘38도선 월북 작전’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주한 미 대사 존 무초의 강력한 항의에 입장이 옹색해진 정부는 공식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 6·25 북침설로 두고두고 악용

이 작전은 김일성이 살아 있는 동안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6·25전쟁의 도화선이 그 작전이라는 선전·선동을 근거로 중국과 소련은 6·25를 북침전쟁이라고 우겨왔다. 가브리엘 콜코 같은 수정주의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기도 했다.그러나 90년대 초 소련 붕괴 이후 당시 소련 외교문서들이 공개돼 6·25가 김일성의 주도, 중국·소련의 적극 지원으로 이루어진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밝혀지자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어지게 됐다.

떳떳한 보복작전을 성공시키고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살아온 60여 년 세월이 허무하다. 양 다리에 중상을 입은 함소령은 일본으로 후송돼 수술을 받고 불구 신세를 면했다. 그때의 상처 때문에 그는 아직도 보행이 좀 불편하다. 우리는 평생 동지다. 내가 해병대사령관 시절 그도 해군참모총장으로 조국방위 임무를 어깨에 메고 같이 일했다.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우정은 그렇게 생겨났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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